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밤의 어둠이 점점 황궁을 감싸 안았다. 반달도 황궁 뒤쪽에 있는 청산을 서서히 기어올라 은은하고 담담한 달빛으로 북제 황궁 비춰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검고 긴 처마, 회색과 백색으로 이루어진 황궁 담벼락도 밤과 함께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대전 밖에서 구경하던 신하들이 황궁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궁성 주변에 호위병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태감들도 길을 따라가며 신하들을 인도했다. 신하들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황궁도 금세 고요해졌다. 넓디넓은 광장에서는 궁궐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떠들썩한 분위기가 고요해지기까지는 향 하나를 사르는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연회가 끝나자 황태후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침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범한은 황제에게 붙잡혀 화영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요한 궁 안에서는 맑고 옅은 향 내음이 감돌고 있었다. 범한은 눈을 내리깔고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북제 황제는 지금 황태후의 침전에서 어머니의 잠자리를 봐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왜 자신에게 남아 있으라 한 것인지 범한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궁녀가 범한에게 차와 과일을 내왔다. 범한은 그때마다 웃으며 감사의 표시를 했다. 그런데 궁녀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특히나 눈가에 드러난 그녀의 수줍은 표정에 범한은 마음이 요동쳤다.
하지만 이 야심한 시각에 젊은 황제가 자신을 남게 했고 더군다나 그가 어떤 부분에서 조금 문제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조금 전까지 요동치던 마음은 금세 위축되어 사라져 버렸다.
“폐하께서 범한 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눈을 내리깔고 정좌해 있는 낭자가 옆에서 범한의 두려움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평온한 얼굴로 말해 주었다. 물론 이 말을 해준 사람은 해당타타였다. 범한 혼자 황궁에 손님으로 남게 되니 해당타타가 절반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해당타타는 조금 전 대전에서 있었던 일이 문득 떠올라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왜 범한과 함께 있을 때면 평소보다 훨씬 제멋대로 굴게 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범한도 이유를 말하지 않은 채 살며시 웃고 있었다.
태감이 궁 밖에서 소리쳤다. 그리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가 화영궁 쪽으로 다가왔다. 이게 그렇게 서두를 일인가. 젊은 황제가 내게 도움을 청할 게 뭐가 있다고? 구오지존께서 천하통일 말고 못 할 일이 또 뭐가 있길래?
범한이 궁금증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젊은 황제가 벌써 화영궁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고는 손을 휘둘러 범한과 해당타타에게 안부 인사는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이어 오른손으로 자신의 외투를 벗어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는 어린 태감에게 던졌다.
한 벌로 된 얇은 황색 옷을 입고 있는 황제는 활기차 보였다. 이내 황제는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쭉 뻗었다. 그러자 태감이 조심스레 그가 신고 있던 가죽신을 벗겨 얇은 양말을 신고 있는 그의 발이 드러나게 했다.
해당타타는 황제의 이런 사적인 모습에 익숙한지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반면 범한은 북제 황제가 자기 앞에서 사적인 모습을 보이자 그의 조금도 꾸미지 않은 행동에 살짝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에 범한의 시선은 절로 의자로, 황제의 가슴으로 그리고 황제의 양쪽 발로 향했다.
크지 않고 작지 않았다. 황제의 가슴은 크지 않았고 발은 작지 않았다.
“모후께서는 고요한 걸 좋아하세요.”
젊은 황제가 의자에 기대 태감이 가져온 제비집 미음으로 입을 헹구었다. 그러고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을 흔들어 궁녀와 태감들에게 모두 나가라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자 화영궁에 순식간에 고요가 찾아왔다.
범한이 살짝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폐하, 분부하실 것이 무엇이옵니까.”
경국 사신이 조심스레 행동하자 황제의 눈에 살짝 장난기가 발동했다.
“범 경, 모레 귀국길에 오르게 되어 있지 않은가. 가는 길에 큰 공주를 잘 보살펴 주게나.”
범한은 살짝 놀라고 말았다. 줄곧 잊고 있던 중차대한 일이 지금에서야 생각나서였다. 바로 북제 공주를 모시고 귀국해 혼사를 치르게 하는 일 말이다. 돌아가는 내내 조금의 실수도 허용치 않는 중차대한 일이었다.
