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두 사람의 시간은 어느덧 서른 몇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있었다. 동굴 밖 황무지 산에는 어느새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노인의 기억을 통해 수천 명으로 이루어진 원정대가 쏟아지는 눈을 뚫고 사람이 살지 않는 북쪽으로 힘겹게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가죽 신발을 신었고, 눈만 밖으로 내놓은 채 두툼한 모피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추위는 몸속으로 그리고 뼛골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원정대의 맨 앞에서 진두지휘하고 있는 두 사람은 바로 한창 혈기 왕성한 소은과 경건한 표정의 고행자 고하였다.
탐험대는 북으로 향했고 지대는 갈수록 험난해졌으며 그로 인해 사람 수는 계속 줄어들었다. 어떤 이는 얼어 죽고 어떤 이는 빙곡에서 실족해 실종되었으며 또 어떤 이는 공중 공격을 퍼붓는 맹금류에 의해 갈가리 찢겨 죽음을 맞이했다. 어쨌든 시간이 지날수록 원정대의 길이는 갈수록 짧아졌고 내부 분위기도 점점 험악해져 갔다.
천지가 온통 흰 눈뿐이다 보니 어떤 이들은 혹한의 환경까지 더해지자 점점 시력을 잃어 갔다. 소은은 이들을 매정하게 버렸다. 그리고 이때 버려진 이들은 내내 그들을 노리며 따라오던 승냥이들에게 잡아먹혔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모든 일이, 죽음과 같은 참혹한 일조차도 조용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원정대는 한참을 걸은 후에야 북극에 있는 거대 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에는 안쪽으로 향하는 좁은 통로가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말이 산이지 두껍게 내려앉은 눈 탓에 얼음 산만 끝없이 이어져 있을 뿐, 제대로 된 산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겨우겨우 살아남은 백여 명의 대원은 통로를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한데 산 뒤에도 여전히 빙설로 덮여 있어 이곳에서는 동물조차도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대원들은 고집스레 이곳에서 주둔했고 이로써 신묘의 흔적을 찾을 수 있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여러 날이 지나도록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겨울이 되어 큰 눈이 내려 산이 봉쇄되고 해까지 사라졌는데 식량마저 떨어지고 말았다.
가장 강인한 자가 끝까지 살아남는 법. 절대 끝날 것 같지 않은 길고 긴 밤 동안 소은과 고하는 등을 맞댄 채 움막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 주변에는 시체가 쌓여 갔으며 이들이 피워 놓은 불꽃은 단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 대원들이 남긴 움막 잔해와 옷가지들이 두 강자를 따뜻하게 해준 덕분에 이들은 희망 한 가닥을 쥐고 있을 수 있었다.
* * *
“그건 하늘의 분노였어.”
동굴 안에 있는 소은이 살짝 곤란한 듯 눈을 떴다. 충혈이 더욱 심해진 눈동자에 갑자기 끝없는 공포가 밀려들고 있었다.
“하늘께서 평범한 인간이 신묘를 찾으려 한다는 걸 아시고는 진노한 거였지. 그래서 끝도 없는 암흑도 내린 거였고.”
범한이 노인의 눈을 잠깐 보고는 잠시 후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건 극야라고 부르는 현상이에요.”
범한에게는 다시 한번 신묘의 위치를 확인하게 해주는 단서였다.
소은은 당연히 극야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자신에게 너무 깊게 박혀 버린 기억 때문에 망연자실한 상태가 되어 계속 말할 뿐이었다.
“그때 고하는 매우 맛나게, 그것도 자기만 챙기며 인육을 먹었다네. 그런데 그런 짓을 하고도 하늘에 무척이나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더군. 그자에게 경멸감이 들었다네. 그런데…… 아마도 신묘의 신선을 정말로 감동하게 만든 건지도 모르지. 그러니 하늘이 갑자기 밝아진 걸 테고.”
범한은 초조하게 소은을 바라보며 ‘두 사람이 어떻게 수개월의 극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인육을 먹고 움막을 태워 가며 버텼다지만 고독과 갈등 때문에 미치광이가 되고도 남았을 텐데 말이다.
소은이 별안간 웃기 시작했다.
“하늘이 갑자기 밝아졌다고. 그것도 나와 고하가 죽기 직전에 말이야. 그렇게 갑자기 희망이 찾아오니 계속 살아갈 힘이 솟더란 말이지.”
“그런 후 신묘를 찾으신 거군요.”
범한이 비수를 챙겨 자기 옆에 놓고는 다시 작은 소리로 물었다.
“신묘는 어떻게 생겼어요?”
