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소은은 멍하니 서서 꼬마 소녀가 자신의 품으로 뛰어오는 걸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하마터면 입에서 피를 뿜을 뻔했는데도 고하는 호랑이처럼 맹렬하게 신묘 입구로 뛰어가 검은 빛과 맞붙어 싸우는 걸 곁눈질로 보고만 있었다.
젊은 고하는 그때 벌써 세상에서 가장 젊은 9등급 고수였다. 그리고 그 순간 무슨 자극을 받은 건지는 몰라도 자기 몸 안에 있는 능력을 최대로 발휘해 신묘의 신비한 검은 그림자와 한데 얽혀 싸웠다. 그러자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고 이에 산을 덮고 있던 눈이 무너져 내렸다.
소은은 호흡을 가다듬고 난 후에야 자기 품 안에 소녀가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리고 미처 무슨 반응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소녀가 푸른 돌계단 위에 있는 고하에게 고함치는 걸 듣고 말았다.
“물러서!”
소녀는 짧게 한마디 내지른 것뿐이었다. 한데 제왕의 말처럼 위엄이 있어 소은은 놀라고 말았다. 그런 후 소녀는 곧장 찰싹, 하고 소리가 나도록 소은의 따귀를 갈겼다.
“너도 물러서!”
* * *
고하는 민첩하게 뒤로 물러났다. 소은도 당황해 소녀를 품에 안은 채 돌계단에서 내려와 신묘 문으로부터 열 장 정도 떨어진 거리까지 물러섰다.
검은 빛은 슈욱, 소리를 내며 신묘 안으로 물러나더니 다시는 이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은은 여전히 경계하며 거대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 빛이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에 불현듯 두려워졌고 신묘에 있는 사람은 정말로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기 옆에 엎어져 피를 토하고 있는 고하가 1합 정도도 버텨 내지 못할 정도의 상대였기 때문이다.
그 순간 소은은 알 것 같았다. 분명 조금 전 자신이 하수도를 찾으러 갔을 때 돌계단에 꿇어앉아 있던 고하가 자기 품에 있는 소녀와 모종의 협의를 했고 이에 소녀가 신묘에서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소녀는 대체 누구지?
“나는 안고, 저자는 끌어. 가자.”
소녀는 추웠는지 소은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명령을 내렸다. 소은은 감히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한 손으로 고하의 옷깃을 움켜쥐고는 대설산을 뛰어 내려왔다.
대체 얼마나 뛰었는지 모르겠지만 소은은 어느새 자신의 움막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건 장막 안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고 있을 때였던가? 그런데 왜 뛰어온 거지? 폐하께서 당부한 불로장생약은 아직 구하지도 못했는데 왜 이 꼬마 소녀의 말을 따르고 있는 거고? 게다가 더 이상했던 건 신묘에 있던 선인들이 자신을 뒤쫓아 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소녀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코를 막은 채 움막 한쪽 구석에 남아 있던 먹다 남은 인육과 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류란 참으로 불쌍하고 꼴 보기 싫은 것들이야!”
소녀가 몸을 돌려 소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순간, 소은은 그제야 꼬마의 생김새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물처럼 맑고 눈처럼 순수하고 별 같은 눈동자가 박혀 있는 게, 범인에게서는 볼 수 없는 지극히 아름다운 미모였다.
* * *
동굴 내부는 어두컴컴했으므로 범한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에서만큼은 살짝 이상한 낌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 소녀는 몇 살처럼 보였나요?”
“네 살. 많아야 네 살.”
소은은 그때 본 속세의 때 묻지 않은 얼굴을 지금도 보고 있는 것처럼 두 눈을 뜨고 있었다.
“그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너무나 가벼워서 안고 있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지.”
범한이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네 살인 건가.”
“왜 ‘역시’란 단어를 붙인 건가?”
“별것 아니에요.”
범한은 잠시 웃고는 두 눈을 반짝이며 다시 물었다.
“그 소녀가 누구인지 아셨나요?”
소은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알지. 홍진(紅塵: 속세) 속세를 사모해 신묘에서 도망쳐 나온 꼬마 선녀였어.”
범한이 웃기 시작하며 집게손가락을 들어 올리더니 아니라는 듯 흔들며 말했다.