요 며칠 범한은 언빙운을 통해 북제 큰 공주와 관련해 몇 가지 정보들을 알게 되었다. 큰 공주는 궁에서만 자랐다. 현 황제와는 이복 남매지간이다. 친모는 일찌감치 빙궁(氷宮)으로 내쳐져 죽었고, 황태후의 사랑을 단 한 번도 받지 못한 탓에 정치적인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된 사람이다.
황제가 왜 갑자기 큰 공주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상황을 놓고 본다면 황제와 누나인 큰 공주 사이에는 정이 깊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황제의 말끔한 이마에 옅게 우수가 깔리자 범한은 자신의 추측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큰 공주는 이제껏 궁을 떠난 적이 없다네. 이번에 혼인 때문에 경국으로 가면 천자인 짐도 이제 다시는 돌봐 줄 수 없지 않은가.”
그러자 범한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폐하, 염려 놓으십시오. 우리 1 황자께서는 한 세대를 빛낸 영웅으로 만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계십니다. 그러니 큰 공주님과 1 황자님은 분명 금실 좋게 백년해로를 할 것입니다. 또한 조정의 모든 대신이 공주님을 예로 대하며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자 황제가 소리를 내며 싸늘하게 웃더니 대꾸했다.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황제가 갑자기 범한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을 이어 갔다.
“범 경, 짐은 자네를 친구로 생각하니…… 자네가 경국에서 큰 공주에게 많은 걸 가르쳐 주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항시 도와주기 바라네.”
범한은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북제 황제와 기껏해야 네 번 만났을 뿐인데 감히 천자의 친구라 불리는 건 가당치 않아서였다.
그러자 범한의 생각을 알아차렸다는 듯 황제가 웃었다.
“범 경, 처음 만났을 때 내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짐이 그대의 시문을 좋아해 자주 읊어 본다고 말이네. 그 시들은 자네가 말하는 것과 같으니 짐과 자네는 이미 1년 동안 대화를 나눈 셈이야. 그러니 짐이 자네를 친구로 여겨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란 말일세.”
범한은 북제 황제의 총애에 몸 둘 바를 몰랐고 송구스러운 마음에 땀이 삐질삐질 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황제를 향해 절을 올리려는 찰나, 황제의 맑고 담담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그런데 이번 목소리에는 노기와 원망도 다소 섞여 있었다.
“하나 그런데도 범 경은 짐에게 좀 소원했던 것 같군. 요 며칠 입궁해 짐과 대화도 나눠 주지 않고…….”
황제는 말하는 도중 갑자기 범한의 두 눈을 응시했다.
“이런저런 일을 가지고 짐을 속이려고나 하고 말이야.”
난감해진 범한이 해명하기 시작했다.
“일이 많았습니다. 홍려사와 태상사 양쪽 일로 바빠 감히 폐하의 휴식을 방해할 수 없었사옵니다.”
황제가 내내 침묵하고 있는 해당타타를 쓱 바라보고는 갑자기 웃었다.
“그러한가? 나는 요 며칠 자네가 가장 많이 한 일은 작은 사고와 함께 산책하고 술을 마신 거라 생각하고 있었네만.”
그러자 해당타타가 황제의 말에 좌불안석하며 불안한 기색으로 답했다.
“타타가 범한 대인에게 천인의 도에 대해 가르침을 구하는 중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또 많은 걸 배웠고요.”
그런데도 황제는 범한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면 범 경은 그 일을 준비하고 있으면서 언제까지 짐을 속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가?”
범한의 머리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려움이 겉으로 드러나도록 관자놀이까지 흘러내리지는 않고, 대신 검고 긴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어 가는 중이었다.