* * *
여러 해 전 대설산(大雪山) 바깥쪽, 뼈만 앙상하게 남은 두 사람이 힘겹게 움막에서 걸어 나왔다. 움푹 팬 눈두덩과 누렇게 뜬 얼굴, 숨 쉴 때마다 드러나는 퉁퉁 부은 잇몸. 이것이 알려 주고 있는 신호는 건 딱 하나였다. 두 사람에게 죽을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
날을 훤히 밝히기 시작한 빛은 더 이상 인색하게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동물 일부도 깊은 동면에서 깨났다. 하지만 화살 끝에 서 있던 둘은 맹수보다 거칠고 흉포했던지라 동물들로 배를 채우고 다시 일어섰다.
그날도 두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대설산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힘들게 찾아온 신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이들은 여전히 알지 못했다. 게다가 새하얗게 펼쳐진 대지는 아무것도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그런데 별안간 푸른 하늘에서 빛이 한 줄기 내려왔다. 대설산이 있는 쪽으로 내려온 빛이 이상하게 굴절되고 우툴두툴해지더니 아름다운 사당 하나가 산 위에 나타났다.
웅장하고 거대한 사당이 산을 끼고 서 있었다. 길게 이어진 검은 담벼락과 옅은 회색의 처마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장엄한 자태였다.
그 순간 고하는 넋 나간 사람처럼 산 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돌연 땅바닥에 엎드려 사당을 향해 구슬프게 대성통곡했다. 소은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다리에 힘이 풀려 눈 바닥에 주저앉아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드디어 신묘가 나타난 것이었다.
빙설을 따라 돌계단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런데도 젊은 고하와 한껏 놀란 표정의 소은은 대설산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하늘 가득 흩날리는 눈바람도 이제는 이들의 얼굴을 얼어붙게 만들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감동, 행복과 안도감, 긴장, 흥분 그리고 가끔씩 공포와 같은 감정으로 시시각각 변했기 때문이다.
고하의 얼굴에서는 무한한 광기 외에는 그 어떤 공포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행자였다. 이에 평생의 소원 중 하나가 직접 신묘의 문을 열고 돌계단에 이마를 조아리며 절하는 것이었다.
대설산 위에 있는 거대한 사당은 지근거리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다가가도 두 사람에게 신묘는 여전히 요원한 곳에 있었다. 반나절이나 올라갔건만 느낌상으로는 오히려 더 멀어지고 있었다. 이에 검고 장엄한 석벽으로 되어 있는데도 형체 없이 떠도는 그림자 같았고 언제든지 신기루처럼 대설산 속으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전설에 따르면 신묘는 1년에 딱 두 번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다. 그러니 고하와 소은은 이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전력을 다해 대설산을 오르고 또 올랐다. 얼마나 올랐을까, 고드름에 찔린 상처에서 피가 흥건히 배어난 탓에 눈밭 위에는 희미하게 두 줄기 핏자국이 그어져 있었다.
* * *
척, 하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고하의 손바닥이 신묘 앞 돌계단에 닿았다. 젊은 수행자는 미칠 듯한 희열과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신묘 돌계단을 방자하게 두 번 척척 내리쳤다.
소은은 그보다 조금 느렸다. 그리고 고하 몰래 소맷자락에 숨겨 두었던 암기를 쥐고 살짝 두려워하며 신묘의 정문을 바라보았다. 신묘의 문은 높이가 일곱 장 정도였으며 천신이 인간 세계에 던져 놓은 책처럼 보였다. 대(大)위나라 황궁 미닫이문의 확대판처럼 생겼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웅장했다. 그러니 어떻게 보아도 평범한 사람이 사는 곳처럼은 안 보였다.
신묘의 돌담 위는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이것만 봐도 오랜 세월 동안 이 신비한 곳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게 분명했다.
소은은 침을 꿀꺽 삼키고 신묘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았다. 그는 황제로부터 불로장생의 비방을 알아 오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받은 상태였다. 이에 임무 완성이 코앞에 다가오자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반면 고하는 사당 앞에 경건하게 꿇어앉아 머리를 연신 바닥에 찧으며 조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머리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소은은 문으로 걸어가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거대한 문에는 손끝 하나 댈 수 없었다.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수록 이상하게도 문은 계속해서 뒤로 물러서는 것만 같았다.
신묘는 눈으로 보기에는 가까이 있었지만 손을 뻗으면 하늘 저 멀리에 있었다.
* * *
30년 후 동굴에서는 죽음을 앞둔 소은이 두 눈 가득 슬픔과 낙담을 쏟아 내고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네.”
범한이 꽉 움켜쥐고 있던 두 손에서 힘을 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럴 거 같았습니다. 만약 그때 들어가셨다면 지금 4대 종사가 아니라 5대 종사가 있었겠죠.”
“고하가 나보다 강했던 거네. 내가 그와 똑같이 운이 좋았다 해도 대종사의 경지에 들어갈 방법은 없었을 걸세.”
소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어 갔다.
