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초여름의 상경성은 바람이 불지 않으면 매우 무더웠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사방에서 먼지가 일어 그야말로 고역스러웠다. 한데 다행히도 날도 저물고 밤바람도 살짝 스치고 지나가 준 덕분에 자그마한 사당은 찌는 듯한 열기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처마에는 듬성듬성 솟은 나뭇가지 위로 커다란 보름달이 휘영청 걸려 있었다.
범한은 허리끈을 단단히 여미고 색마가 도망이라도 치듯 사당 안에서 뛰쳐나왔다. 그의 말간 얼굴에는 조금 전 일어난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황당함이 가득했다.
사당 문 앞에 왔을 때 범한은 고개를 휙 돌려 사당 지붕 끝에 걸린 달에 들어가 앉아 있는 여인을 호되게 꾸짖었다.
“당신도 당신 사부와 똑같은 사람이었어. 전부 미쳤어!”
범한은 위장하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살짝 수줍은 사람인 듯, 달콤한 사람인 듯, 천진난만한 사람인 듯 자신을 위장해 왔다. 그리고 믿지 못하겠지만 여전히 선량하고 순결한 사람인데……. 그런데 오늘 이런 황당한 일을 겪게 되자 놀라고 분노가 치밀어 올라 결국에는 거친 말을 쏟아 내고 말았다.
해당타타는 지붕 꼭대기에서 연애하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보모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하필 평소 머리에 묶어 놓는 손수건을 목에 메고 있어 딱 봤을 때 범한에게는 어떤 세계의 지휘관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해당타타는 범한이 이렇게나 빨리 깨어날 줄 예상 못 했다는 듯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으로는 옅은 부끄러움과 장난기를 잠깐 번뜩이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왜 이렇게 빨리 나왔지?”
범한은 화가 많이 난 상태였지만 해당타타의 반응이 어처구니가 없어 ‘이 여자 대체 뭐지?’라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해당타타는 곧 이유를 알아챘는지 자책하듯 자기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비개의 제자인 걸 잊고 있었네. 좀 더 일찍 생각났으면 아까 약을 탈 때 용량을 늘렸을 텐데.”
달빛이 살며시 떨렸다. 나뭇가지도 살며시 떨렸다. 그리고 해당타타는 몸을 날려 지붕 아래로 내려왔다. 아주 살짝 먼지를 일으키며 범한 옆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홱 돌려 활짝 웃으며 내실을 잠깐 쳐다보더니 이어 사당 문을 열고는 범한에게 함께 나가자는 행동을 취했다.
사당 밖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저 멀리 우물에서 우렁찬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와 농가의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었다. 한편 범한의 마음에서는 원망이 한껏 무르익어 그는 이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추궁하듯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내게 무슨 약을 쓴 거죠?”
“춘약이요.”
해당타타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당당하게 부연 설명까지 했다.
“궁에서 최상품으로 가져왔어요.”
“당신이……!”
범한이 삿대질하듯 해당타타의 코를 향해 손가락을 들이댔다. 남들보다 곧게 뻗은 그녀의 콧대를 욱하는 마음에 박살 내 버리고 싶었다.
“나는 경국의 사신이에요. 그리고 사리리는 곧 당신 황제 폐하의 여인이 될 사람이고. 정말로 간덩이가 부었군요!”
해당타타가 순간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도하강에서 내게 춘약을 썼을 때는 왜 자신의 간덩이가 작은 줄 몰랐던 거죠?”
“그때는 적이었고 오늘은 친구 사이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찌 이런……!”
말은 이렇게 했지만 말하는 내내 범한은 살짝 뒤가 켕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에 해당타타가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궁에서 대인이 한 말 기억해요?”
* * *
한참 전 황궁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난번에 주신 해독제는 진피가 많이 들어갔는지 굉장히 쓰더군요.”
햇살에 취해 있는 해당타타가 말했다.
범한은 그날 자신이 쓴 속임수를 상대방이 알아챘다는 걸 알고는 웃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는 감찰원 제사이지 하늘의 도를 따르는 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낭자께서도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정 그렇게 못마땅하시다면 낭자도 제게 그 약을…… 사용하시든지요.”
조금 경솔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해당타타는 다른 여자들처럼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거나 하지 않고 도리어 담담하게 받아쳤다.
“기회가 된다면 그러고 싶군요.”
