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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09화 (209/1,108)

209화

작은 풀들이 가볍게 떨리더니 손 하나가 절벽에 솟아 있는 돌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잠시 후 검은색 잠행복을 입은 사람이 유령처럼 계곡에서 기어 올라왔다.

모자로 얼굴을 가린 범한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아득한 계곡 절벽만 보일 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범한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새벽안개로 겹겹이 둘러쳐진 반대편 숲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범한은 그곳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에 범한은 살며시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그런 후 더 이상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검은 화살처럼 짙은 안개 속으로 파고 들어가 상경을 향해 뛰었다.

* * *

고달이 경국 사신단 거처 문밖에 서 있었다. 그는 장도를 들고 호랑이같이 큰 눈을 부릅뜬 채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련님은 하루 밤낮으로 외출도 하지 않으면서 북제 관원들의 방문을 내치고 있고, 금의위에서 온 사람은 아침 일찍부터 젊은 황제가 범한과 한담을 나누려 한다는 말을 전하겠다며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어서였다.

지금 범한이 부재중이란 걸 아는 사람은 몇 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진무사 지휘사 심중은 범한이 지금 사신단 거처에 없기만을 바라는 중이었다. 밤새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펼쳤지만 시체를 찾지 못하자 범한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북제 측에서 의심하며 확인하러 나선 것이었다.

한데 경국 사람이 이리도 야만적이고 막무가내로 나올 줄이야. 고달은 범한 정사가 많이 취했다며 북제 관원의 출입을 강력히 저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바탕 충돌이 벌어지려던 찰나, 거리에서 슥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북제 관원들은 너무나도 기뻤다. 그것은 거리를 쓰는 빗자루 소리가 아닌 발걸음 소리였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상경의 새벽은 꽤나 시끌벅적했다. 사신단 문 앞에 유명 인사가 등장하자 북제 관원과 금의위는 서둘러 길을 내어 주고는 느릿느릿 걸어오는 낭자를 향해 몸을 깊숙이 굽혀 공손하게 인사했다.

“해당 낭자께 인사드립니다.”

해당타타는 눈이 게슴츠레한 것이 아직 잠에서 덜 깬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녀가 두 손을 꽃무늬 옷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하품을 하며 물었다.

“이곳에서 왜 이리 소란을 피우는 겁니까?”

한 관원이 서둘러 보고했다.

“하관, 성지를 받들어 경국 정사 범한 대인께 입궁을 청하러 왔습니다. 한데 대인의 호위가 성지 전달을 막고 있습니다.”

그러자 금의위와 홍려사 관원들도 앞으로 나와 사정을 설명하며 자신들도 범한을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해당타타는 이틀 동안 상경에 그리 많은 일이 일어난 줄 모르고 있던 터라 깜짝 놀라 살짝 멍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왜 알리지 않은 건가요?”

호위 수장 고달은 촌부처럼 보이는 여인이 사실은 북제의 중요 인물임을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사신단이 상경에 머무는 동안 도련님이 이 기이한 여인과 함께 나가 산책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앞으로 나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대인께서 어젯밤 음주를 과하게 하셨습니다. 하여 몸이 조금 불편해 쉬고 계시는 중이니 방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해당타타가 잠시 망설이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 보리다.”

말을 마치자마자 해당타타는 정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며칠 동안 이곳을 찾아와서인지 그녀의 출입이 익숙한 사신단 사람들은 그 상황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돌계단에 서 있던 임문의 눈에 잠시 당황스러움이 스치기는 했지만 그 역시 감히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고달은 달랐다. 주인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는 쥐고 있던 장도를 앞쪽으로 내밀어 해당타타를 막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낭자…… 끙!”

하지만 결국에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답답해하는 소리로 마무리했다.

해당타타는 그의 행동에 반격하지 않고 몸만 슬쩍 돌렸다. 언제나처럼 땅바닥에 발을 붙인 채 슥슥,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돌린 건데 그녀는 어느새 고달 뒤쪽에 가 있었다.

그사이 정기를 내보낼 길을 차단당한 고달은 양어깨를 미세하게 떨며 거친 눈빛만 쏟아 냈다.

해당타타가 미소 지으며 몸을 돌리더니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리고 그 수수한 얼굴로 잠깐 묘한 느낌을 풍기며 말했다.

“나와 범한 대인은 친구입니다. 그도 지금 나를 만나고 싶을 것입니다.”

