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216화 (216/1,108)

216화

일찌감치 편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장이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황태후와 황제를 향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고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소신 성박죽, 경국에서 온 범한 대인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하옵니다.”

황태후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황제는 성박죽이란 자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 그는 랑도의 사질(師侄: 사문에서 조카뻘이 되는 제자)로 천일파(天一派)에 속한 사람 중 하나다. 지금은 황궁 호위병 소속이며 윗사람으로부터 명령받아 겨루기를 하러 온 것이었다.

황제는 해당타타를 통해 범한이 9등급 초반의 고수란 걸 알고 있었다. 성박죽은 겨우 7등급 수준인데 대체 왜…….

황제는 랑도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무공 스승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성박죽은 범한 일행에게도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그리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범한 대인이 문무를 겸비한 사실은 온 천하가 압니다. 이에 성박죽, 범한 대인께 한 수 배우고 싶습니다.”

범한은 잠시 웃으며 랑도를 쳐다보았다. 오늘 대전에서 열리는 겨루기는 승자를 가르기 위한 게 아니었다. 경국 사신단이 귀국길에 오르기 전, 랑도가 자신의 공격 방식을 알아보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북제로 온 후 범한은 단 한 번도 여러 사람 앞에서 무공을 사용한 적 없었다. 그러니 랑도는 분명 절벽에서 있던 일과 관련해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범한이 두 손을 가슴팍까지 올리고 성박죽을 향해 인사했다.

“성박죽 대인?”

성박죽이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범한이 말했다.

“대인은 제 적수가 못 됩니다.”

범한은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 앉아 버렸다.

* * *

신하들이 술렁였다. 그들은 범한이란 자가 너무 오만방자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순간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성박죽 대인,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범한 뒤에 있던 호위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분노에 휩싸여 있는 성박죽 앞에 섰다. 이 순간 햇빛이 대전 지붕의 유리를 통해 아래로 쏟아지며 반짝였다. 그러자 대전을 밝게 비추는 빛 때문에 순박하게 생긴 호위의 얼굴에 드리워진 살기등등한 기운이 여실히 드러나고 말았다.

겨우 한 발짝이었다. 고작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을 뿐인데 고달은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범한의 뒤에 숨어 있어 시선조차 가지 않던 호위건만, 한 발짝 앞으로 나온 그에게서는 은연중에 종사와 맞먹는 풍모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대전에는 바람이 불고 있지 않았지만 고달의 몸에서 발산된 정기 때문에 옷이 살며시 휘날리고 있었다.

범한은 잔칫상에 기댄 채 다리를 편히 벌리고 앉았다. 그리고 손가락 두 개로 작은 술잔을 쥐고 두 눈은 가늘게 뜨고는 곁눈질로 맞은편에 있는 랑도의 표정을 살폈다.

랑도는 현 상황이 흥미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젓가락을 들어 상 위에 놓인 음식을 집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의 눈에는 그의 아래턱이 살짝 끄덕이는 게 보였다. 이는 곧 이번 대결에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성박죽이 심호흡하고는 자기 앞에 선 고달을 바라보았다. 상경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사신단 호위를 맡고 있는 고수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한 초식 내에 상삼호 대장의 수하, 담무 장군을 제압했으니 고달은 고수가 맞았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자 뒤로 물러설 수 없었던 성박죽은 기세 좋게 한마디 했다.

“폐하, 칼을 쓸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청년 천자는 범한을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북제의 황제란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고 또한 무장 성박죽의 용기와 기세가 마음에 들었다. 이에 장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윤허하노라. 하나 성 장군, 신경 쓰도록 하게. 이번 대결은 순전히 무예 교류를 위한 것이니 조정의 체면은 일단 접어 두게. 짐은 승패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상을 내릴 생각이네.”

생신 연회의 주인공인 황태후가 반대 의사가 가득 담긴 얼굴로 아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젊은 황제는 어머니의 시선은 보지 못했다는 듯 활짝 웃기만 했다.

임문과 임정은 잔뜩 긴장하고 말았다. ‘귀국길에 올라야 하는데 왜 북제 황궁에서 이런 소란이 벌어진 거지?’라고 생각했다.

만약 자신들이 이긴다면 북제는 체면을 구기게 되는 것이니 이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만약 북제가 이긴다면 이는 또 경국이 체면을 구기게 되는 것이니 더더욱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들 경국 관원들에게는 이미 십수 년 동안 쌓아 온 북제를 향한 미움이 있었다. 그래서 상대방이 도발해 오자 문신일지라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담아 고달에게 말했다.