* * *
‘기회가 된다면 그러고 싶군요, 라니!’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인 범한은 이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그런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범한은 무의식적으로 어처구니없다는 듯 ‘칫! 칫!’ 거렸다. 하지만 화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자신이 약을 쓰라고 말했고 상대방이 요구대로 약을 썼으니 범한은 할 말이 없었다. 고개를 치켜들고 잠시 달만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미워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었다.
“나도 수도하는 도인이 아니라 그저 원수를 갚고 싶은 어린 여인일 뿐이거든요.”
해당타타는 말하는 내내 만족스러운 사람처럼 방글방글 웃었다.
“그래도 사리리를 이용하면 안 되죠. 사리리는 낭자에게 자매와 같은 사람 아닙니까.”
범한이 싸늘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잖아요!”
“리리는 당신을 좋아해요.”
해당타타가 미소 띤 얼굴로 계속 말했다.
“당신도 리리에게 반감이 없잖아요. 그러니 우리 자매 생각으로는 가능한 일이에요.”
사실 해당타타는 범한이 《석두기》의 작가, 조설근 선생이란 걸 안 후부터 그에게 춘약을 쓰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진 터였다.
범한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러다 무엇을 떠올렸는지는 몰라도 한참 후 갑자기 해당타타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사실 낭자께서 내게 춘약을 썼으니 비록 당신이 미인 축에 드는 건 아니래도 나도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내 미색을 대가로 치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리리 낭자를 우리 둘 사이에 끌어들이다니요!”
해당타타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도 별수 없는 젊은 여인인지라 범한의 말에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녀의 맑은 눈이 한밤에 초원에 사냥 나온 이리처럼 범한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범한은 노기를 살짝 죽이고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눈을 살짝 가느다랗게 뜨고는 말했다.
“그냥 궁둥이를 털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 낭자가 사부님께 꾸중을 들을까 염려되는군요.”
해당타타가 심호흡하고 감정을 억누른 후 차분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오늘 제가 꾸민 계략에 대해 대인의 양해를 바랍니다.”
그러자 범한이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그런 계획이라면 얼마든지 짜세요.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찰 남자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낭자께서는 그냥 관두시죠.”
그러자 해당타타는 분노 대신 작은 소리로 말했다.
“황궁 연회에서 무도 대회가 열립니다. 대인은 준비해 둬야 할 겁니다.”
“연회가 끝나자마자 귀국길에 올라야 합니다.”
이어 범한은 해당타타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노려보며 이상한 말을 했다.
“집안에 급한 일이 있어 상경에 남아 있을 수 없어요. 그러니 나와 사리리 낭자가 다시 만날 수 있게 자리나 한번 잡아 줘요.”
해당타타는 가볍게 예를 갖추어 인사하고는 침묵으로 답했다. 그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범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논두렁을 지나던 범한은 살짝 비틀거리더니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어쩌면 마음이 불안정해서 그랬을 수도. 그런데 양손을 긴 옷소매에 넣고 무언가 찾는 걸 보니 조금 전 넘어질 뻔했던 건 허리끈을 제대로 묶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시대를 풍미하는 시선이, 그것도 훗날 한 세대 동안 권력을 쥘 관리가 상경성에서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한 사당 밖에서 이번 생의 가장 낭패스러운 꼴을 내보인 것이었다.
해당타타는 웃기 시작했고 반짝이는 두 눈에는 희열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그녀를 이렇게나 기쁘게 하는 게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 * *
범한은 사신단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눈빛은 차분함 그 자체였다. 조금 전 낭패스러워하던 감정이나 앞서 표출했던 노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면서 계략에 빠질 수 있다. 정말로 주도면밀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완벽히 꿰뚫어 보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러니 범한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해당타타에게 그런 이상한 면이 있었고 그녀가 그런 일을 저지를 줄은 말이다. 게다가 과감한 결단력과 도박성이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니.
“겨우 넷이라고?”
범한은 목욕을 마친 상태에서 의자에 몸을 반쯤 누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몸에 아직도 옅게 향이 남아 자기도 모르게 그 낭자를 떠올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어떤 생각들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그러자 냉혈한인 범한도 결국에는 그 일이 그 여자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따져 볼 수밖에 없었다.
해당타타의 말은 어쩌면 진짜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고?
언빙운이 눈살을 찌푸리며 범한을 슬쩍 바라보았다. 범한은 자신의 상사이며 사신단의 어엿한 수장이었다. 더군다나 이제 곧 귀국길에 올라야 하는데 소리 소문 없이 하루 종일 코빼기도 안 보이다 이제야 나타나다니. 처리할 일은 산적해 있는데 말이다.
