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그리고 동시에 대체 황제 폐하의 생각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이 둘의 혼인은 분명 경도를 수비하는 섭가와 2 황자를 하나로 묶어 놓은 것이었으므로 ‘설마 황제가 정말로…… 황태자를 바꿀 생각인 건가?’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범한은 깜짝 놀란 상태였지만 낯빛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그런 그가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런데 그 일과 본관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겁니까?”
임문은 말할 차례를 놓칠세라 아첨하듯 웃었다.
“범한 대인, 축하드립니다. 폐하의 성지에는 귀댁의 아가씨께서 어질고 현명하고 정숙하고 덕이 있으며, 재능과 식견까지 뛰어나니 정왕 세자이신 이홍성 님과의 혼사를 내리셨…….”
* * *
귀댁의 아가씨라고? 범한은 망연자실해 살짝 멍한 기분이었다. 귀댁이면 어디야? 범한은 한참 후에야 다시 정신이 돌아왔다. 설마 약약이를 말하는 거였어? 누이동생 약약이 이홍성에게 시집을 간다고?
“안 돼!”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자 범한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한번 힘껏 털었다.
옆에 있던 관원들은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범한 대인이 누이동생의 혼사 소식을 듣고 이리도 강한 반응을 보일 줄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이들에게 “범한 대인, 축하합니다.”란 말은 정말로 진심에서 우러나 한 말이었다.
범한의 아버지 사남 백작 범건은 호부 상서로 경국의 돈과 식량을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범한은 감찰원 제사로 폐하의 명으로 재상의 딸과 결혼했으며 그의 처는 모두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감히 입에도 올리지 못하는 신분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사남 백작가의 아가씨마저 폐하의 명으로 당당한 신분인 이홍성과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 다시 말해 조정에서 이만큼 성은을 입은 집안은 없었다.
그런데도 범한 대인의 반응은…… “안 돼!”라고?!
범한은 순간 자제력을 잃었다. 그런데 얼핏 주변 사람들이 놀라는 게 보여 잠시 어리둥절해졌다가 금세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웃고는 말했다.
“그거야 안 될 일이지. 이홍성, 고 녀석은 날마다 청루로 놀러 다니니 이 손위 처남에게 좋은 술을 수백 번 가져다 바쳐도 내 누이동생을 고 녀석에게는 줄 수는 없지!”
범한은 상황을 잘 포장해서 넘겼다. 다른 관원들도 백작가와 정왕부가 교분이 깊고 범한과 정왕 세자 역시 절친한 친구 사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범한이 하는 말이 정말로 농담처럼 들렸다.
관원들이 웃기 시작하며 서로 한마디씩 했다
“범한 대인께서 농담을 하셨네!”
“경도로 돌아가신 후에는 정왕부에 찾아가 폐를 끼쳤다고 말씀하실걸!”
“범한 대인을 따라가서 정왕 세자께 좋은 술이나 제대로 얻어먹고 와야겠구먼!”
범한도 얼굴 가득 기쁜 기색을 하고 다른 관원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누이동생이 곧 시집을 가게 돼 기뻐하는 오라비의 모습이었다.
* * *
모두 물러나자 범한은 홀로 조용히 후원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대들보 옆에 서서 남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낀 먹구름 사이로 별이 빛나고 있었다.
누이동생이 시집을 간다. 누이동생이 시집을 간다고!
범한은 실눈을 뜨고 겹겹이 둘러싸인 구름 사이에서 가끔씩 희미하게 빛나는 별을 바라보았다. 두려움이 밀려오고 머릿속에는 온통 ‘누이동생이 시집을 간다’는 말과 그 일만 떠올랐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범한은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란 걸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담주에서 어린 꼬마에게 백설 공주 이야기를 해줄 때부터 그 꼬마가 언젠가는 시집을 갈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담주에서 경도에 있는 누이동생에게 서한을 보낼 때에도 몰라보게 자란 어린 낭자가 언젠가는 한 남자에게 시집을 갈 것이란 걸 가끔씩 떠올리곤 했다.
