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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10화 (210/1,108)

210화

해당타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흥미롭다는 듯 범한의 노출된 상체를 두어 번 쳐다보았다. 범한은 몰래 패도의 정기를 운기해 지금 상황에 맞게 맑고 청순한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얼굴은 왜 빨개지는 거죠?”

해당타타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얼굴빛을 환하게 밝히려고요.”

한데 범한은 갑자기 알 수 없는 위험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틀 밤낮 동안 정신력을 너무 많이 소모한 탓에 붉힌 얼굴이 금세 창백해졌던 것이다.

“왜 또 창백해진 거죠?”

그러자 범한은 깊이 한숨을 내쉬고는 미소 지었다.

“봄날 밤이 사람을 힘겹게 만들어서지요.”

“봄날 밤이 짧아서 아쉬운 게 아니고요?”

“너무 길어도 힘겹답니다.”

* * *

“범한 대인이 만든 칫솔…… 나도 하나 줘요.”

느닷없는 요구에 범한은 깜짝 놀랐다. 그래서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수수 거리에서도 팔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러자 해당타타가 미소 지었다.

“대인이 만든 것이 더 좋아 보이더라고요.”

“과분한 칭찬이네요.”

“권문세가의 자제께서 그런 데까지 관심을 두다니 정말 의외네요.”

해당타타는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람을 다시 봤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

범한이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나에 대해서 말입니다, 해당 낭자는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해당타타가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황태후마마 생신 후 귀국길에 오르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니 내 제안을 받아들인 걸로 칠게요. 어때요?”

범한이 귀찮다는 듯 눈꺼풀을 슬쩍 들었다.

“잠부터 좀 자야겠네요. 그런 후 내 직접 찾아갈 테니 그때 이야기하죠.”

해당타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거참, 좋은 생각이네요.”

그러자 범한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러니 대화는 이만 마치죠.”

“그럼 이만.”

범한이 이리 냉담하게 구는 건 해당타타에게는 처음이었다. 이에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곧장 방에서 나갔다.

범한이 침대에 누운 건 분명 많이 피곤해서였다. 하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표정은 차분해 보였지만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어젯밤에 들은 것들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눈을 또랑또랑 뜨고 침대 머리맡에 있는 수놓여 있는 장막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시선은 마치 천장을 꿰뚫고, 구천층(九天層) 구름도 뚫고 하늘 가장 먼 곳까지 가 있는 것만 같았다.

* * *

범한이 사신단 내부에 있는 걸 확인했으니 북제 쪽에서는 연산 절벽에서 소은을 구한 자가 대체 누구인지 알아내야 했다. 그러니 그것을 둘러싼 질문들이 자연스레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랑도, 하도인, 심중 세 사람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앉아 있었다. 세 사람 중에서 직위가 가장 높은 이는 심중이었나 신분이 가장 높은 건 랑도였다. 고하의 수제자이자 청년 천자의 무술 스승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도인은 별말 않고 있었다.

하루 전 랑도와 하도인은 연합해 범한과 소은을 절벽 아래로 내몰았다. 그리고 금의위는 밤새도록 상경성 밖을 비밀리에 수색했다. 그런데도 아무런 성과가 없자 이들은 결국 꼭두새벽부터 황궁에 도움을 청하면서까지 경국 사신단 거처로 밀고 들어갔다. 한데 범한은 멀쩡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

“범한이 아니었던 걸까요?”

하도인의 새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져 있었다. 다리 위에 있던 독 자국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 독을 없애기 위해 하도인은 적지 않은 정기를 소모해야 했기 때문이다.

랑도가 눈을 감았다.

“그자는 분명 범한이네. 독과 침을 잘 다루고 잔재주까지 부렸으니 범한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하도인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자의 생김새는 범한과 달랐습니다.”

그러자 랑도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변장했을 수도 있지.”

랑도는 신분이 특별했던지라 다른 사람들은 그의 말에 섣불리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멀쩡하게 살아서 사신단 거처에 있었다. 만약 절벽에서 뛰어내린 게 범한이라면 어떻게 사지 멀쩡하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거지? 아무리 봐도 신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 같았다.

심중도 랑도의 판단에 의구심을 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티는 전혀 안 내고 여전히 부자 어르신의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가능성이 가장 큰 쪽은 범한입니다. 상삼호가 결탁한 게 남쪽 사람이니까요. 이번 일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건 경국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동이성의 고수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하도인이 반대의 의미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심중은 웃었다.

“물론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요.”

“범한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랑도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원래 특무 기관 책임자들과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소은 일만 아니었으면 금의위를 돕기 위해 출궁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심중이 랑도를 잠깐 쳐다보고는 활짝 웃었다.

“랑도 대인, 경국에도 고수는 여럿 있습니다. 그리고 재주와 관련한 부분에서는 대인께서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진평평 곁에 ‘그림자’라고 부르는 자객이 있다는 걸요. 그를 본 사람도, 그의 수단과 행동 방식을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범한이 감찰원 제사 신분이니 그의 재주가 그림자와 무슨 관련이 있을 수도……. 이리 말하고 보니 절벽에 있던 자는 범한이 아닌 그림자일 수도 있겠군요.”

그림자는 진평평 원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살피는 호위 무사였다.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심중은 특무 기관의 책임자였으므로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하도인이 몸에서 탁한 기운을 몰아내고는 계속 말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소은의 생사 확인입니다.”

“소은은 죽었네.”

랑도가 담담하게 말했다. 잠행복을 입은 범한이 소은을 구할 때 그는 몸을 돌려 소은의 가슴과 배 사이에 곡도를 찔러 넣었었다. 이에 랑도는 자기 칼끝에 담겨 있던 정기로 소은의 생기를 끊어 놓았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자 심중이 미소 지었다.

