220화
장묵한의 해서체는 반듯하고 잘 쓴 글씨여서 단정하기로는 천하제일이었다. 그런데 범한은 명필가가 글씨 쓰는 장면을 직접 보고 있는데도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노인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어서였다.
“진왕이 옛날에 평락에서 연회를 열고 한 말에 만 냥이나 하는 술을 마음껏 즐겼다네. 이 시에는 어떤 전고가 있는가?”
장묵한은 이번에도 고개는 돌리지 않고 묻기만 했다.
범한은 난처했다. 《반한재 시집》을 낼 때 범한은 이백의 <장진주>란 시를 제외했었다. 그런데 이 늙은 동지께서는 하필이면 왜 이 시에 대해 묻는 것인지.
장묵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늙은이는 어려서부터 한번 본 거와 한번 들은 거는 잊어버리지 않는다네. 그건 나의 자랑거리기도 하지. 한데 그날 자네가 바다만큼 많은 시를 쏟아 내는 바람에 이 늙은이에게도 문제가 생겨…….”
노인이 잠시 주저하다가 자조하듯 말을 이어 갔다.
“그 능력에 문제가 생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겨우겨우 많은 시를 외워 뒀다네. 나중에 《반한재 시집》이 나와서 살펴보니 어린애인 자네의 생각이 대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시가 빠져 있더군.”
장묵한이 자신을 어린애라고 부르자 범한은 기분이 이상했다. 이에 두어 번 헛기침을 한 후 설명해 주었다.
“진왕은 성이 조씨인 황자입니다. 옛날 평락관이란 곳에서 주연을 얼었던…….”
“조씨 성의 황자라고?”
장묵한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혼탁한 눈에는 불신이 담겨 있었다.
“한데…… 천 년 동안 조씨 성의 왕조는 없었는데.”
범한이 깊이 탄식하며 설득하듯 말했다.
“이 후배가 지어낸 것들이니 어르신께서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래서는 안 될 노릇이네!”
장묵한은 어떤 면에서는 무척 고집스러웠다. 이에 자신이 옮겨 놓은 전체 시문이 담긴 책자를 넘기더니 그중 한 수를 가리켰다.
“‘또한 언제나 소사 풍의 아름다움이 흐른다.’라는 구절에서 소사는 또 누구인가?”
범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잠시 후 대답했다.
“소사는 소설을 쓰는 대단한 문인 중 하나입니다. 그의 글은 조잡해 세상에 전해지지 않았지만 그는 저잣거리에서는 어느 정도 유명세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렇다면…….”
* * *
얼마나 지났을까, 범한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무료해하고 있을 때였다. 장묵한이 한숨을 내쉬고는 눈가를 누르며 드디어 붓을 벼루 위에 내려놓더니 암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름이 떨어지니 등잔불의 불씨도 마르는군. 옛날 공부하던 때만 못하네그려.”
범한이 집 안으로 들어온 후 두 사람은 서로 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지금까지 이 황당한 작업에만 몰두해 있던 터였다. 이에 범한이 말아 올렸던 소매를 아래로 내리고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혀 인사부터 올렸다.
“장묵한 대가께 인사 올립니다. 노선생께서는 이 후배를 왜 만나자고 하신 것입니까?”
집 안이 순간 고요해졌다. 그리고 한참 후 갑자기 장묵한이 늙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힘겹게 허리를 깊이 숙여 범한에게 절을 했다.
범한은 너무 놀라 그가 일어날 수 있도록 부축해 줘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 지체 높은 노인이 대체 왜? 북제 황제의 스승인 태부의 스승 아니던가? 그런데 왜 갑자기 나에게 절하는 거지?’
범한이 놀라 멍하니 있는 사이 장묵한은 어느새 몸을 바로 세우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작년 경국에서 만난 후로 벌써 1년이 지났군. 이 늙은이는 평생 덕을 행하는 걸 중히 여기는지라 작년에 경국에서 범한 대인을 모함한 일이 늘 마음에 걸렸다네. 그래서 오늘 대인을 이 자리로 부른 건 모두 사죄하기 위해서라네.”
* * *
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는 장묵한이 수십 년 동안 지켜 온 체면을 버리고 장 공주의 부탁을 받아들여 남쪽까지 찾아가 소인배 짓을 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협상에 따라 소은을 석방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은 현재 그에게 가장 결핍된 것, 즉 형제지간의 정 때문에 그리한 것이었다.
