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성 밖은 평화로웠고 성 안도 평화로웠다.
금의위의 밀정이 보고하고 있었다.
“경국 사신단은 지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습니다. 임문 대인이 어제 범한 정사에게 기녀 두 명을 불러 주었는데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았다고 합니다.”
“범한이 사신단 안에 있는 게 확실하냐?”
심중은 이미 관복을 벗고 부자로 보이는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그리고 오른손에 들고 있던 불에 구운 당나귀 고기를 입으로 가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당나귀 고기를 베어 물고 씹기 시작하자 그의 입가는 온통 기름으로 번들거렸다.
“그렇습니다, 대인.”
밀정이 공손하게 보고를 이어 갔다.
“범한의 외모를 알고 있는 형제들이 사신단 거처 밖에서 줄곧 지키고 있었습니다.”
살짝 놀란 심중은 기름진 당나귀 고기를 탁자 위에 던져 놓았다. 그의 두 눈은 유난히 정신이 없어 보였다. 강철로 된 몸이 아니고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난밤에 신경 쓴 탓이었다. 심중이 느닷없이 웃다가 말했다.
“그리 고분고분한 자가 아니다. 하도인은 벌써 간 게냐?”
“네.”
말을 마친 밀정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몇 마디 더 보탰다.
“랑도 대인도 갔습니다.”
심중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한참 후 작은 소리로 혼잣말하기 시작했다.
“남쪽 오랑캐 놈들이 범한이 아직 사신단에 있다고 우리를 속이는 중이군. 그렇다면 만약 이럴 때 범한을 죽여 버린다면 그자들은 말도 못 하고 속깨나 끓이겠어.”
심중이 눈을 떴다. 그의 눈은 순간 노련한 독수리처럼 잔인하고 표독하고 인정머리라고는 없어 보였다. 심중이 말했다.
“남쪽 오랑캐 놈들이 요 십여 년 동안 남을 모함하는 짓만 익혔구나. 이제는 제 꾀에 넘어갈 차례군.”
* * *
범한은 밤새도록 지켜보느라 지치고 피곤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가득 차 있는 패도의 정기 덕분에 억지로 버티는 중이었다. 그래서 저 멀리 좁은 숲길에 있는 노인이 거동이 불편한데도 계속 걷는 걸 보며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흔에서 여든 사이의 노인인 그는 몇십 년 동안 고초를 당했으며 탈옥이라는 수를 철저히 가지고 놀았다. 그렇기에 저런 강인한 정신력이 대체 어디에서 나온 건지 모르겠다며 범한은 감탄하고 있었다.
범한은 움직이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소은이 성 밖으로 나온 후로는 모든 게 순조롭기만 해 자신도 모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심장이 떨려 오면서 어떤 가능성 같은 게 떠올랐다.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나무를 타고 내려오더니 소은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이내 어디론가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태양도 소은도 한 걸음 두 걸음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서쪽은 서역 하늘을 말하는 것이니 소은이 나아가는 방향은 죽음일 수도 또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정토 세계일 수도 있었다.
사신단과 신양 쪽에서 모든 계획을 상삼호에게 알린 건 당연히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소은에게도 그를 마중 나올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계속 위쪽으로 오르고 올라 끝까지 가자 깎아지를 듯한 절벽 옆에 펼쳐진 키 작은 풀이 어지럽게 자라 있는 구릉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왼쪽으로는 상경 군영의 마장(馬場)으로 향하는 돌길이 나 있었다. 상삼호와 소은이 이곳을 접선 장소로 정한 건 다 이유가 있던 것이다.
소은의 눈동자를 덮고 있던 붉은 핏발이 많이 어두워진 상태였다. 소은은 어깨를 살짝 기울여 등 뒤에 산처럼 지고 있던 젖은 땔감부터 바닥에 내려놨다. 그러고는 허리를 두드리며 주저앉았다. 마중 나온 사람은 없었지만 분명 황궁에서 첩보를 통해 이 계획을 알아냈을 테니 두말할 필요 없이 분명 누군가가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무도하강 습지대에서 정신이 아득해졌던 것처럼 소은은 다시 한차례 피로가 밀려오자 더 이상 걷고 싶지 않았다.
“어서 나오너라.”
그의 살짝 마른 입술이 열리며 몇 글자가 튀어나왔다.
