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성 남쪽에 위치한 거대한 저택 내부, 널따란 뜰에 횃불이 높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꾸민 십여 명의 사람들이 묵묵히 대기 중이었다.
그들 맞은편에 있는 등받이가 있는 팔걸이의자에는 중년의 누군가가 앉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사람은 매끄러운 오른손으로 까만 의자 팔걸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다리는 대충 아무렇게나 널브러뜨린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육중한 산처럼 바닥 벽돌을 지그시 밟고 있었다.
이자는 바로 17년 넘게 북제 북방에서 오랑캐와 맞서 온 상삼호 대장이었다. 지금 천하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장 중 하나로 북제군 내부에서는 최강자이자 명망이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한참 후 상삼호가 호랑이 같은 눈을 서서히 떴다. 그리고 위협적인 차가운 눈빛으로 꿇어앉아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황궁에서 퇴각로를 열어 주지 않으니 나 역시 가만히 앉아 죽을 수만은 없구나. 이번에 가면 조심하거라. 남쪽의 그자들이 나 하나 팔아넘기는 건 괜찮지만 그래도 그자들에게 또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조금 전 상삼호의 목소리는 사실 그다지 큰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종이 울리는 것처럼 웅장한 소리가 나 그가 얼마나 강한 내공의 소유자인지 충분히 보여 주었다.
상삼호 앞에 꿇어앉아 있는 사람은 상경성에서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담무였다. 그는 사신단 앞에서 고달에게 한 초식 만에 제압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북제군의 맹장이었다. 그런 그가 두 손을 맞잡고 가슴까지 올려 예를 차렸다.
“총독님, 남쪽 사람들은 교활하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러자 상삼호가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그는 오늘 입궁을 했었지만 그것이 그에게는 마지막 입궁이었다. 젊은 황제는 여전히 그에게 믿을 만한 소식을 주지 않았다. 황태후 쪽도 계속 소은을 가둬 두기를 고집했다. 그러니 상삼호로서는 양아버지의 안위를 걱정해야만 했고 어쩔 수 없이 금지된 일을 저지르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전씨 집안 자손은 역시나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는군.”
상삼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만약 양아버지께서 비밀 따위 감추고 있지 않았다면 젊은 황제는 자신에게 선심 쓰는 척이라도 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상삼호가 보기에 젊은 황제는 조금 여성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질 자체는 전청풍 총독의 강단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단시간에 국력을 증강하고 심지어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기회가 오자 군을 이끌고 남하한 것이었다.
이에 소은은 양아버지가 감옥에서 살아 나올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다. 더군다나 양아버지가 수십 년 동안 당한 처참한 일들을 생각하니 상경으로 불려온 명망 높은 명장은 슬프고 침울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가거라!”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 후 아내가 황태후 생일 선물을 준비하고 있는 후원으로 돌아갔다.
“알겠습니다.”
담무가 자세를 바꿔 한쪽 무릎을 세우며 대답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나섰다.
* * *
상경성 숭무문 바깥쪽에 있는 어느 민가에 정말 보잘것없는 작은 뜰이 있었다. 이곳은 좁은 골목이 밀집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감찰원 4처가 이 골목에 있는 민가에 교대로 드나들고 있었다. 한데 이 골목길은 토박이들도 쉽게 길을 잃는 곳이다 보니, 이곳에서 수십 장 떨어진 곳에 북쪽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키 큰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칼처럼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나무는 수피가 미백색이라 한밤에도 잘 보였다. 그리고 이미 시기적으로 여름으로 들어서며 올해 들어 유난히 비가 충분히 내려 준 덕분에 나뭇잎은 유난히 무성했다.
범한은 조심스럽게 정기를 조절해 맥박을 강하게 억제하고 있었다. 모두 검은 옷으로 가려 둔 몸을 주변 환경과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 아무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시선은 손바닥 크기의 나뭇잎을 뚫고 오른쪽 아래에 위치한 민가 내부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삼호 쪽에서 소은을 구출하기 위해 행동을 개시하기만을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소은이 바로 이 작은 뜰 안에 있었다. 이는 감찰원 4처가 공을 들여 찾아낸 정보였다. 오늘 저녁 행동 대원으로 나선 이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온 상삼호 밑에 있는 무사들뿐이었다. 그리고 언빙운의 부하들은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난 후여서 신양 쪽에서 돕기 위해 어떤 고수를 파견할지는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상삼호는 상경 요충지에 구금되어 있는 사람을 빼내려는 중이었고 이는 금기시된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성공 여부를 떠나 상삼호는 북제 황실과 군 측의 관계를 파탄 낼 수도 있는 일을 저지르려는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한은 어느새 남방의 어느 귀인에게 무한히 탄복하고 있었다.