“소은 선생은 돌아가셨습니다.”
범한은 1년 새 부쩍 늙고 마른 노인을 바라보고 있다가 얇은 입술을 살짝 열어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러자 장묵한은 웃으며 범한을 잠깐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범한도 웃었다. 자신이 조금 쓸데없는 말을 했음을 알아서였다. 장묵한은 수십 년 동안 천하를 휩쓴 유명이다. 더군다나 그가 북제에서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어찌 되었든 소은의 죽음 같은 큰일을 모르고 있을 리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게 되지.”
장묵한은 혼잣말하듯 그리고 범한에게 들으라는 듯 말을 계속 이어서 했다.
“그러니 살려면 제대로 살아야지. 내 형제처럼 살면 삶이 정말 별 볼 일 없어지는 거고. 죽인 사람이 워낙에 많으니 결국 그런 죽음을 맞이한 것일 테고…….”
한데 범한은 장묵한의 말이 꼭 옳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이치는 반대입니다. 살인 방화를 한 자가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황금 허리끈을 차고, 도로 건설과 다리 보수에 동원된 무고한 사람은 일하다가 파묻혀 시신 보존도 못 하는 게 세상의 이치지요.”
그러자 장묵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자네는 그런 사람은 되지 말게나.”
그런 사람은 ‘될 수 없네’가 아니라 ‘되지 말게나’라고 말하다니. 만약 제삼자가 조금 전까지 이곳에서 벌어진 상황을 보고 들었다면, 즉 장묵한과 범한이 나눈 대화를 듣고 이 둘의 자연스럽고 가식적이지 않은 태도를 보았다면 이상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너무나도 다른 궤적에서 살던 두 사람이 그리고 음모 때문에 이제껏 단 한 번 만난 사람들이 가장 직설적인 화법으로 자신들의 태도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리될 수 있었던 건 ‘책의 힘’ 때문일지도 모른다.
“왜 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범한이 미간에 싸늘함을 담은 채 말했다.
“자신하기 때문일세.”
대답을 마친 장묵한은 느닷없이 웃기 시작했다. 한데 그의 웃음에는 깊은 슬픔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내 형보다 훨씬 유쾌하게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네.”
범한이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래도 소은 선생이 없었다면 영원히 지금의 자리에 올 수 없었다는 것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장묵한도 범한의 두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한데 자네는 아직 모르는 게 있다네. 죽음이 점점 다가오니 알겠더군. 왜 권력, 지위, 재화가 한낱 연기에 불과한지 말일세.”
그러자 범한이 차분하게 그리고 고집스레 대답했다.
“아닙니다. 정말로 죽음에 임박한다면 어쩌면 후회하실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보지 못했고 누리지 못했는지 말이죠. 선생께서는 평범한 사람은 영원히 누릴 수 없는 걸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과거의 화려한 인생이 늙어 사라지게 되자 감상에 젖으신 것뿐입니다.”
장묵한은 그의 말이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자네는 아직 젊으니 몸에 죽음의 기운이 짙어져 가는 걸 느껴 본 적 없을 거네. 그러니 죽음이 임박했을 때에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는 아직 모를 걸세.”
“알고 있습니다.”
범한이 기계적으로 곧바로 말을 이어 갔다.
“제 말을 믿어 주세요. 죽음이 임박했을 때의 기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묵한은 조금 피곤해졌는지 이 문제에 관련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
“《석두기》같이 경서와 도에 반하는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자기 글에 나오는 인물과 똑같은 속물이라니.”
그러자 범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
“소문이란 놈이 이리도 새보다도 빨리 날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한데 장묵한이 갑자기 배려하는 마음을 담은 눈빛으로 말했다.
“범한 대인, 귀국 후 조심해야 하네. 《석두기》에는…… 금기시된 것이 많이 담겨 있으니 말이네.”
범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잠자코 듣기만 했다. 자신도 알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석두기》는 어렸을 때 경망스러운 치기가 발동해 쓰게 된 것이었다. 이 이야기가 세상에 소개될 기회를 잃게 할 수 없어서 그리한 것이었다.
그런데 벼슬길에 오르고 난 후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들에게 쉽게 트집 잡힐 거리가 될 수 있다는 걸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범한이 느끼기에도 자신의 삶이 《석두기》에 나오는 상황과 놀랄 만큼 잘 맞아떨어져 그도 무의식적으로 조심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열렬한 애독자인 북제 황제에게 들켜 하는 수 없이 털어놓게 되었지만 말이다.