말이 끝나자마자 작은 풀들이 살며시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통 검게 차려입은 검객이 산길로 서서히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검객은 높은 이마에 새하얀 낯빛 그리고 침착함과 노련함이 돋보이는 미간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이는 대략 마흔 정도로 보였다. 오른손으로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 자루를 안정적으로 받치고 있었고 손가락 뼈마디는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사람 자체가 차가운 검 같았다.
“하도인?”
소은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싸늘한 눈빛을 발사했다.
이 검객은 북제에 몇 안 되는 9등급 고수, 하도인이었다. 한 해 반 전에 경국 외양간 거리에서 범한이 배를 갈라 죽인 8등급 고수 정거수의 스승이었다.
하도인은 얼굴은 창백한데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어 마치 눈에 숯을 얹어 놓은 것 같은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 그가 검날이 아래로 가도록 검 자루를 정중히 쥐고 일어나더니 검자루를 잡은 손 위를 다른 한 손으로 감싸 쥐고 공손히 인사부터 올렸다.
“후배, 소은 선생께 인사드립니다.”
북제에서 고하 국사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소은에게 후배의 예를 갖춰야만 했다.
“옛날 젊은 칼잡이가 이제는 금의위의 최고 검객이 되었군.”
말을 마친 소은은 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리고 계속 자리에 앉은 채로 무릎만 툭툭 두드렸다.
“이미 오래전 일입니다.”
소은을 바라보고 있는 하도인은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저는 금의위의 개가 아닙니다. 황태후마마의 사람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소은 선생을 편히 쉬도록 해드리러 왔습니다.”
소은이 소리를 낮췄다.
“천하는 결국 폐하의 것이란 걸 알아야 하네.”
하도인은 노인이 한 말의 뜻을 알고 있었다. 황제는 소은을 죽이고 싶어 하지 않았고 자신은 줄곧 황태후의 입장에 서 있었으므로 자신이 분명 젊은 황제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에 하도인이 살짝 웃음을 짓더니 주변을 잠시 바라보고 말했다.
“오늘 경국에서 온 범씨 성의 잘생긴 젊은이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자 소은이 두 번 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이 늙은이도 한 시대를 풍미했건만 죽기 전에는 미끼나 되다니.”
“대인, 상심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때 물러난 거니 그로서는 운이 좋은 게지요.”
챙, 소리와 함께 하도인이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그리고 하늘에서 전속력으로 하강하는 새처럼 손목, 팔꿈치, 어깨가 일직선이 되도록 쭉 뻗고 소은의 심장을 향해 돌진했다.
검 끝이 인정사정없이 소은의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다가 순식간에 뽑혔다. 그러자 꽃잎이 날리듯 피가 솟구쳤지만 그 꽃은 아름답지 않았다. 늙고 부패한 몸이니 피마저도 젊은이들보다 적은 탓이었다.
하도인이 검으로 가슴 쪽을 겨누려다가 끙, 소리와 함께 순간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소은은 여전히 바닥에 앉아 있었고 말라비틀어진 오른손으로는 팔뚝 굵기만 한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다. 앞서 하도인의 검이 자신을 찌르려 할 때였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의 왼쪽 어깨를 내주었다. 그러더니 대체 어떤 방법을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불가능한 각도인데도 쥐고 있던 나뭇가지로 하도인의 정강이뼈를 힘껏 내리쳤다.
그 결과 나뭇가지 앞부분은 산산조각 나 있었다. 조금 전 소은의 매질 공격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나무 모양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도인은 왼쪽 다리에 극심한 통증이 밀려들자 원래 하얗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오른손으로는 여전히 검 자루를 쥐고 있었지만 나뭇가지에 얻어맞은 왼쪽 다리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도인은 9등급에 달하는 자신의 강력한 실력이면 늙고 다치고 아무런 힘도 없는 노인을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거라 생각했다. 물론 이 노인이 두려움의 대상이어서 충분한 준비를 하고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이리도 종잡을 수 없고 게다가 괴상하기까지 한 공격은 그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 * *
소은이 기침을 두 번 하고는 말했다.
“범한 녀석이 내 다리를 부러뜨려 놔서 자네 다리부터 부러뜨리려 했는데…….”
아직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하도인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러고는 용처럼 맹렬한 기세로 힘겹게 앉아 있는 소은 주변을 맴돌며 공격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적을 얕잡아 보는 마음 따위는 버리고 순전히 종사급 고수를 대하는 자세로 신중하게 공격을 펼쳐 나가는 중이었다.