범한의 첫 번째 생각은 ‘설마 사리리 관련 계획이 폭로된 건가?’였다. 정말로 그러하다면 북제 황제는 여인을 좋아하지 않고, 또 천자의 권력 독점욕 때문에 자신이 북제에서 살아서 떠날 수 없게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범한은 슬쩍 곁눈질로 해당타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온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두려움이나 불안 따위는 전혀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이에 살짝 마음의 안정을 찾은 범한은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공손하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무엇을 두고 그리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해당타타가 소은과 관련해 무언가를 추측해 낼 가능성은 있었지만 소은의 일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사리리와 관련된 일 빼고는 범한은 북제 황제에게 두려움이나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예상을 깨고 황제가 다시 질문을 던지자 범한은 하마터면 의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그리고 오늘 밤 황궁에서의 대화는 범한을 여러 번 까무러치게 만들었다.
* * *
“짐이 묻겠네. 임 누이는 대체 어떻게 되는가?”
황제가 범한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황궁 안에서 벼락이 내리친 것만 같았다. 천둥 번개가 치는 빗속에 서 있는 여인이 되어 ‘하늘이시여!’라고 외치는 기분이었다. 범한은 순간 얼이 빠져 나무토막처럼 몸이 굳어 버린 탓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북제 황제가 어떻게 임완아가 자신의 사촌 누이인 걸 아는 거지? 북제 황제가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다는 건가?
불가능해! 불가능하다고! 이 세상에서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아는 사람은 다섯 명밖에 없다. 그리고 그 다섯 사람은 이 놀라운 비밀을 외부로 유출할 사람이 절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북제 황제가 수많은 능력자를 거느리고 있는 타국의 천자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설마 어떤 흔적이나 황실에서 나온 노란 종이 무더기 같은 데서 그 비밀을 알아낸 걸까? 그게 아니라면 왜 갑자기 범한 자신의 처에 대해, 그러니까 자신의 사촌 누이 완아에 대해 질문을 한 거냔 말이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범한을 북제 황제는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의자 팔걸이 부분을 거세게 내리치며 말했다.
“말하거라!”
‘제기랄, 뭘 말하라는 거야?!’
한데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은 꾸며 낸 것이었다. 범한은 실제로는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왼쪽 새끼손가락을 살짝 까딱이던 범한은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다. 절벽에 나타난 사람과 자신과의 관계를 해당타타가 알아챌까 봐 요 며칠 왼쪽 다리에 검은색 비수를 넣고 다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싸울까? 그런데 자신은 해당타타를 이길 수 없다. 도망갈까? 북제가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면 황태자, 1 황자, 2 황자가 곧바로 굶주린 호랑이로 변할 수도 있겠지? 그리고 궁에 있는 마마님들도…….
범한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다시 웃는 얼굴을 했다. 상대방이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하는 이유는 위협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범한은 못 알아들은 척하면서 상대방이 어떤 조건을 내걸지나 먼저 들어 보자고 생각했다.
“폐하,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옵니까?”
* * *
북제 황제가 벌떡 일어나 아까 태감이 벗겨 준 신발에 발을 올리더니 제대로 신지도 않은 채 범한을 향해 직진했다. 범한에게 오는 동안 그의 표정은 점점 다채롭게 변하고 있었다. 조금 전 살짝 분노에 차 있던 얼굴에 점차 담담하게 장난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장난기 어린 얼굴에는 흥분과 기대감 같은 게 숨어 있었다.
황제의 표정에 범한은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이로써 그가 변태임을 확신했다.
황제는 범한의 양어깨를 움켜쥐더니 살짝 추태를 부리듯 어깨를 흔들었다. 그런 후 희색이 만면해 낭랑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범 경, 범 경, 짐을 속이느라 고생이 참 많구려. 세상 사람들을 속이느라 참 힘들었을 것이오.”
“네?”
범한은 순간 황제의 엉뚱한 짓을 저지할 생각이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코앞에 다가와 있는 얼굴을 멍청하게 바라보며 황제가 꽤 잘 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황제는 매일 씻고 휴식도 적절히 취하고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황제의 열광적인 표정과 범한의 멍한 표정을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해당타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조 공!”
북제 황제는 다시 있는 힘껏 범한의 어깨를 두어 번 흔들었다. 그 때문에 범한은 살짝 머리가 어지러웠는데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 공! 어서 짐에게 말하게나. 임 누이가 마지막에 보옥과 이어지느냔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