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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15화 (215/1,108)

215화

황태후는 각종 선물을 보며 만족한 듯 살며시 턱을 치켜들었다.

경국 사신단의 선물은 일찌감치 경도로부터 옮겨 온 상태였다. 한데 유명하고 귀중한 것이기는 해도 절대 기이한 것은 아니었다. 범한은 황태후를 위해 하늘의 선녀가 인간 세상에 내려 준 것 같은 시를 짓지 않았다. 그가 시를 지었다면 북제 황태후의 체면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범한의 체면은 땅에 떨어졌을 것이고 변변치 못한 서예 솜씨도 공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범한이 개인적으로 준비한 선물은 작은 병이었다. 병 안에는 호박색의 맑은 액체가 들어 있어 얼핏 보기에는 평범해 보였다. 한데 황태후가 뚜껑을 열고 잠시 냄새를 맡아 보더니 범한을 다시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이것의 이름이 ‘사랑스러워’였기 때문이다.

예측한 그대로다. 별다를 것 없는 향수였고, 황실 금고에서 생산하지 않은 지 열다섯 해가 된 물건이었으며, 범한이 경여당에서 빼앗아 온 것이었다. 그리고 원래는 해당타타에게 주려고 준비한 물건이었다.

단지 해당타타가 향수를 좋아하지 않았고 상상했던 것보다 미녀가 아니어서 주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경도에서 이청조의 시와 프랑스식 향수를 준비할 때는 남녀 간의 접근법으로는 해당타타를 설득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녀에게 한 방 먹을 줄 생각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범한은 황태후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인사를 올린 후 눈을 들어 황제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런데 청년 천자 역시 방긋방긋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일찌감치 선입견이 생겨서인지 지금 이 순간 황제가 자신의 보며 좋아하는 눈빛을 또 보게 되자 범한은 온몸의 털이 쭈뼛쭈뼛 솟구치는 것만 같았다.

범한은 온몸의 털이 쭈뼛쭈뼛 솟는 기분이었지만 공손한 표정으로 눈을 아래로 내린 채 젊은 황제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도 쑥스러워 다시 황제 옆에 있는 황태후를 바라보았다. 그런 후 맞은편에 앉은 태부와 재상의 늙은 얼굴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으니 이들은 건너뛰고, 다시 태부 옆에 놓인 의자로 시선을 보냈다.

비어 있는 의자라 누구 자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이리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다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물가 옆으로 난 복도 뒤편에서 누군가가 대전으로 걸어 나와 황태후와 황제를 향해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리고는 자연스럽게 그 빈 의자에 가 앉았다. 그리고 그가 자리에 앉자 궁녀가 다가가 술을 따라 주었다.

길고 호리호리한 체형에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그는 한눈에 봐도 위세가 대단해 보였다. 눈매는 말라붙은 우물처럼 침착했으며 깊이감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그의 허리에 쇠사슬이 걸려 있다는 점이었다.

‘두 개의 곡도를 지니고 대전으로 들다니 이런 겁 없는 사람을 봤나!’

범한이 싸늘하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고개를 기울여 임정에게 물었다.

“누구입니까? 태부 바로 아랫자리에 앉고 칼까지 들고 입궁할 정도면 대단한 인물일 것 같은데요.”

그러자 임정이 작은 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저분은 고하 국사의 수제자, 랑도 대인입니다. 황궁 호위병 대통령 직위에 있습니다. 한데 요 몇 년 동안은 북제 황제 폐하의 무공 수련만 돕고 있고 대통령 일은 안 한다고 합니다.”

범한이 “아.” 하고 한마디 내뱉고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살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보니 해당 낭자의 대사형이셨군요. 역시 대단한 지위에 계신 분이었군요.”

그 순간 랑도의 차분하고 깊은 눈은 범한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그러자 범한은 웃어 보이며 랑도를 향해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건배를 제안했다. 그리고 동시에 소리는 내지 않고 입만 살짝 움직여 한마디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랑도의 미간이 살며시 일그러졌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잠시 머뭇거리다가 랑도도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보이며 멀찌감치 떨어진 범한에게 술을 권하며 한 번에 들이켰다.