해당타타의 손바닥이 어깨 위에 떨어질 때 온화한 기운이 그에게 전달되었다.

고달이 서서히 두 눈을 감더니 오른손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장도를 몸 옆으로 절도 있게 휘익 돌리고는 발 옆에 놓인 석판 바닥에 매섭게 내리꽂았다. 칼끝은 석판을 뚫고 들어가 세 촌 정도 깊이로 땅바닥에 박혔다. 석판은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모양은 거의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 광경만 봐도 고달은 굉장한 실력자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경지는 아직 해당타타만 못했다. 더욱이 그녀의 신분이 특수해 공격할 수도 없자 고달은 혼자서 화를 삭여야만 했다.

고달은 자신이 해당타타를 막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 안에 계신 도련님과 단독으로 대면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악역을 자처하기로 마음먹고 몸을 휙 돌려 비틀거리며 범한에게 가고 있는 해당타타의 뒤를 따라갔다.

뒤쪽에 있던 북제 관원과 금의위는 약삭빠르게도 고달을 따라가지 않았다. 해당타타가 범한이 방 안에 있는지 확인만 하면 그만이었으므로 자신들은 굳이 모험할 필요가 없어서였다.

* * *

“해당 낭자, 어서 오세요.”

소금을 살짝 푼 물과 소형 낭야봉(狼牙棒: 끝에 못이 잔뜩 달린 무기)처럼 생긴 것을 들고 있는 왕계년이 입에 거품을 가득 물고 해당타타가 매번 지나치는 정원 복도에 나타나 인사했다. 왕계년은 범한의 심복이었으니 그녀와 마주치는 건 비교적 익숙한 일이었다.

해당타타는 상대방이 시간을 끄는 중인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살짝 웃음을 지어 보이며 느긋하게 물었다.

“왕계년 대인, 손에 든 것은 무엇입니까?”

왕계년이 소형 낭야봉을 입 안에서 꺼내 면전에 들이댔다. 그리고 웃었다.

“우리 대인께서 발명하신 칫솔입니다.”

“칫솔이요?”

해당타타는 살짝 놀라워하며 다시 물었다.

“칫솔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왜 버드나무 가지를 쓰지 않는 거죠?”

“요놈이 쓰기 편해서지요. 부드럽고 꼼꼼하게 닦아 주거든요.”

왕계년이 해당타타의 비위를 맞춰 가며 이야기하다가 냄새나는 입 속에 있던 칫솔을 불경하게 면전에 들이댄 걸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거둬들인 후 연거푸 죄송하다고 말했다.

해당타타는 쓴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왕계년도 들고 있던 물건들을 부하에게 던져 놓고 거들먹거리며 따라갔다. 이제 곧 마흔 줄에 들어서는 사람이 토끼보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며 해당타타에게 억지로 말을 걸었다. 그는 범한 대인이 지난밤 과음을 한 탓에 지금 쉬는 중일 것이라며 잠시 기다려 주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사실 사신단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해당타타가 갑자기 거처에 나타난 건 그냥 지나가던 길에 들른 게 아닌 반드시 범한을 만나기 위해서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 * *

복도 저 멀리에서 새하얀 옷을 입은 그림자가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당타타는 기분이 이상해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싸늘한 눈을 하고는 말했다.

“이제 보니 재주꾼 운 공자였군.”

언빙운이 보기에도 고하의 마지막 제자는 자기를 언짢게 여기고 있었다. 금의위에게 풀려나기는 했어도 그는 북제 관원들과 백성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숙소 후원에만 머물며 쥐 죽은 듯 지내고 있던 터였다. 더군다나 언빙운은 감옥에 갇히기 바로 직전, 재주꾼 운으로 지낼 때 황궁에 돌아온 해당타타와 만난 적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해당타타와 마주치자 난처한 기분이 들어 그냥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여닫이문이 굳게 닫혀 있자 해당타타는 이맛살을 잠시 찌푸리고는 문을 밀었다.

그녀는 여인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알 정도로 범한과 친해도 이런 식으로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이에 깜짝 놀란 왕계년이 문을 열지 못하게 막아 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경공에 뛰어난 왕계년이라 할지라도 순식간에 하늘 끝까지 올라가는 하늘의 여인 해당타타를 당해 낼 수는 없었다. 결국 방문은 살랑바람과 함께 소리를 내며 열리고 말았다.

