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208화 (208/1,108)

208화

“죽음이라니?”

소은이 이어서 물었다.

“선녀가 어찌 죽는단 말인가?”

범한은 소은의 말에는 신경 쓰지 않고 지그시 눈을 감고 그가 해준 말들을 머릿속에 저장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수를 움켜쥐었다. 사방에는 빛 한 점 없었다. 먹구름이 달빛마저 가려 버린 탓에 소은은 범한의 몸동작을 볼 수 없었다.

“고하가 왜 선생을 죽이려 하는 거죠?”

마지막 의문점이었다.

“신묘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리 큰 소동을 벌일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 말이죠.”

소은은 순간 범한의 질문이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신묘가 인간 세상에 지니는 의미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네. 그런 중요한 정보가 새어 나가 보게, 천하가 큰 혼란에 휩싸일 걸세. 북제의 전씨 가문의 아이도, 경국의 음험하고 독한 황제도 모두 원정대를 꾸려 북쪽에 있는 신묘를 찾아가 참배하려 할 걸세. 천하의 강자들이 신묘를 찾으려 혈안이 될 거란 말일세.”

범한이 코를 잠시 문지르고는 말했다.

“신묘에요? 가보셨다면서요. 단순히 거대한 사당인데 뭐 참배할 것까지야…….”

그러자 소은이 싸늘하게 웃었다.

“고하는 신묘 앞에 꿇었다는 이유로 인간계에서 최고 실력자라 불리는 대종사가 되었어. 무공 수련자에게 이 정도 유혹이라면 자네는 상상도 못 할 강력한. 더군다나 자네가 보기에 고하가 정말로 대단한 성인인 것 같은가? 신묘 앞에 간절히 꿇어앉아 있던 사람이 꼬마 선녀로부터 달랑 책 한 권 받더니 순식간에 평생 신봉했던 신묘를 배신하고 공격을 했네. 그러니 그자는 이익 앞에서는 선한 척하는 악인일 뿐이야.”

소은이 계속 말했다.

“내가 죽으면 천하에 신묘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고하 하나뿐이네. 신묘 안에 대체 뭐가 있는 거냐고? 고하는 어쩌면 평생 모를 거야. 그렇다고 해도 그는 이미 충분히 많은 이득을 얻었어. 그러니 세상의 다른 강자에게 기회가 돌아갈 수 있는 모험 따위는 하지 않을 걸세.”

범한은 생각해 보았다. 확실히 그런 것 같았고 고하가 어떻든 소은을 죽이려는 게 조금은 이해되었다. 그래서 북쪽에서 저지른 추악한 일을 덮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쩌면 국사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또는 신묘가 이 세계에 가져올 미지의 위험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묘에는 대체 뭐가 있는 거지?”

범한은 순간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소은이 말해 준 신묘 현판에 써 있다던 글자를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으로 써보고 있었다. 획을 쓸 때마다 속도가 붙어 바람 소리까지 났다.

“천 년 동안 세상 사람들은 신묘가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지. 그런데도 나와 고하는 신묘를 찾아갔고. 그야말로 도박과도 같은 모험이었어. 우리가 떠난 후로 신묘에 있던 사람이 우리를 찾아와 못살게 굴거나 하지도 않았고…… 고하는 지금의 북제를 보호하고 있는 사람이라네. 그러니 감히 하늘의 위엄에 저촉되는 행동을 할 수는 없겠지.”

기력이 다해 가는지 소은의 목소리가 갈수록 작아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두려움만은 떨쳐 내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군다나 어린 선녀도 우리에게 맹세를 강요하지 않았는가. 고하는 하늘 가장 가까운 곳까지 갔던 사람이니 어찌 감히 맹세를 어기려 하겠는가.”

“그 맹세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선생께서는 이미 제게 신묘에 대해 말씀해 주셨으니까요.”

“그거야 나는 곧 죽을 사람이니까.”

소은이 살짝 곤란한 듯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게다가 자네도 이 동굴에서 함께 죽게 될 테고.”

그러자 범한이 미안한 듯 웃었다.

“한데 저에게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적막한 계곡은 풀 한 포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곧게 뻗어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절벽 사이에는 보이는 것이라곤 짙은 어둠뿐이었다. 범한은 찢어진 왼쪽 바지통을 묶고 옷을 고쳐 입으면서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그 꼬마 선녀는 성이 ‘섭’입니다. 이름은 ‘경미’고요.”

* * *

“섭경미?”

소은은 자지러질 듯 놀랐다.