“한데 고하도 들어갈 수 없었지. 그 사당은 신비한 힘의 엄호를 받고 있는 것 같았거든. 당시 나와 고하가 세상 최강의 실력자였는데도 들어갈 수 없었다네.”
범한에게 순간 무언가가 생각났다. 스승 비개로부터 들은 천하에 떠도는 비밀 중 하나였다. 바로 고하가 신묘 앞 푸른 돌계단에 여러 날 동안 꿇어앉아 있었, 그 덕분에 지금과 같은 불세출의 무공 실력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보니 그 소문은 일정 부분 사실이었다.
범한은 순간 이맛살을 찌푸린 채 진지한 표정으로 소은에게 물었다.
“신묘는 대체 무엇이었나요?”
범한의 질문에 소은도 딱 떨어지는 대답을 해줄 수 없어 무력하게 말했다.
“신묘 정문에는 정말로 오래된 걸로 보이는 거대한 현판이 걸려 있었다네. 그 위에 쓰인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하늘이 세상 사람들에게 남긴 부호일 거라 생각하고 있지.”
범한은 살며시 떨리는 가슴을 안았다.
“어떻게 생긴 부호인데요?”
소은은 범한이 흥분하는 것을 보고 미간을 움찔했다. 죽음을 앞둔 젊은이가 미지의 것에 이리도 강한 호기심을 느끼는 것을 보자 기분이 살짝 들떠서였다.
“‘물(勿)’ 자가 쓰여 있었고…….”
노인은 조금 곤란하다는 듯 손을 뻗어 공중에 획을 하나 그었다.
범한은 곧장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혼잣말로 말했다.
“잠룡물용?(潛龍勿用: 천하를 품은 영웅은 자신의 때가 올 때까지 조용히 실력을 기르며 기다린다는 뜻.)”
“그리고 똑같이 생긴 부호가 세 개 있었다네.”
소은은 이 말을 해줄 때 손가락으로 공중에 획을 긋고 있었다. 직선으로 손가락이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내려오고, 다시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내려오고는 다시 원호를 두 개 그렸다. 그런 후 손가락 끝으로 허공을 톡 치는 동작을 취해 신비감을 더했다.
범한은 어리둥절했다. 그 부호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서였다. 신묘와 자신의 환생 사이에는 정말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걸까. 어머니와도 관계가 없었던 거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범한은 이 문제는 살면서 알아 가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데 고하와 소은처럼 기나긴 극야를 이겨 낼 만큼 자신도 운이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 간단히 끝날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요.”
소은이 두어 번 기침하고는 다시 입을 뗐다.
“그럴 걸세. 겨우겨우 힘들게 목표물 앞까지 간 거였어. 그런데 어떻게 해도 만지지도 못한다고 생각해 보게. 그 허탈함이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네.”
“고하는 문 앞에 놓인 돌계단에 간절한 모습으로 꿇어앉아 있었어. 그런데 나는 산 옆으로 솟아 있는 높은 벽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 봤지.”
동굴 밖에 드리워진 밤의 어둠이 두 사람마저 감싸 버렸다. 불을 켜지 않았으니 당연히 불빛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소은까지 담담하게 수십 년 전 일을 말하고 있으니 분위기가 기괴했다. 이런 와중에 범한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하수도를 찾으셨던 거군요?”
소은은 동굴 입구에 있는 젊은이의 그림자를 잠시 보고는 말했다.
“자네도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 그때 내가 무엇을 했을지 잘 알 걸세.”
“담벼락에도 닿을 수 없는데 어떻게 하수도를 통해 신묘로 기어들어 갈 생각을 하신 거죠? 게다가…….”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땅 같은 곳인데 하수도가 있으리란 보장은 없잖아요.”
“그래서 나는 실패한 거라네.”
소은이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는 정말 담이 컸던 것 같아. 신묘를 앞에 두고 세속적인 방법을 쓰려 했으니 말일세.”
“그다음에는요?”
“그다음에는…….”
소은은 이상한 감정에 휩싸인 채 말을 이어 갔다.
“그다음에는 신묘 정문으로 돌아갔는데 고하가 품에 무언가를 넣는 걸 봤어. 궁금해서 물어보려고 하는데 그때…….”
노인의 말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순간 범한은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신묘의 문이…… 열렸어.”
“네?”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소은 쪽으로 다가갔다. 마치 서른 해 전의 소은을 보호해 주려는 행동처럼 보였다.
소은의 입에서 황당한 웃음이 흘러나오더니 이내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묘 문이 아무 소리도 없이 열렸어. 너무나 기쁜 마음에 들여다보고 들어가려 했고.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문에서 느닷없이 정말로 묘하게 사람처럼 생긴 것 하나가 툭 튀어나오더군.”
“묘하게 사람처럼 생긴 거요?”
“그래. 꼬마 선녀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