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범한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 그리고 북제 황제가 조설근이 자신인 걸 어찌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이런 식으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현 상황이 적응이 안 돼 그는 의자 위에서 뻗어 버렸다. 그러고는 별다른 말은 않고 우선 옆에 있는 찻잔을 들어 차부터 벌컥벌컥 마셨다.
황제가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석두기》 내용을 끝까지 말해 주지 않으면 절대 궁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것이네.”
범한이 탄식하며 말했다.
“폐하, 제가 《석두기》를 썼다는 사실을 어찌 아셨사옵니까?”
황제가 해당타타를 쓱 쳐다보자 해당타타가 살며시 웃었다.
“《석두기》는 담박서국에서만 나오고 조설근 선생이란 분은 은거 중이니, 담박서국 사람만 조설근 선생이 누구인지 알 것 아니에요. 《석두기》가 천하를 휩쓸고 있으니 많은 이들이 조설근 선생의 정체를 알아내려 하겠죠. 며칠 전에 함께 술을 마실 때 범한 대인이 말을 좀 많이 하는 바람에 내가 살짝 알아채고 말았답니다. 그리고 오늘 폐하께서 떠보셨는데 대인이 인정까지 했으니 내 예측이 맞았던 거죠.”
범한은 대체 어찌 말해야 할지 몰라 쓴웃음만 지었다. 우선 지금 범한에게는 《석두기》 작가라는 명성은 그리 절실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까 북제 황제가 마치 《석두기》 속 인물인 곽희가 된 듯 “조 공, 조 공.” 하며 다정하게 외치는 걸 보고 그가 《석두기》의 열혈 애독자임을 알아챈 것 때문이었다.
범한이 《석두기》의 작가임을 확인한 황제는 너무나도 기쁜 마음에 계속 말을 쏟아 냈다.
“경, 얼른 알려 주오. 보옥이 나중에 몇 명이나 아내로 맞이하는지 말이오.”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툭 터져 나오고 말았다. 이제 보니 북제 황제는 아내를 여럿 거느리는 남자 주인공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내였다. 하지만 범한은 계속 손을 내저으며 애원했다.
“폐하, 소신 대충 예순여 장의 글을 썼을 뿐이옵니다. 그래서 아직 다음 이야기는 생각해 두지 않았나이다.”
범한은 이 말을 할 때 옛날 담주에서 약약이 다음 이야기를 재촉하던 일, 여분의 원고, 이야기 수정, 환관으로 전락시키느냐 마느냐 등등 정말 골치 아팠던 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범한의 대답에 이맛살을 찌푸린 황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옆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 해당타타를 잠깐 쳐다보더니 갑자기 범한의 귓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37장에서 해당의 시 모임이…… 작은 사고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인가?”
범한이 곁눈질로 해당타타를 살펴보았다. 그녀의 눈가가 살짝 부드러워지는 걸 보니 분명 훔쳐 듣고 있는 중이었다. 이에 범한은 살며시 웃으며 과감하게 대답했다.
“폐하, 글 쓰는 자는 직접 설명해서는 안 되는 법이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말씀드리지 못함을 용서하소서.”
그러자 황제가 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범 경, 얼른 귀국길에 오르시오. 다음 편을 쓰는 즉시 짐에게 얼른 부치는 거 잊지 말고 말이오.”
하늘에 달이 떠 있는 가운데 나무 아래로 푸른 바닥석이 깔린 황궁 길을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여름밤 이건만 범한은 등을 축축이 적신 식은땀 때문에 밤공기가 싸늘했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전히 기분이 오싹해 가슴을 토닥이며 옆에 있는 해당타타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석두기》 작가가 나라는 걸 눈치챘으면서 왜 나에게는 한마디도 언급해 주지 않은 거예요? 조금 전에 하마터면 황제 폐하 때문에 놀라 죽을 뻔했어요.”
해당타타는 잠시 웃고는 대답했다.
“누가 그리 오랫동안 세상 사람을 속이라고 했나요?”
말을 마친 해당타타는 눈알을 도르르 굴리고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거죠? 폐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조설근 공과 관련된 거 말고 다른 무언가가 더 있었나요?”
그러자 범한이 생각이란 걸 해보지도 않고는 곧바로 온화하게 웃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낭자가 말해 줄래요?”
