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범한은 랑도가 앞으로 나서기도 전에 하하하 웃고는 손을 내저었다.
“저는 적수가 못 됩니다.”
아까는 성박죽이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더니 이제 와서는 당당하게 랑도의 적수가 못 된다며 바로 꼬리를 내려 버린 것이었다.
그러자 랑도가 웃으며 응수했다.
“내 상대가 되는지 안 되는지는 우선 겨뤄 봐야 아는 것이지요.”
범한은 깜짝 놀랐다. 정말로 이 고수와 대결하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잘 알고 있어서였다.
우선 숨겨 놓은 쇠뇌의 화살, 독침, 춘약, 독약을 동원하지 않는 이상 자신은 그와 세 합도 겨루기 전에 질 게 뻔했다. 다음으로 상대방이 절벽에서 맞붙었던 사람이 자신임을 확인한다면 고하가 신묘에 대해 계속 숨기는 걸로 보아 자신은 쫓기는 신세로 전락할 게 분명했다.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랑도가 직접 도전했다는 것만으로도 경국 사람들의 체면은 이미 충분히 세워 준 터. 그러니 다시 고달을 내보낼 수 없었다.
이에 범한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도전을 받아들여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범한 귓가에 들렸다.
“사형, 제가 하겠습니다.”
범한은 기뻤다. 너무나도 기뻤다.
북제 사람들도 기뻐했다. 원래 구경하는 사람이 더 기뻐하는 법이다.
* * *
해당타타가 황태후 뒤쪽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랑도를 향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사형, 제가 하겠습니다.”
랑도가 따스한 얼굴로 해당타타를 바라보았다.
“그러려무나. 사매가 나선다면 당연히……. 한데 범한 대인의…… 잔재주를 조심하렴.”
해당타타는 황태후와 황제를 향해 예를 차려 인사했다. 그리고 별말 없이 범한 앞으로 나가 미소 지었다.
“할래요?”
“할게요! 왜 안 하겠어요!”
두 사람은 자신들의 대화가 놀이를 시작하려는 어린아이들 같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대전에서 세 겹으로 빙 둘러 서 있는 북제 사람들도, 경국 사신단에 속한 관원들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는 못하고 있었다. 모두 두 사람의 대결에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게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 기대감은 승부니 양국의 체면이니 하는 것과 상관없이 순전히 잠시 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관한 생각들이었다.
왜냐하면 이번 대결에 나선 한 사람은 문무를 겸비한 경국의 시선이자 또한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어린 나이에 감찰원 제사가 된 범한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북제의 천녀(天女)이자 고하의 제자 중 가장 어린 9등급 고수이며, 전설 속 하늘의 자손이고 다섯 번째 종사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큰 해당타타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당대에 가장 유명한 젊은이들이었다. 그리고 저잣거리에서는 이 둘이 일찌감치 상경성을 함께 거닐었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다. 그러니 대전에 모인 사람들이 봤을 때 이 둘이 함께 어울린 건 영웅이 영웅을 알아본 격이었으며,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남들과는 격이 다르다는 걸 실제로 증명한 셈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대결을 앞두고 있었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문 앞에 지켜 서 있던 왕계년이 하품을 했다. 그리고 대전 안에서 맞붙은 젊은 남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걸 보고 누가 속겠어.”
그러자 곁에 있던 태감이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대전에서 열리는 무술 대결에서 가짜로 싸우다니! 해당 낭자, 재밌는 구경 좀 하나 했더니 왜 우리를 실망시키시는 거예요!”
그러자 왕계년이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구경꾼들한테 판돈 걷은 것도 아니니 연기를 하더라도 진지하게 안 하겠지요. 그리고 가짜로 싸우는 게 뭐 어때서 그럽니까? 두 사람 정도면 황제 폐하께서도 말리기 곤란하실 겁니다.”
싸우는 장면을 보니 범한의 동작은 어수룩하기 그지없었다. 손바닥을 세로로 세워 식칼로 채소를 썰 듯 여기저기 휘둘러 대는 통에 민첩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하지만 손바닥을 휘두를 때마다 제법 그럴싸해 보이게 공기 가르는 소리를 내며 바람을 일으킨 덕분에 제법 살상력을 지닌 손놀림처럼 보이기는 했다. 그런데 범한은 손을 휘둘러 열심히 해당타타 옆에 있는 공기만 갈라 그녀의 옷자락만 펄럭이게 할 뿐 그녀의 몸에는 손을 댈 의향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것은 또 무슨 수법? 이는 가수가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를 때 앞쪽에 선풍기를 틀어 놓은 것과 같은 특수 효과를 내주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영화배우 저우싱츠가 공기 펌프 앞에서 종잇조각을 흩뿌려 주연 배우의 잠옷 단추를 풀어 버리는 수법이기도 했다.
