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왕계년이 명에 따라 귀국 준비를 하기 위해 그리고 임정과 임문 두 사람과도 상의할 게 있어 밖으로 나가려 했다. 어쨌든 이번 귀국길에는 존귀하신 북제의 공주마마를 모시고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왕계년이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범한이 하는 말이 들려왔다.
“오는 길에 준비해 뒀던 말들 있잖아요, 그것부터 깨끗하게 처리해요. 그리고 농부한테 데려가서 귀찮은 일 생기지 않도록 하고요.”
맨 처음에 계획을 세울 때 참석하지 못했던 언빙운은 범한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왕계년이 범한을 잠시 쳐다보았다. 한데 범한이 손을 흔들자 왕계년은 바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 상황을 본 언빙운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세 사람, 세 가지의 동작. 그러니 그 속에는 분명 무슨 뜻이 숨겨져 있으리라.
범한이 살짝 웃더니 말했다.
“내 앞에서까지 그리 고생스럽게 참을 필요 있나요?”
언빙운은 웃지 않았다. 대신 앞에 놓인 찻잔을 느긋하게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부하의 예를 갖춰 대답했다.
“제사 대인께서 저에게 알려 주고 싶어 하지 않으시니 아무리 궁금해도 저는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범한은 잠시 고민도 하지도 않고 툭 까놓고 말해 줬다.
“맨 처음 계획입니다. 이미 버린 계획이라 쓸모없어졌지만 그래도 뒤는 깨끗하게 닦아 놔야 하니까요.”
그런 후 범한은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막 봄에 접어들었을 무렵 범한은 경도에서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젊은 관원을 발견했고 그 후로 그를 줄곧 규방 깊은 곳에서 길렀다는 이야기였다.
맨 처음 계획대로라면 귀국할 때 범한 대신 가짜 범한이 사신단을 이끌고 남하해야 했다. 그리고 대역이 사신단을 이끄는 사이 범한은 상경에 남아 처리해야 할 일을 완수하려 했었다.
“처음에는 혼자 상경에 머물 생각이셨다고요?”
언빙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처리해야 할 일이란 게 대체 무엇입니까?”
범한이 언빙운을 쓱 쳐다보고는 말했다.
“진평평 원장께서는 소은이 죽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상경에 남아 그를 제거하려 했어요. 그런 후 서둘러 돌아가 국경 근처에서 사신단과 합류할 생각이었습니다. 소은이 죽은 후 북제 사람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우리 사신단을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언빙운이 물었다.
“방금 왕계년 대인에게 말했던 말(馬)이란 게 그걸 말하신 건가요?”
그러자 범한이 잠시 웃고는 설명해 주었다.
“사신단이 경도에서 출발할 때 감찰원과 황실 금고에 있는 누군가에게 부탁해 남하하는 길목에 좋은 말 몇 필을 가져다 놔달라고 부탁해 뒀습니다. 물론 그 말들은 몰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중이고요. 그것 때문에 북제 관아가 놀라 움직이게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상경에서 소은을 죽인 후 말을 갈아타며 전속력으로 국경까지 갈 생각이셨던 겁니까?”
언빙운의 입가에서 비웃음 같은 게 흘러나왔다.
“천 리를 말 한 마리로 달리면 뭔가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그러자 언빙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현실과 소설의 세계를 혼동하지 마십시오. 처음 계획대로 했어도 소은을 죽이셨다면 북제는 분명 상경성 문부터 닫아걸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각 주에 주둔시켜 놓은 군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을 막았겠지요. 그런데도 혼자서 말을 타고 남쪽으로 가실 수 있었을 것 같습니까?”
범한이 웃었다.
“진평평 원장께서도 옛날에 그 많은 사람을 데리고 남쪽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나라고 못 하란 법 있겠습니까?”
“용감하다고는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계책에는 조금 바보 같은 구석이 있습니다.”
언빙운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계속 말했다.
“대인께서는 감찰원 제사이니 당연히 목숨부터 아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계획처럼 귀국하는 사신단에 대해 북제가 경계를 소홀히 한다 해도 상경성에는 은둔 고수들이 많으니 대인께서는 소은을 죽이지 못하셨을 겁니다.”
범한은 이 얼음남에게 저격과 관련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죽 아저씨는 상자와 함께 실종되었고, 장 공주와 상삼호는 결탁했고, 꼬마 범한이 어부지리를 얻는 바람에 결국에는 계획이 이 지경으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 * *
내일이 가고 또 내일이 가 글피가 되었다. 물론 쓸데없는 말 좀 해봤다.
