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범한은 요 며칠 두 차례 입궁했다. 두 나라가 개국 이래 처음 맺는 혼사이기에 범한을 포함한 그 누구도 태만하게 처리할 수 없어서였다. 그사이 범한을 기쁘게 해주는 일도 있었다. 북제 황실의 압박으로 심중과 장영후가 드디어 머리를 숙인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양국의 특무 기관이 ‘내년 북방 화물의 비정상 통로 수입에 대한 이익 분배 및 구체적인 조치’에 관해 초보적인 구상을 내놓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조치로 가장 큰 이득을 얻게 되는 사람은 당연히 감찰원 및 황실 금고를 물려받게 될 중요 인물, 즉 범한이었다.
그런데 사실 범한을 기쁘고 안도하게 한 건 단순히 양국 간 조치가 체결되어서가 아니었다. 그에게도 향후 계획을 위해 돈은 필요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도모하는 것에 비하면 밀수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적었다. 대신 이번 조치 체결로 신양 쪽은 밀수 통로를 바꾸어야 하니 그만큼 수출 물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곧 신양 쪽의 수입 감소로 이어질 게 뻔했다. 그러면 결국 장 공주 세력은 약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니 범한은 이 점에서 가장 기뻐하고 있었다.
장 공주는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일어났는데도 좌시하고 있었고 범한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바로 범한이 상삼호와 협력해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소은을 구출해 내기를 그녀가 바라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장 공주의 이런 행동은 뜻밖에도 자신의 이익보다 경국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처럼 보여 범한은 그녀의 이타적인 행동이 놀랍고 이상했다.
요 며칠 동안 언빙운의 총괄 능력은 최고조로 발휘되었다. 그가 내놓은 방안들은 간단하면서도 안전하고 적절했다. 그러면서도 북쪽에 잠복해 놓은 경국 첩자들의 안전을 최대한으로 보장하고 있어 범한을 절로 감탄하게 했다.
경국에는 여러 계통의 밀정이 있었다. 그중 언빙운이 지휘하고 있는 계통은 암첩(暗谍)이라 불렸다. 기름 가게 주인장, 왕부와 고위 관료들 사이에 잠복해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관리들까지 있었다.
그리고 명첩(明諜)이라 불리는 이들도 있었다. 바로 수수 거리의 장사꾼, 각 군과 지역에 있는 남쪽에서 온 행상들이 그런 경우였다. 이들은 주로 장사하면서 첩보 활동을 했으며 천하를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정보를 경국까지 전달하는 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요 며칠 곳곳에 있던 명첩들과 암첩들이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1년 동안 동면해 있던 첩보망이 깨어나 짧은 시간 안에 강대한 첩보력을 발휘했다.
범한 쪽에서는 준비를 끝냈고 이제 상삼호가 움직여 줄 차례였다.
범한과 언빙운이 가벼운 마음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범한이 찬바람이 쌩쌩 도는 언빙운을 잠시 바라보더니 말을 건넸다.
“언빙운 대인, 당신은 명색이 나의 부하예요. 그러니 날마다 그런 인상 쓴 얼굴 좀 그만 보여 주면 안 되나요?”
“저는 아첨이나 하는 부하가 아닙니다.”
언빙운은 싸늘하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범한은 보일 듯 말 듯 살짝 웃고 말았다. 범한은 이자가 네 해 동안 북제에 잠복해 있으면서 여러 모습으로 활동해 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왕족과 귀족들 사이를 오가면서도 해상 무역상 집안의 막내아들 ‘재주꾼 운’이 경국에서 보낸 밀정의 우두머리란 사실을 예측 못 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니 교제 능력도 뛰어날 게 뻔했고 넓은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춤도 멋지게 출 줄 알 터.
그런데도 자신을 이리 냉랭하게 대하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란 걸 범한은 알고 있었다. 바로 자신을 목표를 갖고 접근해야 할 인물이 아닌 상사로 보고 있어서였다.
“북제 쪽은 확실히 멍청하네요.”
범한이 차를 마시고는 말을 이어 갔다.
“언빙운 대인을 이리 일찍 석방해 준 것도 그렇고 사신단 내부에서 안전하게 며칠 보내도록 한 것도 그렇고요. 만약 나였다면 사(師) 직위의 사람을 열 명 준다고 해도 안 내보내 줬을 겁니다.”
이는 전생의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 주석의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그러니 언빙운은 그 말을 듣고도 아무런 감흥도, 감동도 받지 않았다.
“어쩌면 경국 조정에서 소은으로 저를 교환할 걸 예상했을지도 모르죠. 원래 충분히 멍청한 사람들이니까요.”
언빙운은 경국이 자신을 소은과 교환한 사실만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답답했다.
“한데 북제가 소은을 돌려받아도 크게 쓸모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죽일 생각을 하는 건 더 바보짓이지요.”
