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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04화 (204/1,108)

204화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나면 대개 무엇과 만나게 될까? 대개는 고수, 미인, 절세의 무공 비급, 막대한 재화와 부를 만나게 되어 있다.

범한은 절벽에서 뛰어내릴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을 연달아 하고 있었다. 우선 자기가 업고 있는 자가 고수란 걸 확신했다. 그리고 만약 계산해 놓은 착지점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난 곳으로 간다면 집에 두고 온 미녀와는 바로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그러면 어머니가 남겨 놓은 막대한 재산도 누려 보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연마해 오던 이름 모를 무명의 비급도 어쩌면 오죽 아저씨가 저승에서나 보라며 불태워 줄지도 모른다.

오죽이라는 스승은 교육 수준은 부차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어도 주입식 교육에 있어서는 충실한 집행자였다. 그러니 자신이 지옥 명부에 가더라도 오죽 아저씨는 자신을 쉽게 용서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옛날에 오죽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걸 봤을 때 범한은 놀라기도 했지만 부럽기도 했었다. 이에 자주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연습을 했고 심지어는 창산에서도 연습을 빼먹지 않았다. 그 결과 지금 조금이나마 그 효과를 보고 있었다.

사람을 업은 채로, 더군다나 안개 때문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미끄러운 암벽 절벽에서 속도를 줄이기 위해 짧게 끊어 가며 내려오며 앞서 물색해 놓은 착지점을 정확히 찾아낸 것이었다. 한데 그 착지점이란 건 바로 살짝 삐져나온 암석이었다.

범한의 양다리가 착지점인 암석 위로 떨어지자 체내 패도의 정기가 자연스레 반동하는 힘을 내보내 충격을 완화해 주었다. 하지만 랑도의 무서운 칼에 당해 시큰거리고 힘없는 왼쪽 다리 때문에 범한은 신음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무릎을 찧고 말았다.

한데 이 순간에도 그는 자신들이 그 커다란 암석을 타고 절벽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중이라는 걸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범한에게 암석이 땅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자네, 바보지?”

암석 뒤에는 깊지 않은 작은 동굴이 있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소은이 동굴 벽에 기댄 채 비웃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어디, 이제 어떻게 올라가는지 볼까.”

범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히 곧 목숨이 끊어질 노인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잠시 동굴 쪽부터 힐끔 쳐다봤다. 동굴과 전씨들이 아무 관련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소은에게 약을 한 알 먹였다.

소은은 사양 않고 그 약을 삼켰다. 그리고 대놓고 비웃는 얼굴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스무 해 전이라면 랑도와 하도인 같은 후배는 내 상대가 안 됐을 거야. 한데 자네는 왜 그랬나? 당당한 경국 감찰원 제사에, 진평평과 비개의 후계자인 자네가 궁지에 몰려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기나 하고. 이제 천천히 굶어 죽을 일만 남지 않았나.”

범한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노인이 옛날이야기 하는 거 좋아하면 죽을 때가 다 되어서라던데요.”

소은은 아까와 똑같은 표정으로 범한의 말을 되받아쳤다.

“나는 원래 죽게 되어 있던 몸이야. 그런데도 이리 오래 살았으면 죽어도 손해는 아니지. 한데 문제는 자네는 아직 젊다는 거고. 그러니 당최 모르겠단 말이지. 대체 왜 나를 구한 건가?”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 갔다.

“한데 어떻게 운무 속으로 뛰어내릴 생각을 한 건가?”

“선생 양 아드님은 싸움이나 할 줄 알았지 이런 일은 아예 할 줄 모르더라고요.”

범한이 머리카락 사이에서 가는 침을 꺼내 소은의 몸에 찔러 넣었다. 지혈을 하기 위해서였다.

“금의위도 두 사람이 정한 접선지를 알아냈습니다. 그러니 저도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기에 가능했던 거고요.”

소은은 범한이 치료하도록 내버려 두고는 눈을 흘겼다.

“침에 독이 있었군.”

범한이 언짢은 기색으로 대꾸했다.

“어쨌든 곧 돌아가시게 될 거잖아요. 더군다나 몸이 수백 종의 독에 중독돼 있는데 뭐, 이까짓 걸로 무서워하시는 겁니까.”

소은이 기침을 두어 번 했다. 눈빛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하고 곧 죽을 사람처럼 보이는 걸 보니 성미까지 이상하게 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범한이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창백해진 노인을 바라보고 있다가 돌연 질문을 던졌다.