오후에 사람들에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해당타타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지만 그 이후에는 또 어디로 사라졌던 건지. 그리고 오늘따라 낯빛은 왜 저렇게 이상한 거고. 언빙운은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그렇습니다. 네 해 동안 총 네 명의 비가 입궁했습니다.”
대답을 마친 언빙운이 설명을 덧붙였다.
“북제 황제는 어려서부터 천인의 도를 연마했습니다. 그의 나라를 다스리는 풍격을 보면 영민한 군주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릇 가슴에 큰 뜻을 품으면 남녀 간의 일에는 자연스레 흥미를 잃게 되지요.”
“그렇다면 북제 황제에게는 아직 아들이 없겠군요?”
범한이 눈을 감은 채 물었다.
“황제가 춘추 미령하니 황궁에서 서두르지 않은 것뿐입니다.”
“서두르지 않는다고요? 됐습니다. 물러가서 왕계년에게 모레 입궁 계획이나 세우라고 말해 둬요. 그리고 귀국하는 일도 함께요.”
범한은 속으로 싸늘하게 콧방귀를 뀌고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언빙운에게 물러가라는 의사 표시를 했다.
언빙운은 제사 대인이 많은 비밀을 간직만 한 채 자신에게 털어놓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조금 답답한 표정으로 범한을 잠시 바라봤다. 정말로 그랬다. 범한은 감찰원 제사이기는 하지만 많은 정보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 저녁 일만 해도 예를 들어 북제 황제가 동성애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범한은 비밀로 하고 있었다. 문득 범한은 손가락 사이가 아직까지 차갑다는 걸 느꼈다. 이제 보니 해당타타는 자기보다 훨씬 대담한 사람이었다.
* * *
북제 황성의 정문이 서서히 열렸다. 그러자 청산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황궁이 폭포수 아래 멋지게 서서 날아갈 듯한 검은 처마를 자랑하며 다시 한번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범한은 낯선 관리들의 싸늘한 시선과 노기를 꾹 참고 황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위화와 이미 안면을 튼 홍려사 관원들과 인사를 나눈 후 태감들의 공손한 안내를 받으며 대전으로 들어갔다.
대전 내부는 무척 평온해 보였고 길게 뻗은 어도(御道) 옆에는 물고기들이 한가롭게 헤엄치는 맑은 수면이 잔잔하게 펼쳐져 있었다.
황태후와 황제는 높이 솟은 단상 위에 앉아 있었다. 황제 아래쪽으로는 수십 개의 잔칫상이 늘어서 있었다. 잔칫상 앞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귀족과 고위 관료들이었다. 신분이 높지 않은 일반 관원들을 위해서는 편전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에 경국의 정사인 범한은 황제의 왼편, 첫 번째 잔칫상 앞에 앉게 되었으며 그의 뒤로 장도를 들지 않은 고달이 서 있었다. 그리고 전체 사신단 인사 중 임정과 임문 정도만 범한 옆에 앉을 자격이 주어졌다.
사신단 맞은편에는 북제 조정의 태부와 재상이 있었다. 범한은 태부를 잠시 쳐다보았다. 범한은 그가 장묵한의 제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한데 이렇게나 나이가 지긋한 사람인 건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일련의 예식이 끝나고 황태후의 생신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황태후는 아직 젊은 사람이었다. 비록 눈가에 주름이 몇 가닥 생기기는 했어도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귀부인이었다.
하지만 이 귀부인은, 소은의 일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실은 매우 악랄한 사람이었다. 소은을 생각하니 범한은 무의식적으로 상삼호에게 시선이 향했다. 상삼호는 범한과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범한은 대전으로 들어올 때 북제 제일 명장의 풍채를 직접 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태후가 술잔을 들고는 나긋하고 맑은 목소리로 몇 마디 했다. 범한은 그녀의 말을 흘려들으며 주변 신하들의 행동에 따라 절하고 축하 인사말을 건넸다.
황태후의 생신이고 남다른 청첩장도 받았으니, 북제 군신들은 천하에서 가장 진귀한 물건들을 황궁으로 옮기느라 바빴다. 그 진귀한 것들이란 동산(東山)의 청룡 옥석, 동이성에서 배로 옮겨 온 기이하고 커다란 종, 북방의 눈 덮인 지역에서 나오는 천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다는 꼬리 두 개 달린 설표범 등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