“무슨 소린가? 설마 섭가의 여주인이 내가 전에 만났던 꼬마 선녀란 말인가?”

섭가가 세상에 갑자기 나타났을 때 소은은 북위의 밀정 우두머리였고 그 때문에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소은의 반응이 범한에게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에 범한이 웃었다.

“선생께서 직접 말씀하신 선녀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겨우 몇 년 안에 천하 판도를 바꿀 수 있었겠습니까?”

“그랬었군. 그랬었어.”

소은이 다시 쿨럭이며 말을 이어 갔다.

“경국이 그리 빨리 성장한 게 다 신묘 덕분이었군!”

“맞습니다.”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곧 돌아가실 분이니 이야기해 드리죠. 섭경미가 말씀하신 그 꼬마 선녀입니다. 무슨 신묘의 신선 따위가 아니에요. 그분은…… 저와 마찬가지로 그냥 사람입니다.”

소은은 조금 전 충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범한이 한 말을 도무지 믿지 못하고 죽음이 코앞인데도 마지막 의문 속에서 허우적댔다.

“왜…… 꼬마 선녀가 나를 경국으로 잡아간 거지?”

그는 북위의 밀정 우두머리였으므로 섭가와 경국 감찰원의 관계를 알고 있던 터였다.

범한이 말했다.

“경국에서는 그때 선생을 죽였어야 했거든요.”

범한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 갔다.

“그때 선생은 정말로 두려운 인물이었답니다. 그래서 섭경미가 진평평을 시켜 당신을 죽이는 게 아닌 잡아 오도록 한 것이고요. 어쩌면 옛정을 생각해서겠지요. 어쨌거나 두 사람이 신묘에 쳐들어간 것 때문에 그분이 이 세계로 오게 됐거든요.”

* * *

“그러면 자네는…… 대체…… 쿨럭쿨럭…… 정체가 뭔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밤이었지만 놀란 소은은 날카로운 화살처럼 범한을 쏘아보고 있었다. 곧 죽을 늙은 동지가 자신을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으니 범한도 살짝 놀랐다. 하지만 범한은 작은 소리로 잠시 웃은 후 말했다.

“저요?”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범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섭경미의 아들입니다.”

섭경미의 아들. 익숙하지만 낯설고 또 친절해도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 세계에서 범한은 사람들을 향해 대놓고 이 단어를 말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나 현 상황을 보니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이에 밤이 깊어 여명 전 어둠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두 사람만 있는 동굴에서 범한은 그윽한 음성으로 그 사실을 말해 버렸다.

―저는 섭경미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영문은 모르겠지만 범한은 이 말을 뱉어 버린 후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동안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거대한 바윗덩어리를 잠깐 내려놓은 것 같자 범한은 밤바람에 깃든 자유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 * *

날이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다.

소은은 많지 않은 기억을 느릿느릿 말한 것이었지만 그 덕분에 범한은 하루 반 만에 이번 북제행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이에 소은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더 남기실 말은 없나요?”

소은은 기괴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잠시 후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말했다.

“자네가…… 그녀의 아들이라고?”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어머님이 누군지 쉽게 말하지 않는 게 습관이 되어 놔서요.”

소은이 거칠게 기침을 몰아서 했다. 그러자 심맥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핏방울이 모조리 밖으로 배출되었다. 소은이 우는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닌 사람처럼 말했다.

“어쩐지 아는 것도 많고 신묘에 흥미도 많더라니…….”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일의 전말을 알게 된 노인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제 보니 이 동굴도 자네를 묶어 두지는 못하겠군.”

“저 자신을 사지로 모는 버릇은 없거든요.”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범한이 소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소은은 갑자기 범한을 당장이라도 죽여 버릴 듯한 기세로 노려보았다.

“만약 곱게 살아 있고 싶다면 신묘에는 가지 말거라.”

범한은 차분한 표정으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소은도 그런 범한을 무시한 채 범한 뒤로 보이는 누런 절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잠시 후 아까보다 짧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죽음도 두려워 않는 무시무시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냥 자유를 원해서인 줄 알았는데 죽음이 임박하니 알겠구먼.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거였어.”

“이 세상에 죽는 걸 두려워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범한이 죽기 직전의 소은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오른손에서 힘을 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죽음이 꼭 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여기와는 완전히 다른 낯선 세상으로 갈 수도 있거든요.”

이는 범한을 가장 감상적이게 만드는 비밀이었다.

소은의 시선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눈동자에 있던 붉은 기도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자네가 정말로 꼬마 선녀…… 아니, 섭경미의 아들이라고?”