그러자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 누군가 이런 말을 했어요. 나라는 사람과 같은 거라 영원히 완전하게 움직이는 기계는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라는 종종 통치자의 감정 변화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북제 황실에서 의견 대립이 있는 건 단지 고하 국사의 빛이 너무 강해서예요. 그래서 소은을 다시 구금하게 된 거죠. 그러니 상삼호가 소은의 양아들만 아니었다면 감히 황실의 결정을 흔드는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범한 대인께서는 왜 그러셨죠?”
언빙운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북쪽으로 오는 내내 분명 소은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자를 풀어 주셨지요. 그런데 또 대인은 상경에 있는 자를 구하려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구한 다음에는 또…….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이상합니다.”
범한은 그냥 웃기만 했다. 그는 소은이 지닌 비밀을 절대 다른 누구에게 말해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번 일과 관련된 과정들이 갈수록 황당하고 웃겨 보이게 되었을지라도 말이다.
범한은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언빙운에게 설명했다.
“장기를 두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돼요. 최종적으로는 상대방의 왕을 죽이는 건 같아요. 하지만 병(兵)과 졸(卒)은 각기 다른 과정을 거치고 서로 다른 길을 사용하잖아요. 그사이 얻게 되는 이익도 달라지는 거지요.”
만약 범한이 무도하강에서 소은을 죽였다면 당시 그가 버리려던 ‘졸’을 산 채로 귀국시키는 건 고사하고 영원히 ‘신묘의 위치’도 알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이에 범한은 감찰원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소은을 구출할 때 장기판에서 자주 등장하는 압박 작전인 ‘핍궁격(逼宫局)’을 쓸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길을 돌아감으로써 진평평 원장도 얻지 못했던 이익을 얻기를 바라고 있었다.
“소은이 탈옥하지 않으면 금의위도 죽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상삼호는 군 내부에서 명망이 높으니까요.”
“소은, 그 늙은 괴물은 어째 살아 있어도 불쌍하네요.”
범한이 탄식을 하며 말을 이어 갔다.
“아무래도 늙으면 옛날로 돌아가지 못하는군요.”
“직접 나서시라고 건의한 적 없습니다.”
언빙운이 범한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만약 고하가 나선다면 대인이 살아오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범한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소은이 간직한 비밀이 섣불리 다른 사람에게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려면 범한이 직접 모험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범한은 천천히 찻잔을 두드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장기를 두는 사람처럼 어설프게 장기짝을 움직이는 동작을 취했다. 장기판 양쪽에 앉은 쪽은 당연히 노련하고 용의주도한 사람들이었다. 한데 막상 고하와 장 공주, 황태후와 상삼호를 놓고 비교하자니 범한으로서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개구쟁이에게는 장기판을 엎어 버리는 용기 말고는 다른 재능이 없었다.
* * *
문서 작업이 모두 끝나자 사신단과 북제 조정은 동시에 한시름 놓고 마음 편히 연회를 즐겼다. 하지만 범한만은 예외였다. 고요한 상경성에서 유달리 이상해 보이는 일이 일어나고 있어서였다. 바로 옥천하강 양안을 따라 발생한 몇 건의 수상한 살인 사건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끔찍한 방화로까지 이어져 며칠 동안 북제 사람들이 사랑하는 옥천하강을 붉게 물들였다.
범한은 이 살인 사건들 뒤에 숨겨진 무언가를 잘 알고 있었다. 1년 동안 동면 중이었던 경국의 정보 요원들이 행동을 개시하자 금의위 진무사 지휘사인 심중이 그 낌새를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래서 군중 속에 숨어 있던 금의위도 격렬했지만 적절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이에 예전에 언빙운이 깔아 놓은 연락책도 이번 살인 사건으로 인해 일부 손실되었을 수도 있었다. 타국에서, 그것도 상대방의 바로 코앞에서 큰 거래를 하려 했으니 상대가 아예 모르도록 하는 건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때문에 4처가 북쪽에 설치해 놓은 첩보망이 여러 조각으로 찢어지기는 했어도 그 바람에 경국의 첩보망이 북제 금의위에게 파헤쳐져 너무 많은 거점이 밝혀질 염려는 오히려 없었다.
밀정들이 죽어 나가자 언빙운의 표정은 갈수록 어두워져 갔다. 감찰원 4처가 상경에 보낸 밀정 수는 겨우 열일곱 명뿐. 그런데도 장 공주와 소은 때문에 이리도 큰 희생을 치르자 언빙운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범한은 언빙운을 위로하기는커녕 무언가를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계속 술이나 마시고 쾌락을 좇고 향락을 즐기며 기녀를 찾았다.