장 공주는 정말로 대단하게 미친 여인이라고 말이다. 손바닥 뒤집듯 언빙운을 팔아넘긴 날부터 어쩌면 그녀는 그 후에 일어날 모든 변수를 다 계산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더군다나 그 변화가 무엇이든 간에 경국 조정은 큰 이익을 얻게 되어 있었다고 말이다. 장 공주는 그야말로 만만하게 볼 여인이 아니었다.
* * *
밤이 깊어졌음에도 높은 나무 아래쪽에 위치한 민가의 뜰은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여느 때처럼 저 멀리 강가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고 근처 마차 가게에 있는 늙은 말은 힘없이 건초를 씹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의 별들은 구름 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밤바람이 불자 범한 곁을 감싸고 있던 나뭇잎은 자기 연민에 빠진 듯 몸을 비벼 댔다. 그야말로 상경의 여느 밤과 똑같은 밤이었으며 조금도 이상하거나 다를 게 없는 밤이었다.
그러다 문득 나뭇가지에 엎드려 있던 범한이 눈을 번쩍 뜨더니 아래쪽 민가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탈옥이 시작된 것이다.
마차 한 대가 작은 뜰로 통하는 문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같은 시각, 회색 천에 싸인 작은 수레도 아무도 모르게 뜰 뒤쪽 담벼락으로 다가갔다. 뜰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한편 높은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범한은 이 모든 장면을 눈에 담고 있었다.
마차에서 중년의 누군가가 내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몇 개의 검은 그림자가 뜰 주위로 사라지는 게 범한의 눈에 들어왔다.
“누구냐!”
소은을 지키고 있던 금의위가 경계심을 보였다. 그는 담벼락 위에 몸을 반 정도 드러내 놓고 육중한 쇠뇌를 들어 뜰 문 앞에 있는 중년에게 겨누었다.
마차에서 내린 중년의 사람은 바로 범한도 만난 적 있는 담무였다. 담무가 웃다가 말하려던 찰나였다. 검은 그림자 두 개가 어느새 금의위의 왼쪽과 오른쪽에 나타나 그의 후두부에 쇠뇌의 화살을 인정사정없이 내리꽂았고 그 순간 피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금의위의 목에는 쇠막대기 두 개가 삐죽 솟아 있었다. 보기만 해도 피비린내 진동하는 광경이었다.
* * *
“공격!”
담무가 작은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이내 큰 소리가 울렸다. 마차에서 약 여덟 척 정도 되는 키에 손에 커다란 쇠망치를 든 장사 하나가 내렸다. 그리고 뜰을 막고 있는 문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왼쪽 팔을 쭉 뻗어 문을 내려쳤다. 한데 손을 뻗는 위세만 봐도 나무문은 수많은 나무 파편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펑! 귀를 먹먹하게 할 정도로 정말 큰 소리였다.
역시 예상대로 수많은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데 문은 부서진 게 아니었다. 문 사이에 강철판이 덧대어져 있었다. 높은 나무 위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범한도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금의위가 중범죄자를 가둬 둔 곳이니 과연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문이 부서진 찰나, 뜰에 있던 금의위도 어느새 대응에 들어가 뜰 입구에 사람들을 모아 놓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거인은 강철로 된 문을 계속해서 두드렸고 쿵쾅거리는 소리가 계속 울려 퍼졌다. 그리고 넘어갈 듯 떨리는 것을 보니 이제 몇 번만 더 때리면 될 것 같았다.
“죽여!”라는 소리와 함께 검은 옷을 입은 십여 명의 사람이 담장 위로 올라가더니 이내 안쪽에 있던 금의위를 죽이기 시작했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의 무공 실력은 결코 예사롭지 않았고 모든 공격 동작에는 피를 보겠다는 살기가 담겨 있었다. 더군다나 죽음을 불사한 움직임이다 보니 마치 광풍과 우레가 몰아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늘 번화한 상경만 수호하던 금의위는 군에서 온 장사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하늘 가득 선혈이 흩뿌려지는 동안 금의위는 뒤로 밀리기만 할 뿐이었다.