이에 해당타타의 구름 같은 의상은 범한의 장풍에 선녀의 날개옷처럼 나풀거릴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해당타타는 이 구름옷을 타고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해당타타에게서 순간 손가락이 뻗어 나와 동쪽, 서쪽을 찌르더니 이내 감 잡을 수 없는 공격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는 동쪽을 가리키고는 서쪽을 치는 초식이 아니었다. 어린 낭자가 졸병을 잡고 나중에 장군까지 잡으려고 내놓은 수였다.
두 사람은 이런 식으로 서로 여러 합을 주고받았다. 그래서 둘 사이의 대결에서는 상스러운 느낌이 전혀 없었다. 이왕 피를 보지 않기로 한 거 공격도 담백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도 절에서 먹는 식으로 마늘, 생강 등은 넣지 않은 나물 반찬을 만들었는데 기름을 한 방울도 넣지 않아 입에 넣는 즉시 뱉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담백하게 말이다.
* * *
대전에 모인 같은 물에 발 담그고 있던 눈치 빠른 여우들, 그러니까 늙은 여우, 어린 여우, 수컷 여우, 어미 여우, 그리고 일부 대신들은 더 일찌감치 알아차린 상태였다. 한데 이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해당 낭자와 범한이 조정의 체면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이리도 낯 두껍게 행동할 줄은 말이다.
황태후는 단상 위를 바라보다가 밝은 빛에 휩싸여 있는 사람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어 버렸다. 예의 없는 추태로 비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눈가에 온통 가는 주름이 져 있는 것으로 보아 분노하고 있었다. 반면 황제는 단상 위에서 범한과 작은 사고가 이리저리 나풀거리며 다니는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랑도는 평온한 얼굴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범한의 저 어눌한 손짓은 사실은 ‘관을 쪼개 버린다’는 의미를 지닌 매우 위력적인 무공, 대벽관이었다. 한데 경국 섭씨 가문의 가전(家傳) 무공을 어떻게 범가 녀석이 알고 있는 거지? 그는 이 부분을 이해할 수 없을 뿐이었다.
대전 안팎에서 잔뜩 기대하고 둘의 대결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결국 실망했다. 어떤 이들은 지루함을 참다못해 하품까지 해댔다. 아까 이야기를 꺼냈던 태감은 더 이상 못 봐주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대체 언제까지 저러려는 건지. 승부를 가르는 건 이미 그른 거 같은데.”
왕계년 역시 애석해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곧 누군가가 관두라고 소리칠 것 같군요.”
왕계년의 말에 어린 태감이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대전 안에 계신 대인들은 모두 세상 물정에 빠삭한 분들이십니다. 그런데 어느 분이 나서려 하겠습니까.”
왕계년과 어린 태감은 서로 티격태격하다가 결국에는 저 긴 단상 위에서 춤추고 있는 두 사람이 언제 멈출지를 두고 내기했다. 그러자 옆에서 두 사람이 입씨름하는 걸 보고 있던 몇몇이 합세해 판돈을 걸기 시작했다. 섬게 한 수레, 오이 두 근 등 저마다 특이한 것들을 판돈으로 내걸었다.
* * *
“무례하오!”
황태후의 얼굴이 갈수록 어두워지자 보고 있던 대신 하나가 참지 못하고 탁자를 치며 훈계하기 시작했다.
“황태후마마의 생신연이오. 그런데 이 무슨 장난질이란 말이오. 이런 식으로 군주를 기만하려 하는 것이오?!”
대놓고 황제를 발가벗고 돌아다니는 어린애 취급한 무례한 언사였다. 추태이기는 하지만 모두 누가 먼저 나서서 해주기를 바라던 말이기도 했다. 모두 이런 말을 꺼냈다가 밉상으로 찍히고 싶지 않았던 터다. 그래서 범한과 해당타타가 지금 장난치고 있는 걸 분명 알면서도 아무도 말리지 않은 것이었다.
황태후의 경우, 참고 이 상황을 계속 지켜봤던 건 어찌 되었든 오늘은 자신의 생일이고, 어린 여자가 춤추는 걸 보는 게 그리 힘든 일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 대신은 지금 군주를 기만하고 황태후의 분노를 자극하는 행동을 한 것이었다. 이에 황태후가 폭풍처럼 화를 낼 준비를 하며 말을 꺼낸 대신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그사이 그녀의 마음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황태후는 그의 입을 찢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황제는 여전히 빙그레 웃고 있었다.