“그러면 됐습니다. 국사와 황태후께서 분명 만족하실 것입니다. 이 심중, 두 분 대인께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 * *

천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러했듯이 태양이 상경성 서쪽 성벽 아래로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살짝 더운 바람이 생기 잃은 나뭇잎을 감싸더니 이어 상경성에 있는 저택으로 밀고 들어가 사람들의 몸을 휘감은 후 침묵 중인 나뭇가지들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밤이 되자 바람이 점점 차가워졌다.

범한은 후원에 있는 나무 옆에 서서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가장 먼저 떠오른 별을 바라보았다. 이날 밤은 싸늘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범한은 너무 고단했던 탓에 밤공기가 쌀쌀하게 느껴져 옷을 한 겹 더 겹쳐 입어야만 했다.

범한은 조심스레 들고 있던 서한을 접었다. 그리고 이전처럼 손바닥 안에 올려놓고 가루로 만들지는 않았다. 감찰원에서 보낸 밀서가 아닌 집에서 보내온 평범한 서한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완아가 보낸 서한이었다. 집안 소식이 꾸준히 북쪽까지 전달되기는 했지만 아내가 서한을 보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완아는 집에서 그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 외에도 서한에는 장인어른께서 재상 자리에서 물러났고, 대보는 사남 백작가에서 맡아 주고 있으며, 약약은 혼인 이야기가 나왔는데도 언제나처럼 담담하고, 아버지 사남 백작은 조정 일을 돌보느라 바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서한 말미에는 보고 싶다거나 얼른 돌아오라거나 하는 말 따위는 없었다. 대신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여름밤 바람마저 멎으니 꿈에서도 아파 몸을 뒤척입니다. 님은 돌아오지 않았는데 검은 머리만 더 자랐네요. 소싯적 이별 그 언제인지 사흘 내내 님만 그리워합니다. 어찌 그리 꾸물거리시는지요. 고개를 파묻고 서한을 써봅니다.”

어제, 오늘, 내일, 사흘 내내 낭군님만 그린다니.

범한은 서한에 은근하게 담긴 염려와 걱정에 살며시 웃음 지었다. 그리고 아내의 타고난 명랑한 성격 덕분에 살짝 안도감이 들었다. 요 며칠 음모를 꾸미느라 집안 여인들은 거의 잊고 지냈는데 서한 때문에 그녀들 생각이 나자 범한은 은근히 양심의 가책이 일었다.

나중에 만나기로 약속해 놓은 해당타타와의 만남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범한은 은근히 기대하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이는 절대 남녀 간의 감정 때문이 아닌 그냥 순수함 기대감이었다. 누군가 이야기 나눌 사람이 필요해서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은과의 대화 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어디에도 말할 수 없어서였다.

그래서 이런 이상하고 기묘한 감정이 줄곧 범한의 마음을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경국 경도에서 비가 내리던 날 밤, 그 상자가 열린 후 범한은 이 세계에서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세상 곳곳에 남아 있는 그녀의 숨결과 흔적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이 순간 범한은 절박할 정도로 쓸쓸했다. 이곳에서는 그 여인의 흔적을 조금도 느낄 수 없어서였다.

“소은의 말이 맞아. 나는 정말로 무정한 사람이었어.”

범한은 자신에게는 친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으며 곁채로 걸어갔다.

* * *

곁채에서는 범한, 언빙운, 왕계년, 이렇게 세 사람이 모여 상경에서의 감찰원 마지막 회의를 하고 있었다. 언빙운이 차분히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한 대인, 비밀은 알아내셨습니까?”

일찌감치 예상했던 상황이다. 범한은 감찰원과 신양 쪽 역량을 모두 이용했기에 절묘하게 소은을 사지로 몰아갈 수 있었다. 그러니 경국의 관리인 두 사람이 소은이 간직하고 있던 비밀을 알고 싶은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한발 늦는 바람에 소은이 죽었습니다.”

언빙운의 눈동자에서 순간 이상한 기색이 번뜩였다가 곧장 평소 상태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내젓고 탄식했다.

“오랫동안 계획을 세웠건만 결국 실패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범한이 살짝 비꼬듯 웃었다.

“늙은 절름발이도 스무 해 동안 알아내지 못했는데 내가 신선이라도 되는 줄 알았습니까?”

범한은 언빙운과 대화할 때면 진평평 원장을 일부러 늙은 절름발이라 불렀다. 경솔하고 졸렬하게 으름장을 놓는 행위였지만 언빙운이라는 차갑고 똘똘한 사람에게는 써먹기 꽤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자 언빙운이 고개를 돌려 왕계년에게 말했다.

“돌아갈 준비나 합시다.”

왕계년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대답했다.

“네.”

그런데 왕계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대인, 어젯밤에 방 안에 남겨 뒀던 가짜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범한은 왕계년의 뜻을 알아차렸다. 죽여 입막음하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그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데려가야지요.”

언빙운이 반대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북제 사람들에게 발각되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발각되는 게 뭐 어때서요?”

범한은 언빙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조소하듯 말했다.

“저들이 발견한다 한들 또 어쩌겠습니까? 언빙운 대인은 갇혀 있는 1년 동안 담력이 많이 줄었군요.”

언빙운과 왕계년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범한의 심리 상태가 이상해서였다. 이에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범한이 두 사람을 슬쩍 보더니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해당이 알아채지 못했을 것 같습니까? 그냥 나를 어쩌지 못하는 것뿐이라고요!”

왕계년이 귀국과 관련된 일정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범한은 잠시 아무 말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북제 황태후의 생신 연회가 끝난 후 곧장 귀국길에 오릅시다. 난 말이죠, 가족들이 그립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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