훗날 경도에 도착해 지혜를 지니고 오라비를 스승처럼 여기며 존경심을 보이는, 차가운 표정의 다 큰 아가씨를 만났을 때도 범한은 언젠가는 누이동생이 시집을 갈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범한은 소리 내어 웃으면서도 그녀가 평범한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면 분명 괴로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범한이 자신의 처지를 알았을 때부터인 것 같은데 그의 무의식이 누이동생의 혼인 문제를 생각하는 걸 애써 거부하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처럼 꾸미고 찾아온 황제가 유정강 강가 찻집에서 남매와 이야기를 나누며 나중에 그녀에게 좋은 혼처를 구해 주겠노라 했을 때 범한은 누이동생의 혼사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었다.
하지만 일이란 건 사람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범한이 혼례를 치르자 범약약의 혼사도 자연스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된 것이었다.
마음이 어지러워진 범한은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대들보를 툭툭 치고 있었다. 누이동생의 혼사 문제에 관해서는 애당초 이 오라비가 꼭 좋은 신랑감을 찾아 주겠노라 자신만만하게 공언해 왔던 터였다. 한데 막상 일이 터지고 나니 지금까지 자신의 행동은 헛짓거리에 불과했다.
그리고 언제나 정신이 맑은 범한이었건만 지금은 머리가 멍하기만 했다. 머릿속에 무수한 선들이 꽂히는 통에 숨조차 쉬기 힘들고 생각이란 걸 할 수 없었다.
손바닥으로 대들보를 치는 소리가 후원 안에 작게 울려 퍼졌다.
“거참, 시끄럽네!”
싸늘한 목소리가 복도 끝에서 전해져 왔다.
범한이 소리 내어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요동치는 마음 탓에 자신이 후원에 와 있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후원에는 아직도 변함없이 냉랭한 언빙운이 지내고 있는데 말이다.
“대인, 오늘따라 마음이 어지러우신가 봅니다.”
언빙운이 그에게 관심을 보인 건 아니었다. 단순히 습관적으로 모든 생각을 숨긴 채 다른 사람에게는 해탈한 듯 때 묻지 않은 모습만 보여 주는 감찰원 제사가 오늘 저녁에는 왜 이리 한숨을 쉬어 대는지 궁금한 것뿐이었다.
범한은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눈을 거두고 잠시 생각해 보더니 입을 뗐다.
“누이동생이 시집을 가게 됐습니다.”
“사남 백작가의 아가씨 말입니까?”
언빙운이 조용조용 말을 이어 갔다.
“경도에서 재능이 뛰어난 여인으로 유명하던데 그러니 폐하께서 혼처를 정해 주신 거군요.”
“네. 미래 매제가 정왕 세자 이홍성이랍니다.”
그러자 언빙운이 말했다.
“경도 젊은이들은 세자께서 대인의 누이동생을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습니다.”
범한은 깜짝 놀랐다.
“그랬습니까? 그런데 왜 나는 모르고 있었죠?”
“대인과 정왕 세자, 두 분의 교분이 좋다고 들었습니다. 황실 사람들을 제외하고 혼처를 찾는다면 조정 내 신하 중에서는 사남 백작가를 따라올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귀댁과 정왕부가 연을 맺게 된 것이지요. 하관, 대인께 경하 인사를 드립니다.”
범한은 언빙운의 쌀쌀맞은 경하 인사에 무언가 악독한 의미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이에 살짝 고개를 갸우뚱한 채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경하할 일은 맞네요.”
“한데 기쁜 일을 앞두고 대인께서는 왜 근심이신 겁니까?”
범한이 잠시 웃다가 말했다.
“홍성은 내 친구이니 자연히 그의 성정을 좋아해요. 한데…….”
범한은 어깨를 으쓱이다가 말을 이어 갔다.
“자주 놀잇배를 드나드는 방탕한 세자가 매제가 된다고 생각해 봐요. 오라비라면 누구든 걱정할 겁니다.”
언빙운이 작게 두 번 기침하고는 조소하듯 말했다.
“설마 범한 대인께서는 한 번도 청루에 가보신 적 없다는 겁니까?”
그러자 범한은 미소 지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만 했다. 오늘은 기분이 조금 이상해 더 이상 언빙운과 입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방에는 불도 켜지 않은 데다 하필 하늘에는 별도 몇 개 보이지 않아 후원에는 어둠만 깔려 있었다. 범한은 고개를 돌려 밤의 어둠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언빙운의 냉담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생각나 불쑥 질문을 던졌다.