“제 생각이 맞을 거예요. 그냥 신묘에 물건 훔치러 들어갔던…… 평범한 꼬마 아가씨였을걸요.”
소은은 범한의 확신에 찬 말을 듣더니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지간해서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한밤에 절벽 위에 있다지만 아래쪽에서 수색 중인 금의위가 이 기침 소리를 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이에 살짝 걱정된 범한은 가느다란 침을 꺼내 소은의 목에 찔러 넣었다. 그의 심맥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한 조치였다.
범한은 소은의 목에 손가락을 살짝 대보았다. 축축하고 끈적한 느낌이 들어 콧물을 찍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비릿한 냄새가 나는 걸 보니 객혈을 한 모양이었다. 이 와중에도 범한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촉이 온 상태였다.
“그건 선녀였어.”
죽음을 눈앞에 둔 노인은 서른 해 전 자신의 판단을 집요할 정도로 확신하고 있었다. 이에 범한도 더 이상 말싸움하고 싶지 않아 그냥 질문을 던졌다.
“네 살짜리 여자아이였으니 상자를 들 수는 없었겠죠? 상자는 누가 들고 있었어요?”
“어떤 상자?”
소은이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범한은 살짝 놀랐다. 생각해 보니 상대방은 이제 와서 거짓말할 이유도 없었고 더군다나 이번 이야기에서 오죽 아저씨는 등장도 하지 않아서였다. 오죽 아저씨는 예전에 어머니와 함께 집을 떠났다고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집은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지? 어머니의 유서에는 오죽 아저씨가 일찌감치 신묘에서 강자와 한차례 싸웠고 그때 기억의 일부를 잃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왜 오죽 아저씨는 신묘에 있던 사람과 싸운 거지? 설마 질투심 때문에?
“그다음은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해야 하는 질문이었다. 소은, 그러니까 지금 이야기 중인 늙은이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그러니 범한도 자연스레 다음 내용을 재촉해야만 했다.
* * *
움막 안에서 고하는 모피 위에 누운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대체 네 살짜리 꼬마 아가씨와 무슨 약속을 했기에 줄곧 믿고 있던 신앙을 거역하고 신묘에서 나온 사람에게 공격을 감행한 것인지.
소은은 움막의 장막을 열어젖힌 채 설원을 보고 있는 꼬마를 잠시 바라보았다. 눈보라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그런데도 작달막한 키에 눈처럼 새하얀 피부의 소녀는 작은 손으로 두꺼운 장막을 꽉 움켜쥔 채 광활한 바깥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는 나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적막감 같은 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은은 조심스레 고하 곁으로 다가가 옷섶이 열려 있는 곳으로 손을 뻗었다.
“그건 내가 그 사람에게 준 거야.”
소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당신은 함부로 건드리지 마.”
소은은 순간 험악한 눈동자를 번뜩이며 어린 소녀를 바라보았다. 고하가 지금 품에 숨겨 둔 물건이 분명 천계에서도 최고로 좋은 책일 거란 생각에 꺼내서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문득 소녀가 신묘에서 도망 나온 어린 선녀란 생각이 들자 그런 생각은 모두 포기하고 말았다.
이에 소은은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는 꼬마 선녀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은 대위나라의 진무사 쌍영 지휘사입니다. 폐하의 명으로 하늘의 뜻을 듣기 위해 신묘까지 왔으니 신선께서는 불로장생의 약을 내려 주십시오.”
소은은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입구에 서 있던 소녀가 웃기 시작했다. 그것도 매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그녀가 환약 하나를 소은에게 던졌다.
“나를 도와줬으니 나도 당신을 도와줄게. 저 수도자가 나에게 얻은 게 있으니 당신에게도 뭔가를 줘야겠어.”
소은은 환약을 받아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특별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어찌 되었든 선녀가 준 물건이라 감히 소홀히 대할 수 없어 그것을 옥으로 된 작은 상자에 조심스레 넣었다.
“돌아들 가.”
소녀의 말투는 살짝 노인네 같은 구석이 있었다.
“여기는 있을 곳이 못 돼.”