“심중이 그 뜰을 포위했을 때 상삼호의 탈옥 계획이 이미 금의위의 손바닥 안에 있다는 걸 선생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 계속 그리하신 겁니까?”

“뭘 계속했다는 건가?”

“부상당한 금의위인 척하면서 힘들게 성 밖으로 도망 나오신 거요. 분명 고수가 기다리고 있는 거며 마중 나온 사람이 이미 제거됐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계셨으면서 말이죠.”

소은은 범한을 쳐다보고 있다가 느닷없이 날카로운 소리로 웃었다.

“어쩌면 그 사람들이 바라던 대로 자네를 유인해 낸 후 자네와 함께 묻히고 싶었나 보지.”

범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좀 진지하게 하시죠.”

소은의 시선이 장애물을 뛰어넘듯이 가볍게 범한의 어깨를 넘어 고요한 계곡 쪽으로 향했다. 뜨거워진 태양이 암벽을 가리고 있던 운무를 서서히 걷어 내고 있었다. 그러자 저 멀리로 깨진 누런 거울 같은 절벽이 기이하게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세. 내가 오래 갇혀 있어서 그랬네. 그래서…… 죽는다 해도 감옥에서 죽고 싶지는 않았거든.”

소은의 대답이었다.

범한도 그의 눈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반대편에 있는 매끄러운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우연히 벼락을 맞아 산산조각 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꽤나 오래전에 갈라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작은 나무 한 그루가 굳건히 자라나 불쌍하지만 경이로운 녹색을 펼쳐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누런 산에 푸르른 나무 그리고 그 아래에 흐르는 새파란 물과 흰 안개라. 그야말로 무덤으로는 적격이군.”

범한이 살짝 웃으며 자신의 왼쪽 바지통을 손보기 시작했다. 이 바지는 감찰원에서 내놓은 불, 도둑, 암기 공격을 막아 주는 옷이었다. 그런데 구멍이 난 걸 보니 랑도가 휘두른 칼의 공격까지는 당할 재간이 없었나 보다. 범한은 스승 비개가 남겨 준 검은색의 가는 비수를 꺼내 들고 살짝 변형된 칼 본체의 윗면을 살살 다듬어 나가다가 탄식하며 말했다.

“고맙지만 나는 범평평으로 불리고 싶지 않다고요.”

* * *

“왜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넣는 우둔한 짓을 한 것이냐?”

소은이 변장한 범한의 얼굴을 살짝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그의 입가에서는 불길한 피거품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호기심이 강해진다던데 어쩌면 그런 맥락에서 던진 질문이 아닐까.

범한은 비수를 다리에 집어넣더니 경직된 종아리의 경락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분하게 소은의 질문에 답했다.

“북제 사람이 매복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분명 물러서려 했어요. 그런데 곧 있으면 선생께서 돌아가실 거 같더라고요. 순간 제 머리가 이상해졌는지 그냥 뛰쳐나오고 말았지 뭡니까.”

그런데 사실 이치는 간단했다. 범한은 소은의 비밀, 신묘의 위치, 신묘와 섭경미와의 관계, 자신이 이 세계에서 환생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생과 사, 처지 그리고 방자하고 오만한 어머니 사이에 얽힌 일들 때문에 줄곧 자기 목숨 부지에만 연연했던 범한은 결국에는 분에 맞지 않는 행동을 저지르게 된 것이었다.

햇살이 골짜기 곳곳을 빈틈없이 비추며 모든 것을 돌봐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로 휘저어 놓은 물결처럼 운무가 넘실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대부분의 운무는 사라졌지만 아직 일부는 연기처럼, 실처럼 절벽 앞쪽에 남아 드문드문 야트막하게 자라난 푸르른 나무들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암벽으로 된 작은 동굴 위쪽은 살짝 돌출되어 있었다. 맞은편 절벽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계곡 밑바닥도 동굴로부터 한참 아래에 있어, 범한은 청력이 아무리 좋아도 계곡 밑바닥에서 나는 소리는 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겨우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도 상경의 금의위는 아래쪽에서 두 사람의 시체를 찾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계곡 밑바닥은 습하고 어두울 테니 금의위는 잠시 동안은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최종적으로는 자신과 소은이 계곡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건 알게 될 게 뻔했다. 그래서 범한은 북제 사람들이 자신과 소은의 명줄이 길다고 생각하며 계곡 밖으로 나가는 길을 따라 수색해 나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범한 입장에서는 노련하고 독한 심중은 절대 얕잡아 봐서는 안 됐다. 언제든 상대방이 이 거울처럼 매끈한 암벽도 관심을 갖고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해당타타의 사형 랑도도 떠올리고 있었다. 겨우 한차례 맞붙어 봤지만 과연 인간 세상의 최강자 중 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정신이 의연하고 굳세 과거 자신에게 쉽게 속아 넘어갔던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였다.