한데 범한이 대답하기도 전에 소은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자네는 그녀를 하나도 닮지 않았군.”

범한이 말했다.

“그분이 네 살 때 보신 거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그러자 소은이 웃었다.

“왜냐하면 자네는 그 꼬마 선녀보다 훨씬 덜 아름답거든.”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갸우뚱한 채 말했다.

“이 세상에 저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얼마 없는데요.”

“안목이 다른 거겠지.”

“어떻게 다른데요?”

소은이 범한을 슬쩍 보더니 옅게 냉소를 띠었다.

“이제야 알겠어. 눈밭 황무지에서 꼬마 선녀는 새하얀 허허벌판을 바라보고 있었지. 눈매에는 부드러움과 슬픔, 연민이 담겨 있었고. 그때 그 눈빛을 어떻게 형언해야 할지 몰랐는데 이제 어둠이 오니 좀 알 것만 같군. 그녀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어떤 일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무슨 일이요?”

범한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 * *

“생명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집념.”

소은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자네도 맑게 웃는 얼굴이지만 자네와는 달랐지. 자네 어머니는 분명 지극한 사랑으로 넘치는 사람이었어. 반면 자네는 골수부터 무정한 사람이고.”

범한이 잠시 웃더니 말했다.

“그 점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평생 많은 사람을 죽여서 곱게 죽고 싶다는 헛된 욕심은 없었다네.”

소은은 이 화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신 멍한 표정으로 엷게 피어오르는 빛을 바라보았다.

“이 동굴 안에서 죽을 수 있다면 자네가 한 말처럼 이만한 무덤도 없겠지.”

범한은 소은 옆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그의 어깨 위에 왼손을 얹었다. 소은의 근육에서 벌써 힘이 풀리고 있었다.

절벽 바깥쪽 하늘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하지만 계곡 사이에 깔린 안개는 성스러운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빛이 부드럽게 소은의 늙고 마른 얼굴 위를 비추고 다시 피로 물든 그의 손을 물들이자, 반평생 외롭고 처참하게 산 밀정 우두머리는 절로 해탈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까 말했던 담주의 대추나무 두 그루는 원래 없는 거겠지?”

이 세계에서 던진 소은의 마지막 질문이었다.

* * *

범한은 노인의 귀밑에서 마지막 침을 뽑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사망을 확인하고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 주검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작은 소리로 무어라 말했다.

“담주에 대추나무 두 그루는 없지만 돌아가신 후 더 좋은 세계로 갈 거란 보장도 없습니다.”

소은의 두 눈은 이미 온화하게 감겨 있었다. 다시는 이 괴상한 세상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범한은 탁한 기운을 뱉어 낸 후 소은의 주검을 깊지 않은 동굴의 가장 안쪽에 옮겨 놓았다. 그리고 독수리가 와서 시신을 쪼아 먹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무정하게 그냥 방치했다.

범한은 동굴 입구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공중을 향해 손을 뻗어 휘저었다. 하얀 안개는 그의 손놀림에 따라 움직이기만 할 뿐이니 그가 손에 쥘 수 있었던 건 아무것도 없었다.

* * *

금의위는 분명 계곡 아래에서 이곳저곳을 다니며 두 사람의 시체며 흔적을 찾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런데 연산 절벽이 거울처럼 매끄러운 탓에 절벽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어딘가에 안정적으로 착지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 매끄럽고 눅눅한 절벽을 타고 위로 기어 올라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범한의 온몸은 종잇장처럼 절벽에 찰싹 붙어 있었다. 등 뒤로 깔린 짙은 새벽안개는 범한의 몸을 효과적으로 숨겨 주고 있었다. 그러니 혹시라도 누군가가 맞은편 절벽에 있다 하더라도 범한이 절벽 위를 도마뱀처럼 천천히 기어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열두 살부터 열여섯 살 때까지 범한은 네 해 동안 자신의 정기를 몸 밖에서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익히려 노력했다. 물론 매우 우둔한 수련 방법이기는 했다. 하지만 오죽은 그런 범한의 행동에 관여하지 않았고 범한 자신도 그것을 연마하는 게 즐거웠다. 그리고 그때는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 큰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마황 환약의 약효가 벌써 떨어진 터라 그의 정기도 어느 정도 고갈된 상태였다. 이에 조금도 부주의한 행동을 할 수 없었던 범한은 도마뱀처럼 절벽에 찰싹 붙어 조심해서 위로 또 위로 기어 올라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