범한 옆에 있는 임정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대인, 이번에 꼭 저분과 친분을 쌓아야 합니다. 오늘이 첫 만남이기는 해도 안타깝게도 대인께서는 며칠 후 귀국길에 올라야 하니 말입니다.”

범한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랑도가 자신을 알아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범한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저만치 멀리 앉아 있는 랑도는 그대로 의심하는 중이었다. 한데 맞은편에 있는 젊은 경국 관리의 안색이 자연스럽고 또 모르는 척하는 기미가 전혀 없어 보이자, 심중의 추측이 일리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절벽 위에서 검은 옷을 입고 있던 사람은 진평평의 그림자 기사였으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범한 제사가 아닐 수도 있다고 말이다.

범한은 편안한 마음으로 대전에 놓인 잔칫상을 쓱 훑어보고는 물었다.

“왜 심중 대인은 보이지 않는 겁니까?”

임정이 대답했다.

“심중은 진무사 지휘사이기는 하지만 그의 품계로는 대전에 들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오늘은 황태후마마의 생신 연회니 그분은 분명 상경성 방위 업무를 보고 있을 겁니다.”

범한은 고개만 끄덕이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연회를 위한 풍악이 울려 퍼졌다. 관악기와 현악기가 일제히 웅장하게 소리를 내자 무희들이 대전 한가운데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궁 꼭대기에서부터 빛이 환하게 밝아 오자 황태후의 생신 연회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황제가 황태후를 향해 잔을 들고 축하를 했다. 그러자 아랫자리에 앉은 신하들도 차례대로 무릎을 꿇고 절하며 황태후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범한은 타국의 신하이고 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옆에서 소곤거리며 알려 주는 임정의 지시를 따라 행동한 덕분에 무사히 첫 번째 관문을 넘길 수 있었다.

아름다운 궁녀들이 술과 과일 등의 연회 음식을 들고 와 잔칫상 위에 살며히 내려놓았다. 그런 후 상 하나에 궁녀 한 사람이 붙어 시중을 들었다. 범한은 궁녀가 시중을 들 때마다 살짝 몸을 기울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범한의 이런 행동은 북제 신하들이 보기에 작위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름난 젊은 인재는 과연 다르다며 범한의 행동을 좋게 보았다.

그런데 범한은 버들잎처럼 고운 눈썹과 나긋나긋 행동하는 궁녀를 보니 도리어 마음이 더 불안해졌다. 날마다 이리 아름다운 낭자들에 둘러싸여 사는, 젊은 황제가 음란한 청년으로 전락하지 않았다니. 이거야말로 문제 있는 것 아닐까.

* * *

황태후의 생신 연회는 일반 노마님들의 생일과는 달랐다. 그렇다고 많이 다른 건 아니었다. 그저 초대된 손님들의 계급이 높고 내놓은 음식들이 조금 더 고급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식후 여흥을 위한 단계에서는 조금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는 철령 대청산 이도하촌 서쪽에 사는 이씨 아주머니의 50세 생신연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의식이었다.

범한은 태양혈을 문지르고 있었다. 얼굴에는 온화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 욕을 내뱉고 있는 중이었다.

얌전한 낭자들이 요즘 들어 대놓고 자신을 ‘이 몸께서’라며 시원시원하게 부르는 걸 좋아하고,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살짝 수줍게 웃으며 닭살 돋는 행동을 하는 걸 좋아하고, 돼지 잡는 백정은 옆집 채소 먹는 걸 좋아하고, 머리에 꽃을 꽂고 시집가지 못한 여인들은 사방을 다니며 중매쟁이 노릇을 하는 걸 좋아한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재주 없는 것과 가장 친해지기 마련이고, 자신이 가장 못하는 일을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심리학에서도 사람은 결핍된 것에 무의식적으로 강하게 끌린다고 했다.