범한은 나무 위에서 모든 상황을 냉철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는 두 다리가 잘린 소은이 높은 담벼락을 넘을 수 없기에 상삼호의 부하가 문을 부수려 애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장사가 하층민 노동자처럼 죽어라 철문만 두드리고 있으니 보다 못해 한마디 내뱉고 말았다.
“담벼락을 부수라고!”
마치 소은의 두 다리가 잘린 게 자기 때문이란 걸 잊은 사람 같았다.
징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무판 사이에 끼워 두었던 강철판을 장사가 드디어 부순 것이다. 한데 그걸 보고서도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도 또 금의위 중에서는 놀라는 사람도 없었다.
뜰을 막고 있던 문이 소리와 함께 넘어갔다. 그러자 일찌감치 공격 준비를 하고 있던 금의위는 쇠뇌를 쏘아 댔고 화살이 흉악하게 공기를 갈랐다.
장사는 문을 수없이 내려친 탓에 오른팔이 견딜 수 없이 시큰거리고 체내의 정기마저 모두 소모된 상태였다. 반격할 여력조차 없던 그는 정면에서 날아오는 쇠뇌의 화살을 보고만 있었다. 결국 무수히 날아오는 화살이 소리와 함께 그의 널따란 몸을 뚫었다. 그중 한 발은 그의 안구로 직행했다. 그리고 이내 척, 하는 소리와 함께 수정처럼 생긴 새빨간 물체가 그의 눈에서 튀어나왔다.
“으악!”
장사가 고통스러워하며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그러더니 몸에 수많은 쇠뇌의 화살을 꽂은 채 뜰 안쪽으로 돌진했다. 그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피가 쏟아져 내렸다.
겨우 세 걸음 앞으로 내디뎠을 뿐인데 산처럼 거대한 장사의 몸이 바닥 석판 위로 고꾸라졌다. 순간 석판이 깨지면서 사방으로 먼지가 날렸고 바닥은 피로 흥건했다. 그리고 엄청난 기세에 뜰에 있던 금의위도 세 걸음 뒷걸음치고 말았다.
죽은 장사의 어마어마하게 큰 덩치는 뜰 밖으로 향하는 화살을 거의 다 막아 주었다. 이에 담무와 고수 몇몇은 장사의 거대한 몸 뒤에 숨어 뜰 안으로 바람처럼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그리고 죽은 장사의 몸이 금의위들을 덮치려 할 때 측면에 있던 금의위들을 해치워 버렸다.
이 순간 높은 담벼락 위에서 싸우던 금의위는 뜰 안으로 퇴각을 한 상태였고 십여 명의 검은 옷을 입은 자들에게 공격당하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은 상경성에서는 보기 힘든 곡도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지근거리에 있는 스물 몇 명에 달하는 금의위를 지독하고 철저하게 해치워 나갔다. 이에 금의위는 수적으로 우세였는데도 이들을 막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이 금의위를 공격하는 모습은 심해 상어가 물고기를 사냥하기 위해 에워싼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한데 몰린 물고기가 상처 입고 피를 흘리자 상어가 그것들을 먹어 치우기 시작하고 이내 깨끗하게 처리해 버린 것만 같았다.
담무는 대장군의 양아버지가 아직 이 안에 있어 마음이 조급했다. 남쪽 사람들이 전해 준 소식에 따르면 요 며칠 궁에서도 누군가를 이동시키는 것 같은 기미는 없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에 그가 오른손을 휘둘러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가운데 무공이 가장 높은 고수 셋이 앞으로 나와 건물 안을 향해 나아가며 금의위를 해치우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나 줄어들었지만 금의위가 느끼는 압박감은 여전했다. 검이 빛을 내고 지나갈 때마다 핏방울이 튀었고, 그중에는 팔이 잘려 나가고 가슴이 터져 피가 흥건한 바닥에 고꾸라지는 이들도 있었다.
높은 나무 위에서 모든 국면을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던 범한은 이렇게 일방적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비록 언빙운이 계획한 이번 급습이 술 가게 성회인를 통해 상삼호와 신양 쪽으로부터 만족해한다는 답변을 받기는 했어도 범한은 언빙운만 아는 금의위의 다음 수가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담무도 이렇게나 순조로울 리 없음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