수면 위 단상에 있는 두 사람은 관중들의 야유를 아예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해서 진지하게 연기를 했다. 해당타타는 계속 나풀거렸고 범한은 호랑이 보법으로 용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낭자의 자태는 단아하고 아름다웠고 범한은 준수하고 멋져 보기에는 꽤 괜찮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겨루기를 하며 자리를 단상 위쪽에서 단상 뒤쪽에 위치한 대전 앞쪽으로 옮겼다. 이는 용좌로부터 겨우 수 장 정도 떨어진 곳으로 아까 말을 꺼낸 대신의 잔칫상이 놓여 있는 곳이기도 했다.
범한의 손바닥이 식칼이 되어 허공에 놓인 도마를 매섭게 내리쳤다. 그러고는 실수했다는 듯 “아이고!”란 소리를 내뱉었다.
해당타타는 공중 공격이 소용없자 오른손 손가락 두 개를 검처럼 뻗어 슉, 하는 소리를 내며 범한의 가슴 쪽을 찌르려 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방향 전환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장풍과 손가락 찌르기는 상대방의 몸을 맞히지 못했다. 대신 공기 가르는 소리는 뒤쪽으로 흘렀다.
뒤쪽에는 겨루기를 멈추라고 말했던 대신의 자리가 있었다.
이에 대신은 깜짝 놀랐다. 해당타타와 범한의 동시 공격은 고하 국사에게 직접 공격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그로서는 잠시 공격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 * *
키 낮은 잔칫상이 순식간에 조각나고 상 위에 놓여 있던 호리병이 깨졌다. 음식이 담긴 접시는 바닥에 뒹굴었다. 술과 고기 안주는 공중으로 솟구쳐 하늘을 얼룩덜룩 물들인 후 다시 대신의 얼굴로 쏟아졌다. 이마에는 유채꽃이, 입에는 무꽃이, 귀에는 버섯이 걸렸는데 여기에 다시 술이 뿌려지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그러자 대전 안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두 사람이 어느 시점부터는 일부러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걸 알아챈 대신들은 조금 전처럼 체면 깎이는 일은 당하고 싶지 않아 아예 입을 꾹 닫아 버리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밝은 빛이 약간 사그라지자 범한과 해당타타는 동시에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알 듯 말 듯 웃었다.
해당타타가 황태후를 바라보며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리고는 말했다.
“범한 대인의 대벽관이란 무공은 대단합니다. 소녀, 대응에 서툴러 대인도 영향을 받았으니 황태후마마께서는 부디 죄를 용서하소서. 실수는…….”
그러자 범한도 자책하는 표정으로 오른손을 휘휘 내저으며 불쑥 끼어들었다.
“말도 내내 잘 뛰다가 헛발질할 때가 있는 법이옵니다.”
황태후는 해당타타를 아끼는 터라 그녀를 질책할 리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자신의 생일이니 이 정도 소란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경국에서 온 사람을 덜 고생시킨 건 조금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범한이 자조 섞인 말로 재미있게 응대하자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 살며시 미소 짓고 말았다.
황태후뿐만 아니라 황제도 기이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대신들도 웃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무언가 난처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그런데 진정한 무공 고수는 앞서 장난처럼 보였던 대결에 젊은 두 강자의 마음이 담겨 있었음을 알아챈 상태였다. 그리고 그가 본 대벽관은 어수룩해 보이지만 실은 살기등등한 공격이었으며, 해당타타의 손가락 검은 부드러워 보였지만 실은 엄격함을 담은 동작이었다. 또한 기다란 단상에서 춤을 춘 것은 사실 무공을 겨룬 것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맨 마지막에는 긴가민가하지만 범한이 패배한 것에 가까웠다.
가짜 대결이 끝났음에도 천장에서 쏟아지는 밝은 빛은 여전히 넓은 대전 안을 감싸고 있었다. 범한과 해당타타는 그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웃고 있었고 그런 그들의 모습은 한없이 온화했다. 이 시각 대전 꼭대기에 늘어뜨려 놓은 반달 모양 등은 어느새 수면을 비추고 있었다.
이번 무공 대결은 그야말로 고개를 들었다가 내렸다가 한바탕 웃어넘기고, 수면 위 달빛도 부끄럽게 만든 그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