‘설마 늦은 건 아니겠지.’

왕계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해당타타는 방 안에 놓여 있는 침대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왕계년 대인은 물러서요!”

왕계년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런데 방 안에서 피곤함에 찌든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계년, 그만 물러가요.”

왕계년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기쁜 기색이 돌며 안정을 되찾은 그가 허리를 굽혔다.

“알겠습니다, 범한 대인.”

* * *

해당타타가 여인의 맵시 있는 걸음걸이로 방에 들어서자 등 뒤에 있는 나무문이 바람이 분 것도 아닌데 저절로 닫혔다. 그녀는 의외랄 것도 없이 느긋하게 탁자 위 찻주전자를 들어 차게 식은 차부터 잔에 따랐다. 그리고 그것을 호로록 마시고는 침대 옆에 놓인 둥그런 의자에 앉았다.

비단 이불 아래에 안색이 살짝 창백한 범한이 두 눈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침대 옆에 앉은 촌부를 상당히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잠시 후 입을 뗐다.

“계속 그렇게 보고 있을 건가 보군요.”

해당타타가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더니 하품을 몇 차례 했다.

“황태후마마의 명이 없었다면 내가 아침 일찍 대인을 만나러 오는 추태를 보이지 않았겠죠?”

범한이 웃으며 받아쳤다.

“나로서도 내 용모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추태와 내 외모가 관계없다는 건 알겠네요.”

범한이 잠시 고개를 숙이고 슬쩍 바라보았다.

“그녀도 추한 사람은 아닐 겁니다.”

커다란 이불을 덮고 있는 범한은 옷섶이 열어젖혀진 상태였다. 그리고 맨살 가슴팍 위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폭포수처럼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엎어져 있었다.

“하루 밤낮 동안 여인과 술을 마신 거로군요.”

해당타타는 범한의 품에 있는 여인을 못 본 것처럼 하품을 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아름다운 모습이라 할 수도 없군요.”

“계속 이렇게 보고 있을 건가요?”

“내가 보는 걸 막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해당타타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난처한 쪽은 결국 범한이었다.

“낭자 잠시만 비켜 주겠어요? 품에 있는 기녀에게 옷 좀 입히려고요.”

범한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당신이 내 체면은 생각 안 해줘도 좋아요. 하나 여인으로서의 체면은 지켜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인이 여인을 난처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 * *

기녀는 옷을 갖춰 입고는 가기 싫다는 눈빛으로 범한을 돌아보았다. 범한도 감탄할 정도의 연기력을 발휘해 다시 한번 원망과 부끄러움이 가득 담긴 눈빛을 만들었다. 그런 후 약간의 경외심을 담아 해당타타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하고는 치마 앞자락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이제 방 안에는 해당타타와 범한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범한은 계속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양손을 뒤통수에 둔 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신의 적나라한 상반신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해당타타 역시 특이한 사람이었던지라 일부러 부끄러워하는 척하지도, 꾸짖듯 큰소리치지도 않았다. 오히려 침대 위 젊은 남자를 나무토막 취급하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최근 이틀 동안 상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

해당타타의 질문에 범한은 살짝 놀랐다. 그러더니 잠시 후 웃으며 말했다.

“됐어요. 해당 낭자와 말씨름은 그만하고 싶어요. 상경에 있는 이상 다 알게 되더군요. 상삼호가 이번에 부하들을 잔뜩 잃었고 소은도 그쪽에서 죽였다면서요. 해당 낭자의 스승님께는 분명 기쁜 일이니 축하드립니다. 감축드립니다, 낭자.”

해당타타는 범한을 차분하게 바라보며 눈빛으로 강하게 압박해 갔다. 그런데 범한은 오히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의연히 미소 지었다.

“그렇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피했던 거예요. 그래서 사신단 거처에 나를 이틀 동안 가두어 뒀던 거라고요. 낭자는 이해할 거라 믿습니다.”

해당타타는 범한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해당타타는 아까 왕계년의 시간 끌기 작전을 받아 주며 범한이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도록 해주지 않았던가. 대체 그녀가 왜 그런 건지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해당타타는 범한이 거처에 있는 이상은 더 이상 캐물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앞에 있는 이 맑고 아름답고 젊은 경국 관원은 실제로는 빈틈없는 사람이니 절대 자기에게 꼬리 잡힐 일은 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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