한데 장묵한은 감정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범한 자신에게 이와 같은 관심을 보여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범한은 이 점이 살짝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자 장묵한이 범한의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했다는 듯 미소 지었다.
“오늘 범한 대인을 이리 오게 한 건 내 이기적인 행동에 대해 사죄하는 것 말고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네.”
“고맙다고요?”
범한이 이맛살을 찡그렸다. 이 순간 그는 소은의 생명을 자신이 하루 연장시켜 준 걸 장묵한이 알 리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천하 문인을 대신해 자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것이네.”
장묵한이 미소 띤 얼굴로 범한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범한 대인이 감찰원에 들어간 초기에 경국 춘시의 부정행위가 밝혀졌고 이 소식이 천하에 퍼져 폐하께서도 과거 제도를 손볼 생각을 하셨다네. 범한 대인의 그와 같은 행동 덕분에 누추한 가문의 문인들이 정말로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이는 천추에 기록될 공일세. 대인은 이 늙은이를 안중에 두고 있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감정적으로 그리고 도의적으로 내가 천하 문인을 대신해 범한 대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겠네.”
그러자 범한이 자조적인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는 말했다.
“부정행위를 밝힌 거요? 모두 같은 문인들을 위해 한 일인데 뭐 그리 고마워하실 게 있겠습니까.”
범한의 대답에 장묵한은 전혀 웃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혼탁하고 생기가 조금 없어 보였다. 소은의 귀국과 관련해 장묵한은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자기 때문에 조정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걸 원치 않아서였다. 더군다나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은 문인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 정객도 있고, 음모를 꾸미는 자도 있고, 무력을 쓰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일 처리를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방법이 더 직접적일 수도 있고 더 야만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장묵한은 범한을 잠시 쳐다보았다. 원래는 무슨 말을 해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북제 내정과 관련된 것이란 사실이 떠오르자 굳이 범한에게 말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 * *
그로부터 한참 후, 범한은 장묵한의 집에서 떠났다. 그 후 살아 있는 동안 다시는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다.
* * *
더위가 극성을 부렸다. 시기적으로 봤을 때 1년 중 가장 더운 시기는 벌써 지나갔지만 북제는 대륙의 동북쪽에 위치해 가을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유난히 더웠다. 게다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때 자주 내렸던 가랑비도 지금은 종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머리 위를 내리쬐고 있는 태양만 지독하고 경망스럽게 사람들의 옷을 최대한으로 벗기는 중이었다.
상경성 남문 밖에서 밝은 노란색의 수레가 성문으로 들어가자 청회색의 오래된 성 담벼락은 다시금 성 밖 사람들 눈에 가장 잘 들어오는 존재가 되었다.
범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불안한 마음으로 마차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뜻밖에도 북제의 황제가 경국 사신단을 배웅하러 왔다 갔기 때문이다. 이는 전혀 예법에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북제 대신들이 열심히 황제를 설득했지만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고 결국 고관대작들을 비롯해 태부까지 함께 황제를 따라 성 밖으로 몰려와 경국 사신단을 배웅하고 그들의 체면을 살려 줄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 황제는 범한의 손을 잡고 한담을, 그러니까 자나 깨나 《석두기》 생각 중이란 등의 이야기를 해서 대신들의 이목을 잔뜩 집중시켰었다. 그런 황제를 겨우겨우 돌려보내고 나니 이제 성 밖에는 북제 관리들과 의장용 깃발만 남게 되었다. 범한은 북제 관리들을 훑어보았다. 한데 위화는 나왔는데 장영후와 심중이 보이지 않았다.
범한은 그제야 자신의 등이 흠뻑 젖어 있음을 알아챘다. 그런데 그게 북제 황제 때문에 놀라서인지, 아니면 태양 빛이 강해서인지는 알지 못했다.
사신단은 아직 길시(吉時)가 되지 않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범한이 대열 맨 앞에 서 있는 가장 화려한 마차를 잠시 바라보았다. 북제 큰 공주가 타고 있는 마차였다. 먼발치에서만 봤을 뿐이지만 범한은 큰 공주가 청순하게 생긴 미인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것만 가지고 그녀의 성격까지 파악한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범한은 큰 공주를 데리고 귀국길에 오른 일 때문에 걱정하고 있지는 않았다. 해당타타를 겪고 나니 여자와 함께 있는 일에 더욱 자신감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