그래서 줄곧 무공으로 명성을 떨치던 경국은 현 폐하의 인도로 문치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에 경도에서는 유명한 무장과 무공 고수들이 이른바 ‘시 모임’이란 것을 앞다투어 열게 되었고, 황궁의 숙 귀비도 문학을 좋아하여 황제에게 총애를 받게 되었다. 2 황자의 경우도 정치와 경전에 해박한 지식이 있어 민심을 두루 얻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시선 범한이 혜성처럼 나타나자 그는 모든 문인의 관심과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줄곧 천하 문예의 중심지를 자처했던 북제에서는 자력갱생의 열기가 일어 시를 짓는 기풍이 사라지고 결투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즉 도리를 따질 때 입씨름하던 것이 이제는 주먹질로 바뀐 것이다. 이런 이유로 경국 사신단 거처 입구에 각종 칼과 검이 잔뜩 던져져 있었고, 범한과 무예를 겨루기 위해 찾아온 북제 고수의 수가 사신단 거처 문 앞에서부터 연산 골짜기까지 늘어설 정도로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범한은 문을 걸어 닫고 문밖출입을 삼가다 해당타타를 만날 때만 밖에 나간 것이었다. 이렇게 겨우겨우 대결 신청을 피해 왔건만 하필 귀국하기 바로 전에, 그것도 황궁 대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이건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 *

“범한 대인, 이번 제의가 어떤가요?”

황태후가 웃으며 범한이 앉아 있는 잔칫상 쪽을 바라보았다. 질문이기는 했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놀라 멍하니 있는 범한에게 북제의 무장 하나가 대결을 신청했다. 말로는 각자의 무공을 연구하고 배우는 것이라 했지만 이건 누가 봐도 자명했다. 북제 군신들이 문학적으로 유명한 시선에게 굴욕을 주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유는 모르겠으나 범한이 보기에 황태후도 자신을 그리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 위쪽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입을 활짝 벌리고 빙그레 웃었다.

“황태후마마, 소신은 닭 잡을 힘도 없는 사람이니 그냥 넘어가겠나이다.”

그러자 대전에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범한의 말을 믿는 이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범한은 이미 정거수를 이기고 검은 주먹으로 섭령을 때린 사람으로 천하에 알려져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러니 군신들로서는 경국의 정사가 이리도 담이 작을 줄 몰랐다며 웃음이 터뜨리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황태후는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범한 대인은 너무 겸손하군요.”

그녀는 이 한마디 말로 범한의 거절 의사를 거부해 버렸다.

범한의 눈꺼풀이 팔딱팔딱 뛰었다. 그는 전생에 읽은 시공을 넘나드는 소설 속 주인공들이 왜 전부 권세를 쥔 후에는 황태후를 ‘늙은 년’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거절한다면 이는 곧 조정의 체면에 먹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경국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절름발이를 볼 면목이 없을 테고 신양 쪽에서도 이걸 빌미로 어떤 음흉한 짓을 꾸밀지 모를 일이었다.

이에 범한은 웃으며 반 발짝 뒤로 물러서서 양손을 가슴팍까지 올리고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러자 황태후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 한편 황태후 옆에 앉아 있던 황제는 약간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며 배려의 말을 건넸다.

“범 경, 만약 몸이 불편하다면 관두게.”

범한은 북제 황제와 겨우 몇 번 대화를 나누어 봤을 뿐이고 황제에게 불만이 있기는 했지만, 그의 말이 진심인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구오지존이란 생각이 들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범한은 고개를 치켜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사신인 제가 대전에 피를 뿌리게 되어도 이는 생신이신 황태후마마를 위해 바치는 피의 꽃이라 여겨 주시오소서.”

예의에 어긋나는 적절치 못한 언사로 대전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황태후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그런데 황제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한데 이 범한이란 작자는 따뜻하고 부드러워 보여도 실제로는 절대 손해 보지 않는 괴팍한 성질의 소유자 아니던가. 이에 범한은 곧바로 절레절레 손을 흔들었다.

“제 언사가 지나쳤습니다. 겨루기라고 하셨으니 딱 그 정도만 하겠사옵니다.”

그러자 황제가 싸늘한 눈으로 군신들을 바라보았다.

“힘 조절이 안 되는 자는 나와서 추한 꼴을 보이지 말라.”

황제의 엄명이 내려졌으니 장난으로 상대를 다치게 하려는 사람은 나설 수 없게 되었다.

군신들은 깜짝 놀랐다. 황제가 몇 년 사이 놀랄 만큼 성장해 이제는 자신들도 대들지 못할 만큼 천자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신하들이 보기에도 무언가 이상한 건 있었는지 이들은 속으로 불만을 쏟아 냈다.

‘제기랄, 황제 폐하가 범한에게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거냐고!’

‘대체 어느 나라 황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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