* * *
북제 천보 6년, 6월 초엿새는 숫자 ‘6’이 연이어 있는 길일 중에서도 대길일이었다. 범한은 전생 서양에 있었던 ‘666’과 악마에 관한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한없이 안정적이고 믿음이 충만한 손길로 옷깃을 여몄다.
그는 몸에 지닐 무기와 약물 등을 신경 써서 분류하고 제자리에 넣었다. 우선 허리끈 안에 그리고 몸에 달라붙는 내의에 물건들을 넣었다. 또한 왼 팔뚝 아래에는 한꺼번에 세 발이 발사되는 쇠뇌의 화살을 넣었고다. 그리고 감찰원 3처에서 비밀리에 제작한 연막 약품은 오른쪽 손목에 단 손가락 마디 크기의 주머니에 넣었다.
이어 범한은 탁자 위 어슴푸레한 불빛 아래 놓여 있는 금속 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환약 세 알이 있었다. 붉은색, 초록색, 흰색으로 그냥 보기에도 괴상했고 어떤 이상한 일들이 떠오를 정도였다.
붉은색 환약은 크기가 작지 않았다. 약 냄새가 많이 사라진 상태라 어떤 재료로 만들었는지 냄새로는 알 수 없었다. 이는 범한의 몸에 흐르는 패도의 기를 걱정한 비개가 꽤 여러 해 전에 준 것이었다. 범한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이 용의 눈알같이 생긴 환약을 허리끈 안에 넣었다.
이어 범한은 나머지 환약들을 바라보다가 소리 내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생각을 바꾸어 그것들을 전부 가져가기로 했다. 어쩌면 무공 최고수인 그 종사를 만날 수도 있으니 목숨을 지켜 줄 물건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환약을 감춘 후 범한은 코를 비틀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머릿속이 흥분되면서 체내 패도의 기가 남들보다 넓은 경맥을 타고 급속히 운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신의 모공이 활짝 열리고 있는지 없는지 모를 천지간의 원기를 탐욕스럽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연한 마황 나뭇잎 향기가 더해지자 범한은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다.
범한은 개조해 모양이 바뀐 호위 장도를 탁자 위에서 집어 들고는 묵직하게 전해져 오는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그런 후 장도를 등 뒤에 끼워 놓고 꺼내기 쉽도록 방향과 각도를 잡은 후 천을 이용해 등에 고정했다. 다리에도 검은색의 가느다란 비수를 숨겼다. 한데 이 비수는 다년간 사용해 몸과 혼연일체가 된 터라 범한은 특별히 이 비수를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왕계년이 들어와 범한에게 인사부터 했다. 그리고 범한의 귓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였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고 탁자 위에 남겨 놓은 몇 가지 기물들을 눈으로 훑어본 후 왕계년에게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왕계년이 난처하게 웃었다.
“제 솜씨가 대인보다 훨씬 못합니다.”
그러자 범한이 질책했다.
“내가 화장한 모습을 본 적 없잖아요. 그런데도 나보다 솜씨가 떨어진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는 겁니까? 게다가 예전에 여러 나라를 오가던 큰 도적이었다면서 분장도 할 줄 모른다고요?”
“저 벽 너머 있는 사람은 대인께서 화장을 해주신 겁니까?”
왕계년이 슬그머니 아첨을 떨기 시작했다.
“이런, 옆에 있는 저도 못 알아볼 정도도 대단한 솜씨이십니다. 하관이 보기엔 대인의 솜씨는 인간 세상에 떨어진 신선의 경지이십니다.”
“아무 말이나 막 던지는군요.”
범한이 긴 의자에 앉고는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경도 근처 야선묘에 가면 진흙으로 만들어진 신선상이 있어요. 그들도 전부 나보다는 잘생겼을 겁니다.”
낯짝이 두꺼운 한 사람과 그보다 낯짝이 더 두꺼운 한 사람, 이렇게 두 사람은 대충 아무 말이나 지껄이며 주고받았다. 그 바람에 범한은 남아 있던 긴장감을 놓아 버릴 수 있었다. 왕계년은 범한의 최측근이지만 창주성 밖 추적과 최근 정보 연락책이 된 것 말고는 그다지 활약한 게 없었다. 한데 다행히도 만담꾼 보조 정도의 재주는 있는 터라 범한의 마음을 한결 편하게 만들어 주는 데는 도움이 되고 있었다.
왕계년이 작은 칼을 들고는 범한의 눈썹을 깎았다. 그런 후 물에 개어 놓은 석회를 탁자 위에서 가져다가 범한의 얼굴에 발라 보수하기 시작했다. 한데 석회의 점성과 색상이 제사 대인의 얼굴 피부와 차이가 많이 나자 그가 자기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옥수숫가루를 쓰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 어디에서 구합니까? 어제 어느 관리 집에 숨어들어 가 아낙들이 쓰는 연지분을 훔쳐 왔는데 효과가 꽤 괜찮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