상경성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한 옥천하강 강가에 녹음이 짙게 깔리고 북쪽으로 돌아온 백로가 날고 있었다. 이곳은 상류 쪽으로 황궁과 가까워 경비가 삼엄한 곳이었다. 그러니 여기 바닥석이 깔린 길에는 백성은 발조차 내디딜 수 없었다.
범한은 바로 이곳에서 해당타타와 함께 있었다. 그녀와 나란히 걸으며 이런저런 화제로 한담을 나누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답답했던 가슴이 시워해졌다. 촌부와 동행한 덕분인지 몰라도 요 며칠 음울했던 기분이 많이 가셨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이상하기는 하지만 해당타타는 예쁘기는커녕 자태도 맵시 있다거나 단아하지도 않고, 촌부 기질이 다분해서 범한은 그녀와 함께 있으면 어쩐지 편안했다.
한담을 마치고 두 사람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해당타타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황태후께서는 단 한 번도 고집을 꺾으신 적이 없으세요. 그런데도 제대로 된 방법을 내놓을 수 있어요?”
범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네 황제께서 아내를 맞이하시는 일인데 왜 하필이면 나보고 도우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말을 마친 범한은 해당타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차분한 눈매에 불쾌함을 섞은 채 말을 이어 갔다.
“해당 낭자는 사리리의 친구이니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내게 도움을 청하면 그녀가 불편해할 거란 생각은 안 해봤어요?”
해당타타는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두 발을 질질 끌며 강가에 깔린 바닥석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앞쪽에 늘어져 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만약 리리가 원하는 거라면 범한 대인은 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리리는 상경에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원래 무정한 사람이라면서 왜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는 척하는 거죠? 그녀가 입궁하는 건 대인도 원하는 일이잖아요. 게다가 대인에게는 저 먼 남쪽으로 돌아간 후에도 북제 황궁과 연락할 사람이 하나 생기는 거고요.”
해당타타가 변명할 여지도 주지 않고 모든 걸 까놓고 말하자 범한은 당황했다. 마치 걸치고 있던 옷이 순식간에 모두 벗겨져 그 안에 숨겨 두었던 자신의 이기심과 무정함이 고스란히 드러난 기분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한참 후 범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신하에 불과해요. 그러니 상황을 바꿀 만한 충분한 힘이 없어요.”
“그래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둔 거군요.”
압박하는 말투는 전혀 아니었지만 해당타타의 당당함과 거리낌 없는 언사는 오히려 범한을 절로 주눅 들게 만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에 범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황궁에서의 삶은 사람을 백발로 만들 정도로 근심이 많다 했어요. 해당 낭자와 사리리는 자매 같은 사이인데 왜 그렇게 그녀를 입궁시키려 하는 겁니까?
“폐하께서는 꽤 괜찮은 남자니까요.”
해당타타가 미소 지었다.
“게다가 사리리는 경국 사람이잖아요. 그러니 그녀가 상경에서 살아야 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바람막이가 어디 있겠어요.”
말을 마친 해당타타가 느닷없이 몸을 돌려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한의 눈에 호수보다 맑게 빛나는 해당타타의 눈동자가 들어왔다. 지금까지 본 사람 중 눈빛이 가장 예쁜 이는 섭령아였는데 그녀만큼 아름다웠다. 그리고 섭령아의 눈빛에는 사악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천진난만함이 있다면 해당타타의 눈빛에는 세상사를 통달한 듯한 명석함과 담담함이 있었다.
“범한 대인, 일일이 계산하면서 음모를 꾸미고 살면 피곤하지 않아요?”
* * *
범한은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잠시 후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뒷짐을 지더니 상체는 움직이지 않은 채 하체만 조금 움직이며 해당타타처럼 푸른색 바닥석이 깔린 길을 느릿느릿 걸었다. 그러고는 조금 생뚱맞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해당 낭자처럼 마음껏 사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목적을 갖고 살고 있답니다. 낭자는 밭에 채소나 심으며 살 요량이겠지만 나는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현재와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말을 마친 범한은 품에서 서한 하나를 꺼내 해당타타에게 건넸다.
“내가 대단한 지혜를 갖고 있거나 한 건 아니에요. 기껏해야 잔머리를 굴리는 정도지요. 이 방법이 먹힐지 살펴봐요.”