“고달 대인, 살살해요. 너무 압도적으로 이기지는 말고요.”

아직 붙기도 전인데 승리를 확신해 버리다니. 범한은 옆에 있는 두 부사를 슬쩍 쳐다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 두 사람이 자기보다 훨씬 더 날뛴다고 생각했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제 부하의 칼을 대전에 들일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황제가 미소 지으며 범한을 바라보고는 손을 휘휘 흔들었다.

대전 밖에서도 안에서 겨루기가 시작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늘은 황태후의 생신 연회라 황궁 규율을 조금 느슨하게 적용하기도 했고 황제도 허락했으니, 편전에서 잔치 음식을 먹고 있던 신하들도 대전 문 앞까지 몰려와 잔뜩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린 태감들이 고달의 장도를 가져와 대전 앞 태감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장도를 든 태감이 그것을 대전 안까지 가지고 들어왔다. 그사이 범한은 대전 문 앞에 서서 슬쩍슬쩍 안쪽을 들여다보는 왕계년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걱정이 일었다.

‘손이 근질거리는 건가? 옛날 손버릇이 도져서 황궁에서 무슨 물건이라도 훔치려는 거 아니야?’

다시 돌아와 고달을 살펴보니 그는 양손에 칼자루를 쥔 후 기묘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앞서 위풍당당했던 위세는 온데간데없었지만 그렇다고 압박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고달은 그냥 칼 한 자루, 그 자체 같았다. 사람 하나, 칼 한 자루가 있을 뿐인데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고달이 있는 자리에는 그냥 칼 한 자루만 있는 것 같았다.

랑도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고달의 손에 들린 독특한 양식의 장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 * *

성박죽은 고달과 마주 보고 서서 차분히 상대를 바라보았다. 성박죽은 머릿속의 온갖 잡념을 버리고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는 칼집에 들어 있던 곡도를 빼 들었다. 그러자 순간 피를 들끓게 하는 금속의 마찰음 소리가 났다.

고달은 여전히 가만히 있었고 두 손으로 장도를 쥔 채 우측으로 몸만 살짝 틀 뿐이었다.

성박죽이 천천히 정기를 운기해 손목으로 보냈다. 그리고 팔뚝이 곡도와 합체된 것 같은 기분이 들자 칼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는 랑도의 사질이었으니 고하 문파의 사람이었다. 비록 실력은 7등급밖에 되지 않지만 고하 문파이기에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상대방은 교만하고 방자하게 행동한다 해도 성박죽은 그럴 수 없었다.

칼이 빛을 내며 눈꽃처럼 활짝 피어났다.

상대와 한 장 넘게 떨어져 있던 성박죽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잠시 후 고달 바로 앞에 나타났다. 얼굴과 몸을 서로 맞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말이다.

눈꽃처럼 펼쳐졌던 곡도도 성박죽의 손에서 다시 나타났다. 성박죽은 곡도를 기이한 자세로 거꾸로 들고 있었고 그 상태에서 칼을 높이 들어 고달의 왼쪽 어깨에 내리꽂았다.

성박죽이 칼을 거꾸로 들고 예측하기 힘든 음험한 공격을 펼친 건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달이 장도를 쥐고 있기는 했어도 별수 없었고 그에게는 칼집에서 칼을 뽑을 기회조차 없었다. 다시 말해 이렇게 서로 밀착한 상태에서는 검을 빼는 것조차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성박죽은 문파의 명성을 훼손하지 않았다. 아주 짧은 순간 상대방 무기의 움직임을 보고 적을 제압하는 방법을 결정할 정도의 실력을 보여 준 것이었다.

대전에 모여 있던 신하들은 곧 고달의 어깨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건 아닐까 싶어 깜짝 놀랐다.

범한도 고달이 미처 손을 쓸 사이도 없이 성박죽이 빠른 공격을 보일 줄 몰랐다는 듯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 * *

턱! 듣기 거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곧이어 깨지는 소리가 울렸고 또다시 신음하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대전의 황태후와 황제, 대전 밖에서 구경하고 있던 신하들이 놀란 얼굴로 사람 하나가 슈욱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성박죽이 바닥에 엎어져 얼굴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큰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고달이 정기로 성박죽을 날려 버렸다고 생각해 순간 깜짝 놀랐다. 정기만으로 7등급 고수를 날려 버릴 수 있는 건 4대 종사를 빼면 겨우 9등급 상에 달하는 최강자 몇 명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달이, 그것도 고작 경국 사신단의 일개 호위 수장이 그 대단한 걸 해내다니.