해당타타는 입꼬리만 아주 살짝 올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사이 범한은 고개를 갸우뚱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은빛으로 물든 해당타타의 기다란 눈썹이 눈에 들어오자 순간 그녀가 청순하게 아름다워 보였다. 이에 범한은 시선을 해당타타의 얼굴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동자로 옮겼다. 그녀의 눈동자는 밤과 어우러져 유난히 더 맑게 빛나고 있었다.
이는 모두 은색의 달빛이 부린 마술 덕분이었다. 아무리 평범하게 생긴 여인도 은색의 달빛에 몽롱하게 물들면 요정으로 변해 버리는 마술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범한은 해당타타에게 어떤 감정 같은 걸 느낀 건 아니어서 그냥 뒷짐을 진 채 느릿느릿 발을 끌며 걷기만 했다. 그러다 해당타타에게 말했다.
“이번에 나를 골탕 먹였군요. 복수는 하지 않을게요. 그리고 그 이유가 뭔지는 낭자도 알고 있을 거예요.”
“내가 범한 대인을 한 차례 도와주기로 해서지요.”
해당타타가 미소 지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남방과 관계있을 거란 생각은 했어요. 그러니 나 같은 외부인의 도움이 필요한 것일 테고요.”
“그렇습니다. 낭자와 나는…… 사실 둘 다 어느 정도는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니까요.”
범한이 자조하는 듯한 괴상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우리의 대화가 좀 단도직입적일 수 있는 거겠지요. 낭자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일어날 수도, 안 일어날 수도 있어요. 어찌 되었든 그때가 되면 사람을 보내 낭자에게 알리리다.”
해당타타가 범한을 잠시 바라보더니 불쑥 다른 얘기를 꺼냈다.
“재상의 사생아 딸을 매우 사랑해서 담주에 계신 할머님께서 여종을 보냈는데도 줄곧 품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내 집안일에 대해 슬쩍 알아보려는 질문은 하지 말아 줘요.”
범한이 고개를 돌려 해당타타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니 그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지요.”
해당타타가 웃으며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냥 궁금했어요. 대체 어떤 사람이 여자를 마음대로 다루려고 하고, 남자를 보면 불편해하며 싫어하고, 결혼 전에는 여자를 진주처럼 떠받들다가 결혼하고 나서 부인이 되면 그 진주를 썩은 생선 눈알 취급하고, 여자는 물로 보고, 남자는 진흙탕으로 여기고, 여자는 귀하게 여기면서 남자는 천하게 여기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말을 멈춘 해당타타는 범한의 차분한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너무나도 궁금하거든요. 세상은 남자를 더 존중하는데 범한 공자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말이죠.”
범한은 잠시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해당타타가 갑자기 절을 하며 정색하고 말했다.
“규방 여인들을 위한 전기를 써주시고 여인들의 고충을 품어 주신 범한 공자께 이 타타가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범한은 잠시 잠자코 있다가 대뜸 답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절대다수의 사람과 근본적으로 달라서 그래요.”
두 사람이 궁 문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돌아가지 않고 아직도 궁 밖에 있는 태부 대인이 해당타타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황제 폐하의 스승을 보고도 범한이 낯빛 하나 변하지 않자 해당타타는 두 사람이 이미 만나기로 선약이 되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해당타타가 태부 대인을 향해 예를 갖춰 인사를 한 후 몸을 돌려 범한에게 말했다.
“나중에 대인을 배웅하러 갈게요.”
범한은 그녀의 말에 숨은 뜻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인 후 곧장 태부의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세 대가 상경성에 내린 밤의 어둠 속으로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 해당타타의 맑고 반짝이던 시선이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경국의 준수한 젊은 관원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남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천하 사람들 눈에 범한은 남들과 다른 사람이었다. 한데 그 자신조차 인정하는 남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란 게 대체 무엇인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 * *
마차가 고요한 뜰 밖에 멈추어 섰다. 그러자 사신단 안전을 책임진 황궁 호위병들은 이번 방문이 경국의 재인 범한이 북제에서 갖는 마지막 방문이란 걸 알게 되었다. 범한이 이 대가를 방문하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한데 금의위들은 천하에 소문이 파다하게 나버린 그날 밤 연회의 시 대결이 생각나 불안한 기분에 휩싸여 대체 범한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는 본디 책 향이 가득한 곳이라 모두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맨 앞 마차에 있던 호위들이 내리더니 눈을 부릅뜨고 주요 입구를 지켜 서기 시작했다.