하도인의 검술은 이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파들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소문에는 산 북쪽의 모 오랑캐로부터 용을 연상시키는 맹렬한 검술을 전수받았는데 중간에 고하 국사의 자연을 따르는 검법을 받아들여 원래의 것이 조금 희석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소문에는 일찌감치 고하에게서 진리에 대해 물었다가 많은 걸 깨닫게 되었다고도 한다.
한편 소은은 지금 나뭇가지 하나만 쥔 채 거동이 불편해 힘겹게 앉아 있는 상태였다. 한데 그렇다 할지라도 소은이 쥐고 있는 나뭇가지는 독사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주변을 탐색하다가 가끔씩 옆 찌르기 공격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그때마다 하도인은 멀리 피하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었다.
하도인의 정기가 점점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가 검 끝을 몸 쪽으로 붙이자 공중에서 웅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은도 손에 쥐고 있는 나뭇가지로는 하도인을 당해 낼 수 없게 되었다.
샥샥, 하는 소리가 수십 번 연달아 울렸다. 검과 나뭇가지가 서로 맞닿는 동안 소은이 쥐고 있던 나뭇가지는 무수히 작은 파편이 되어 공중에 날렸다.
소은이 손을 옆으로 뻗더니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우측 사선 방향으로 찔러 하도인의 살기등등한 검을 막아 냈다. 그가 산속에서 땔감 한 뭉치를 들고 온 건 오늘 이 젖은 나뭇가지들을 몽땅 써야 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태양이 독하게 빛을 발산했고 산길 끄트머리에서도 더위가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소은이 입고 있던 낡은 옷에는 여기저기 작은 구멍들이 생겼고 구멍 안쪽에서는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가슴과 배 사이에는 몇 군데 깊은 상처가 생겼으며 심지어는 검의 공격으로 살이 벌어진 게 고스란히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터라 이 노인의 상처 부위는 빨갛다기보다는 허옇게 보일 정도였다.
소은 주변에는 모기와 파리의 날개 그리고 조각난 몸통이 빽빽하게 떨어져 있었다. 피 냄새만 맡고 살 자리인지 죽을 자리인지 가늠도 못 하고 다가왔다가 순간 검이 내뿜는 기운에 조각조각 나고 만 녀석들이었다.
소은은 하도인으로부터 앞쪽으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다. 하도인은 검을 들고 서 있었으며 창백한 얼굴에는 멍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검 자루를 쥐고 있는 오른손은 결국 떨리기 시작했다.
그도 참으로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걸치고 있던 검정 옷이 젖은 막대기 공격에 다 해져 버린 것은 물론 몸 곳곳에 상처까지 입었으니 말이다. 한데 무엇보다도 끔찍한 건 상처 주변에 조밀하게 꽂혀 있는 가는 파편들, 즉 젖은 땔감의 파편들이었다.
“나오너라, 범씨 성의 녀석이 안 왔을 리 없으니 말이다!”
하도인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노인의 살고자 하는 욕구가 이리도 강하리란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한데 예상했던 경국 사람은 소은의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인데도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에 더 이상 참지 못한 하도인이 동료를 불러냈다.
소은이 힘없이 눈꺼풀을 들고는 내내 옆에 숨어 있던 적을 바라보았다.
“고하가 후배들을 불러들이다니 이 늙은이 체면은 생각도 안 해주는구먼.”
하도인의 동료가 조용히 소은에게 다가갔다. 그자는 양손에 곡도를 쥐고 있었다. 곡도의 칼날 위에는 가는 강철 가시가 수없이 많이 돋아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하도인의 상처 옆에 박혀 있는 가시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는 일단 아무 말 없이 소은에게 인사부터 올렸다. 그러고는 말했다.
“해당 사매가 소은 선생을 상경까지 모셔다드린 건 폐하께서 죽이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한데 오늘은 선생께서 탈옥하셔서 이 후배가 어쩔 수 없이 손쓰는 것이니 선생께서는 양해해 주십시오.”
소은이 싸늘하게 웃었다.
“과연 고하의 제자와 손제자는 위협하는 재주 하나는 제대로 배웠군. 겉으로는 인자하고 의로운 척하면서 속으로는 간교하고 악랄한 걸 보니. 그냥 나를 죽일 구실을 찾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찌 자신들은 아무 잘못도 없는 것처럼 말하는 건가?”
이자는 고하의 수제자이자 황제의 무술 스승인 랑도였다. 그는 스승뻘인 소은을 보자 말을 길게 하기 불편했다. 이에 곧바로 양 손목을 엇갈리게 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엇갈리도록 쥐고 있던 곡도를 소은의 머리에 재빨리 뒤집어씌우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