“내 누이동생을 처로 맞이할래요?”
* * *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언빙운이 황당한 질문을 던진 제사 대인을 호되게 꾸짖었다.
범한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탄식했다.
“그렇네요. 언빙운 대인은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이니 여인을 사랑하는 법을 어찌 알겠습니까.”
언빙운은 대꾸조차 하기 싫었다.
범한이 언빙운을 바라보았다.
“심 낭자와의 일은 어찌 마무리 지을 겁니까? 멀쩡한 규수를 꾀어 내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심중이 살생을 하지 않는 자도 아니고요.”
그러자 언빙운의 얼굴이 서리가 내린 듯 차갑게 변했다. 하지만 예리한 범한에게는 드디어 처음으로 상대방의 눈에서 그를 침울하게 만드는 것을 찾아내는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범한은 언빙운이 조근조근 말하는 걸 듣고만 있었다.
“저는 범한 대인 같은 음탕한 사람이 아닙니다. 심 낭…… 저와 그녀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범한도 언빙운과 심 낭자가 이제는 평생 만나지 못하고 멀리서 서로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처지란 걸 알고 있었다. 비록 언빙운이 이 과정에서 감정이 움직였는지는 범한으로서 알 수 없었으나 사랑에 눈먼 여인을 생각해 언빙운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범한은 다시 약약의 혼사를 떠올리게 되었고 어렴풋하지만 슬퍼졌다. 사실 사람들 말이 옳았다. 누이동생이 이홍성에게 시집가는 건 황자 중 하나에게 시집가는 것보다 훨씬 좋은 일이었다. 그러니 범한은 기뻐해야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도무지 기쁘지 않았다.
사실 범한은 자기가 무얼 원하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가 자신만만했다가 씁쓸하게 박수 쳐주게 되는 것 같은 일은 처음 겪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실은 별것 아닌 부분들에서 이처럼 처음으로 반응이란 걸 하게 되자 마음속 깊이 숨어 있어 의식하지도 못했던 바람들이 드러났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범한이 복도에 함께 있던 언빙운에게 말했다.
“심 낭자는 언빙운 대인에게 시집갈 방도가 없지만 만약에라도, 그러니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 가능성이 있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저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은 생각조차 않습니다.”
언빙운이 냉담하게 대답했다.
범한은 잠깐 웃다가 복도를 떠났다. 언빙운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고독하고 호리호리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세 건의 혼인은 그냥 별개의 사소한 일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범한이 분명하지 않은 가능성을 떠올리며 가끔씩 온몸에 오한이 든 듯 몸서리를 치며 할 말을 잃는다는 걸 알지 못했다. 게다가 이역만리에서 유일하게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오죽 아저씨는 실종에 가까운 상태이니 범한에게는 약약의 혼사 건으로 어디 한 군데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세상에 다른 이들과 이야기 나누지 못할 일은 없다지만 이번 일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 눈에 비친 범한 대인은 기분 좋아 보였고 벌써 사신단의 귀국 방침을 마련하는 중인 것 같았다. 이에 관원들은 범한 대인이 경도로 돌아가 누이동생의 혼사를 준비하기 위해 그리고 겸사겸사 혼사 후 있을 조정의 이익 배분을 앞서 챙기기 위해 서두르는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평온하고 유쾌한 범한이 일찌감치 동생의 혼사 때문에 받은 충격에서 벗어나 오래전부터 계획해 놓은 일들을 차근차근 실행해 나가고 있다는 건 아무도 몰랐다.
이는 언빙운이 해준 말 덕분이었다. ‘불가능한 일은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언빙운의 말을 범한은 어느 정도 옳다고 여겼다. 그런데도 범한은 여전히 만약 약약이 시집가기를 원한다면 오라비로서 동생의 위신을 한껏 세워 준 채 즐겁고 행복하게 시집가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홍성이 2 황자를 황태자로 추대하는 일을 꾸미고 있다면 자신은 약약을 위해서라도 정왕부의 안녕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약약이 시집을 가길 원하지 않는다면 그런 생각은 완전히 바뀌게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게 되자 범한은 평정을 되찾은 것이었다. 아니, 적어도 겉으로는 평정심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