산바람이 살랑 불고 있었다. 소은의 늙고 창백한 얼굴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노인은 이미 반 혼수상태로 들어가 언제든 사망할 것만 같았다. 필사적으로 이 산에 올라와 죽으려는 늙은 몸에게는 동굴 밖에 내리쬐고 있는 태양도 자신의 따뜻함을 조금이라도 전달해 줄 방도가 없는 것 같았다.

범한이 잠시 머리를 긁적이고는 소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늙은 동지의 피부는 흡사 석회를 개어 한 겹 씌워 놓은 귤껍질처럼 보였다. 잠시 생각해 보던 범한은 허리끈 안에서 조심스레 환약을 꺼냈다. 초록색 환약이었다.

환약에서는 마황 나뭇잎 냄새가 은은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범한은 작은 칼로 그것을 반으로 자른 후 반쪽을 잘게 부수어 소은의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이어 소매에서 가느다란 빨대를 꺼내 옷에 감춰 둔 물주머니에 연결한 후 소은의 말라붙은 입술에 물방울을 떨어뜨렸다.

* * *

잠시 후 죽어 가던 소은이 깨어나 두 눈을 떴다. 한데 많이 옅어졌던 눈동자의 붉은 기도 다시 나타났다. 그래도 노인은 죽기 직전에 다시 살아나 옛 위용을 되찾은 것만 같았다.

“어떤 약을 먹인 거지?”

“초록색 환약이요.”

범한이 웃어 보이고는 말을 이어 갔다.

“정신이 들게 해주는 거예요. 그래도 옛날의 위풍당당한 모습으로는 되돌아가시지는 못할 겁니다.”

소은은 당연히 그 농담을 이해하지 못했다.

“공격하러 나서기 전에 먹었구나?”

소은은 아까보다는 훨씬 힘차게 숨 쉬고 있었고 정신도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만약 죽기 직전에 잠깐 정신이 맑아지는 현상이 아니라면 약물이 노인 몸에 남아 있는 힘을 자극한 것이었다.

범한은 그의 질문에 즉답을 피했다. 대신 손가락을 뻗어 소은의 맥을 짚어 보았다. 맥이 점점 힘차게 뛰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약간 건조했다. 마황 환약이 효험을 발휘한 것이다. 한데 이런 원시적인 흥분제는 소은의 심장에 일시적인 기운만 북돋아 줄 뿐, 이미 생기를 잃어버린 늙은 목숨을구할 수는 없었다.

범한이 깊이 숨을 들이쉰 후 차분하게 소은을 바라보았다.

“랑도에 하도인이라. 제가 선생의 다리를 부러뜨려 놨잖아요. 우리가 연합한다고 해도 그 둘의 적수는 못 되겠죠. 그러니 저로서는 약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게 말까지 동원한 군대가 아니라 그 두 고수였는지는 이해가 안 되네요.”

소은이 기침을 심하게 두 번 했다. 약물이 강하게 작용한 때문이었다. 소은이 곤란하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게지. 이번에 젊은 황제를 속이지 못한다면 나중에 골치가 아플 테니까.”

범한은 소은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북제 황제가 이 늙은이의 목숨을 살려 주려는 이유가 자신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유란 것을 계속 화제로 삼아 말을 이어 가지는 않았다.

“이 늙은이를 살려 준 건 내가 가슴에 간직한 비밀 때문이겠지.”

소은은 계곡 사이를 지저귀며 날아다니는 작은 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에 부러운 기색이 잠깐 스치더니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솔직히 말해 그 비밀이란 게 대체 뭐라고! 황제는 신묘의 도움을 받아 천하를 통일하고 싶어서라지만, 자네는 대체 왜 신묘에 가고 싶어 하는 건가?”

“당연히 저만의 이유가 있어서예요.”

“말해 줄 수는 없는 건가?”

하나는 늙고 하나는 젊은, 각기 다른 시기에 활동한 밀정 두목들이 이 순간만큼은 그냥 시골 노인과 청년이 되어 마음 편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죠. 조금만 말해 드릴게요.”

범한은 몸이 살짝 지치는 느낌이 들어 눈을 가늘게 떴다. 마황 환약의 약효가 떨어지고 있는지 정신적으로도 살짝 처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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