소은은 살짝 실망했다. 겨우 신묘에 찾아왔는데 들어가 보기는커녕 신묘 안 선인들이 어찌 생겼는지조차 알아내지 못했으니 말이다.
“약을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녀님.”
* * *
“이후로는 여기에 오지 말고.”
소녀가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신묘의 위치를 말해서는 안 돼.”
“너희가 신묘의 위치를 누설한 사실이 내 귀에 들어온다면 너희를 죽여 버릴 테야.”
소녀가 몸을 획 돌려 아직 앳된 얼굴에 얼음 같은 싸늘함을 담은 채 말했다.
“들었어?”
소은은 계속 머리를 조아리며 그러겠노라 답했다. 얼음 조각을 깎아 놓은 것 같은 여아의 입에서 쌀쌀맞은 말이 나와 조금 익살스러운 느낌이었지만, 네 살 여아가 이리도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자신이 범인이 아님을 증명한 것이었다.
그러니 소은이 아무리 대위나라 근위대 대장이라 할지라도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소은은 그냥 소녀의 말을 따랐다.
* * *
“고하가 깨어나자 어린 선녀는 우리 두 사람에게 맹세를 강요했다네. 그런 후 우리는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어. 그로부터 며칠 동안 어린 선녀의 얼굴에서 점점 웃음이 늘더군. 인간 세상에 내려온 게 그녀로서는 매우 즐거운 일인 것처럼 보였다네.”
소은이 머릿속 기억을 계속 떠올려 나갔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나와 고하는 그녀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네. 그런데 그녀의 몸에서는 어떤 신묘한 힘 같은 게 느껴지지 않더군. 아, 신선과 인간은 본디 다른 존재니 인간인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 게야. 그런데 어느 날, 꼬마 선녀가 고개를 돌려 자기 등 뒤에 있는 대설산을 바라보며 불쑥 혼잣말 몇 마디를 내뱉었지. “그도 너무 불쌍해.”라며. 아직도 그 말이 생생하게 기억나. 그때까지 사람 얼굴에서 그렇게 자애와연민이 가득 찬 표정을 본 적 없었으니.”
범한은 자기 어머니가 선녀 따위가 아닌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강력한 힘이 없었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 세상의 양대 강자를 공갈 협박해 쩔쩔매게 만든 걸 보면 머리만큼은 비상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범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와 연민의 감정이라니.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잠시 실소하고 말았다.
그러자 소은이 조소하듯 말했다.
“나처럼 더러운 물에서 사는 쥐새끼 같은 자네가 어떻게 하늘나라 구름 위에 사는 선학(仙鶴)의 자태를 알 수 있겠는가. 그 어린 선녀의 눈이 어땠는지는 내 말솜씨로는 도무지 형용할 수가 없군. 그렇다 해도 우리 두 사람은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네.”
범한은 잠자코 있었다.
“다음 날, 꼬마 선녀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어. 어디로 간 건지 원, 눈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극한의 땅에서 혼자 묘연히 자취를 감춰 버렸으니 나와 고하는 까무러치고 말았다네.”
“그 후에 선생과 고하가 북위로 돌아가신 겁니까?”
범한이 물었다.
“그랬지. 돌아가는 길은 더 험난했어. 그렇다 해도 결국에는 무사히 돌아갔지.”
소은이 말을 이어 갔다.
“선녀께서 준 환약을 폐하께 바쳤다네. 결과만큼은 괜찮았던 거지.”
그러자 범한이 받아쳤다.
“거짓말 그만하세요. 그 환약은 진즉에 배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소은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자네는 속일 수 없구먼.”
범한이 말했다.
“이 세상에 불로장생의 약이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사람이라면 그 정도 유혹은 거절 못 하는 걸세.”
소은이 다시 탄식하며 말을 이어 갔다.
“물론 그 환약을 먹은 후 애당초 불로장생은커녕 단순히 체질을 보강해 주는 약이란 걸 알게 되었네. 그래서 결국에는 꼬마 선녀에게 속았다는 걸 알았지.”
“분명 그 꼬마 선녀는 평생 누군가를 속이는 걸 즐겼을 겁니다.”
범한이 살짝 당황한 사람처럼 말을 이어 갔다.
“어쩌면 그녀의 죽음도 거짓일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