이어 범한과 북제 태부가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왔다. 친밀한 사이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적의가 있어 보이지도 않자 사람들은 살짝 걱정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언제나 정의에 편에 서서 권력에 아첨하지 않는 강직한 태부 대인과 범한이 작은 소리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범한이 호위들에게 따라오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태부가 실내로 들어가지는 않고 밖에 서서 안쪽을 향해 몸을 깊숙이 숙여 인사부터 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범한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범한 공자, 스승님께서 최근 들어 몸이 많이 안 좋으시다오. 그러니 가급적 장시간 대화는 삼가 주시오.”
이 문인을 향해 범한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러고는 옷을 단정히 고쳐 입은 후 나무문을 살며시 열었다. 안을 바라보니 어느 노인이 작은 붓을 쥔 채 종이 위에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범한이 바라보고 있는 노인은 이 세계에서 최고의 학자로 불리는 분이었다. 천하 곳곳에 문하생이 있고 북제 태부와 경국 서무 대학사도 모두 그가 아끼는 제자였다. 범한이 세상에 재능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학문에 관해서라면 그와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범한이 연회에서 그를 인정사정없이 깔아뭉갰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범한이 시 말고 다른 영역에서는 아직도 그의 경지를 따라오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노인의 성은 ‘장’, 이름은 ‘묵한’이기 때문이다.
집안에는 하인도, 서동(書童)도 없이 길고 품이 넓은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만 있을 뿐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계속 그리다가 가끔씩 이맛살을 찌푸리며 종이를 주시했다. 그러다가 다시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옆에 놓아 둔 책을 뒤적였다. 장묵한의 정신 상태는 1년 전 경국에 있을 때보다 많이 나빠진 듯했다. 새하얀 은발은 여전히 단단히 묶여 있지만 훨씬 진해진 이마의 검버섯은 불길한 징조를 예고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범한은 발소리를 죽인 채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책상을 바라보니 그 위에 펼쳐져 있는 건 담박서국에서 출판한 《반한재 시집》이었다. 더군다나 시집 여백에 주석이 빼곡히 달려 있었다. 범한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당대 세계 최고의 문학 대가께서 내가 ‘외운’ 시에 전부 주석을 단 거야?’
장묵한의 말라비틀어진 손가락은 시집 속 어느 한 구절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로 전생에 원진이란 시인이 쓴 <이사(離思)>에 나오는 구절로, ‘거대한 바다를 보고 나니 강물은 물도 아니오, 무산의 구름을 보고 나니 다른 곳의 구름은 구름도 아니어라.’에서 두 번째 구절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책장을 이리저리 넘기다가 입을 살며시 벌려 고통스러운 듯 말했다.
“맞지 않아! 맞지 않아! 시란 서로 대구를 이루며 짝이 맞아야 하거늘 다음 구절은 맞지 않아!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니야! 여보게, 이게 무슨 뜻인지 말 좀 해주게!”
* * *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범한의 부드러운 음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무산은 남극에 있는 신산(神山)입니다. 1년 내내 운무에 싸여 있는 곳으로 새벽에는 구름에 싸여 있고 저녁에는 비가 내립니다. 하온데 범인이 이곳의 구름을 본다면 아무리 높이 올라가 새하얀 구름을 본다 해도 다시는 그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무산’이라는 두 글자는 다음 두 구절과 연계되는 것이고 순수한 충성심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랬었군.”
장묵한이 씁쓸하게 웃으며 널따란 책상 한쪽 귀퉁이에 놓인 두툼한 책 한 권을 가리켰다.
“이 늙은이도 그런 뜻일 거라 생각했네. 하지만 무산에 관한 전고를 찾을 수 없었어. 산해총람을 아무리 뒤져도 구름이 많은 무산이란 곳은 나오지 않더군. 남극의 신산에 있는 곳이라 내가 몰랐던 거였군.”
범한은 아무렇게나 말을 지어 설명한 것이었다. 그런데 장묵한이 전혀 의심하지 않는 걸 보고 이 노인이 포용적인 온건한 인물이란 생각에 살며시 웃었다. 이에 앞으로 나아가 장묵한을 위해 먹을 갈며 자신이 말해 준 내용을 그가 책의 여백에 정자인 해서체로 작고 빽빽하게 적어 나가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