조금 전 벌어진 일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건 오직 무공 고수들뿐이었다. 성박죽의 곡도가 하강할 때 고달은 검을 뽑는 대신 두 손으로 장도를 쥔 채 칼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성박죽의 곡도 칼끝을 장도의 칼자루 끝으로 막아 냈다. 장도 칼자루는 지름이 겨우 일 촌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고달은 작은 면적으로 곡도와 대적한 셈이었다.

고달이 쥐고 있던 장도의 길이는 사람 키 정도는 족히 되었다. 그런 장검을 고달은 수직으로 세운 후 칼집을 안정적으로 바닥에 내려놓고 있었다.

그러자 곡도 칼끝이 장도 칼자루를 찔렀을 때 성박죽의 전신에 있던 정기가 고달이 들고 있던 장도라는 다리를 타고 바닥석까지 내려갔다. 이때 고달은 작용 범위 밖에 있었고 성박죽은 작용 범위 안에서 정기를 한껏 실어 공격하는 바람에 그는 대지의 힘과 정면충돌하게 되었다.

한데 넓고 깊은 대지의 힘과 충돌했으니 설령 성박죽이 종사라 가정해도 이건 이미 끝난 거였다.

* * *

그 순간 성박죽은 어마어마한 힘이 칼끝으로 되돌아오는 걸 감지했지만 그와 동시에 질식하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이때 고달은 칼을 버리고 주먹을 쥐었다. 양어깨를 원을 그리듯 한껏 웅크려 몸을 왼쪽으로 돌린 후 오른손으로 성박죽의 아래턱에 강철 주먹을 날렸다. 그런데 이 일격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순식간에 성박죽의 입술이 터지고 치아가 부러지면서 피가 여기저기로 튀었다.

고달이 봐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성박죽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그러니 성박죽이 당한 건 고달의 주먹이라기보다는 대지가 휘두른 손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었다.

* * *

성박죽은 일찌감치 태감들이 부축해 의원에게 데려다 놓았다.

고달은 차분하게 황제와 황태후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장도를 바닥에서 빼낸 후 천천히 범한 곁으로 돌아갔다. 그때 쩌걱, 하는 소리가 났다. 조금 전 겨루기를 할 때 잘게 쪼개졌던 바닥석이 이제야 소리를 낸 것이다.

대전에 있던 군신들은 그제야 성박죽이 곡도로 찌를 때 검집에 있던 장도를 대전 바닥석을 뚫고 들어가게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성박죽의 공격은 이리도 강했었는데 대체 왜?

고달이 교묘하게 수를 쓴 걸 알아차린 신하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들로서는 무언가를 더 말하는 게 껄끄러웠다.

범한이 북제 군신들의 표정을 바라보며 살짝 오만하게 웃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범한의 그런 웃음을 역겨워했다. 범한이 들고 있던 술잔을 뒤로 넘겼다.

고달이 살짝 얼떨떨한 표정으로 술잔을 받아 들더니 단번에 술을 들이켜고는 말했다.

“대인, 술을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앞서 범한이 그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었는지는 아무도 알 길이 없었다.

범한이 웃었다.

“나보다는 황태후마마께 감사해야…….”

말을 마치기도 전에 범한은 대전이 조용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는 대전 밖에서 구경하고 있던 신하들과 태감들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왜냐하면 랑도가 말하기 시작해서였다.

랑도가 미소 지으며 범한을 바라보고는 입을 뗐다.

“범한 대인의 잔재주는 과연 명불허전이군요. 대인의 호위도 그런 방법을 쓸 줄은 몰랐습니다.”

말을 마친 랑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웃옷을 조심스레 벗어 뒤쪽에 있는 궁녀에게 건넸다. 그러자 그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두 자루의 곡도가 드러났다.

대전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랑도 대인이 직접 나서다니! 랑도는 국사의 수제자이고 폐하의 무공 스승이었다. 상경에 있는 중신들도 벌써 몇 해 전부터 그가 직접 나서는 걸 보지 못한 터였다. 그런데 오늘 경국 사람을 위해 예외를 두다니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랑도는 신분이 특수한 사람이었다. 이에 군신들은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랑도를 주시하기만 할 뿐 감히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