해당타타는 햇살을 맞으며 서한 내용을 꼼꼼하게 읽어 내려갔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깊이 한숨을 내쉬더니 맑은 눈동자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범한에게 말했다.
“황태후께서 믿으실까요?”
“황태후께서 이 일 때문에 폐하와 반목하길 원치 않으신다면 그분께 필요한 것은 체면 세워 드리기입니다. 황태후마마께서 믿으시든 안 믿으시든 이 두 가지 일은 충분히 설득력을 가질 거예요.”
범한이 내놓은 계획은 간단했다. 그것은 줄곧 기억하고 있던 전생 세계의 이야기, 즉 한무제가 구익부인과 만나게 된 일화였다.
한무제가 황하로 순시를 갔을 때였다. 그런데 어느 술사가 갑자기 이곳에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났으니 분명 기이한 여인이 있을 거라 말했다. 이에 한무제가 구름이 떠 있는 곳을 찾아가 보니 술사의 말대로 정말로 그곳에는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한데 아름답기는 해도 어려서부터 병을 앓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여인이었다. 더군다나 손이 오그라들고 굳었는데도 아무도 그것을 펴주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빠져든 한무제는 그녀의 양손을 펴주러 직접 나섰고 기적이 일어났다. 소녀의 두 손이 펴지면서 건강한 사람의 것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더 기이했던 건 그녀의 오른손에서 자그마한 옥 갈고리가 나왔다는 점이다.
한무제는 그 어느 때보다 기뻐했고 그녀를 궁으로 데려가 주먹을 쥐고 있는 부인이란 뜻으로 ‘권 부인’이란 봉호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 이 권 부인은 훗날 구익부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 * *
“당신이 말한 황제는 누구예요?”
해당타타가 물었다. 그러자 범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꾸며 낸 이야기예요.”
범한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 갔다.
“당연히 가짜지요. 한무제란 사람이 바보가 아니니 그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꾸며 냈다고 이야기해 준 겁니다.”
해당타타는 남녀 일에 대해서는 무지한 면이 있어 망설이다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범한은 언짢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지적했다.
“당신이 누구였죠?”
해당타타는 무의식적으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자 범한은 천인의 도를 중시하는 이 어린 여인이 또 철학적인 문제 속으로 자신을 끌고 들어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덜컥 들어 겁을 집어먹었다. 이에 서둘러 헛기침을 살짝 하고는 말했다.
“낭자는 고하의 제자예요. 고하 선생은 국사이시고요. 고하 국사께서 상경 서쪽에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났고 구름 아래에 기이한 여인이 있다고 말하신다면 설득력이 더 강해지겠지요.”
해당타타가 쓴웃음을 지었다.
“스승님께서 어찌 나와 함께 그런 소란에 동참하시겠습니까?”
범한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스승이란 작자는 인육까지 먹은 사람이다. 그러니 그가 총애하는 어린 제자와 함께 소란을 좀 떤다 한들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당타타는 다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문제점을 말했다.
“그런데…… 상경 귀족들은 모두 리리의 신분을 알고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해도 속일 수 없어요.”
그러자 범한이 웃더니 말했다.
“우선 사리리 낭자에게 북제 사당에서 몇 달 살도록 해요. 출가하면 더 좋고요.”
“출가가 뭐지요?”
“사당에서 일심(一心)으로 신을 모시고 혼인할 생각을 않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는요?”
“주변이 잠잠해지면 남몰래 일을 진행시켜요. 그런 후 궁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못 주워 담는 엎질러진 물이 되는 거예요.”
“그걸로 된 건가요?”
“서한에 일부 세부 사항이 있으니 유념하고요. 국사님을 설득해 사리리 낭자를 제자로 받아들이면 더욱 좋고요.”
“범한 대인의 제안이 황당하고 웃겨 보여요. 그런데 세세히 살펴보니 가능성이 엿보이기는 하네요.”
해당타타는 범한을 향해 고맙다는 의미로 가볍게 인사했다.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전생의 측천무후와 양귀비라는 두 미인의 황궁 입궁 이야기를 오늘 성공적으로 써먹게 되어서였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있었다. 왜 황제는 왜 사리리를 황궁으로 들이려는 걸까? 왜 황태후는 사리리를 황궁으로 들이려 하지 않는 걸까?
해당타타는 분명 그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외국 사신에게는 말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범한의 마음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황궁에서 몇 번 만난 젊은 황제의 표정과 태도였다. 그러자 범한의 마음속에서 대담하면서도 황당한 생각이 떠오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