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길을 나선 범한은 가는 도중에 손에 들고 있던 기름을 처리해야 했다. 한데 거리에 있는 거지에게 줄 수도 아무 데나 버릴 수도 없었다. 감찰원이 정한 밀정의 행동 준칙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 중 하나가 적의 능력을 얕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진무사 지휘사 심중이 비 오는 날 밤 청루에서 강인한 면모를 제대로 보여 주지는 못했어도 그래도 범한이 보기에 그것은 완벽히 위장된 모습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기름을 조심스럽게 처리했다.
기름 주전자를 깔끔하게 처리한 후 범한은 사신단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들어섰다.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행인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상경의 옥천하강(江)에 놓인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 범한은 비옷 안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닦아 냈다. 아가씨들이 바르는 연지분을 전부 닦아 내자 손바닥에 노랗고 붉은 연지분이 가득 묻어났다.
범한은 무지개다리 위 사자 석상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그러자 손바닥에 뭉쳐 있던 연지분 덩어리는 물속으로 떨어져 물에 섞이며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다리를 건너고 골목을 지나 어느 민가를 끼고 돌아 나갈 무렵 범한은 본연의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리고 비옷을 벗고 긴 옷을 다시 뒤집어 입으니 아까 해당타타와 헤어질 때처럼 맑고 때 묻지 않은 외모의 범한으로 돌아와 있었다.
* * *
범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목에 힘을 주고 사신단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문 맞은편에서 연신 차를 들이켜고 있던 금의위가 이상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이에 범한은 자신을 미행하던 세 사람의 사망 소식이 벌써 심중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갔지만 금의위는 말도 못 한 채 속으로만 삭이는 중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도 범한은 저들에게 보복당하는 일까지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사신단 거처에서 가장 조용한 곳은 후원이었다. 긴 처마 아래에는 언빙운이 좁고 낮은 침대에 몸을 반쯤 누인 채로 있었고 침대 위에는 포근한 목화 이불이 잔뜩 쌓여 있었다. 비록 범한에게 치료받기는 했어도 1년 동안 당한 고통을 단시간에 회복하기란 불가능했다. 그의 몸은 여전히 상처투성이였고 어딘가에 닿는 걸 견디지 못했다. 이에 다행히 날도 크게 덥지 않아 범한이 내놓은 방법에 따라 언빙운은 푹신한 목화 이불에 파묻혀 지내는 중이었다.
이 냉정한 경국의 밀정 우두머리는 지금 심신이 모두 지친 상태라 휴양이 절실히 필요했다. 하지만 범한은 민망할 정도로 계속해서 그를 성가시게 했다. 북제에 머무는 마지막 며칠 동안 범한에게는 언빙운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오늘 있었던 일과 관련해 서로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난 뒤였다. 언빙운이 범한의 두 눈을 어두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대인께서 흔적은 안 남기셨길 바랍니다. 자칫했다가는 우리 수하들이 전부 노출될 테니까요. 그러니 대인이 감찰원 제사이기는 해도 저는 대인을 조사해야 합니다.”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빙운 대인이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이번 연락책 말고도 많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한데 통로를 하나만 이용하면 안전하기는 해도 효율은 많이 떨어집니다. 그러니 다른 일과 관련해서도 언 대인은 사람들을 움직일 방법을 생각해 둬야 해요. 그리고 내게는 처리할 시간이 거의 없어 왕계년을 연락책으로 쓸 생각인데 대인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언빙운의 눈에서 이상한 빛이 번뜩였다. 눈앞에 있는 감찰원 내 가장 젊은 고위 관료가 요 며칠 규칙은 말로만 지키겠다고 하고 장점이라곤 자기 의견을 듣는 것뿐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오늘 북쪽에 깔아 놓은 밀정의 첩보망을 바꾸겠다고 말하는 걸 보니 확실히 능력은 있는 사람 같아 보여서였다.
“왕계년이면 저도 마음이 놓이는데…….”
언빙운이 잠시 고민을 해보더니 말을 이어 갔다.
“감찰원에서 최근 북쪽에 잠복시켜 놓은 사람들이 있는데 왕계년 대인도 그중 한 사람이니까요.”
범한은 왕계년이 일찌감치 밀정 일을 하고 있는 줄 예상도 못 하고 있던 터였다. 이에 머리가 잠시 멍해져 언빙운이 하는 말을 계속 듣고만 있었다.
“대인의 계획대로라면 우리는 상삼호와 함께 소은의 소재지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찰원 사람이 너무 깊숙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범한이 언빙운의 요청에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북쪽에 잠복시켜 놓은 사람들이 조정의 내부 분란으로 희생을 치르지 않기를 바라는 언빙운의 마음을 범한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범한이 다짐했다.
“염려 말아요. 내게도 생각은 있으니까요.”
언빙운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상삼호는 수사자 같은 사람이라 애석하게도 상경이라는 깊은 바닷속에서 그에게 힘을 보태 줄 이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장 공주께 도움을 구한 것이지요. 신하 된 입장으로 대인과 제가 장 공주의 뜻에 따르는 건 당연지사일 겁니다. 하지만 대인께서는 생각을 잘하셔야 합니다. 상삼호가 직접 나서서 소은을 구하면 그때는 황태후와 심중이 군부의 힘을 제거하는 날이 될 테니까요.”
범한은 겉보기에 냉정한 이 감찰원 관원이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꿰뚫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소리를 낮췄다.
“그야말로 내가 바라는 바입니다. 심중이 상경을 통제하는 능력을 얕잡아 보지 말고 그냥 그들끼리 싸우도록 내버려 두려고요. 어쨌거나 우리 경국 입장에서는 아무런 손해가 없는 거잖아요.”
후원에서 나온 범한은 왕계년을 불러 임무를 내렸다. 왕계년은 범한이 일러 준 숫자를 정확히 기억했다. 그리고 향후 며칠 동안은 자신이 위험하고도 중차대한 일을 맡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기름 가게의 늙은 주인장이 아닌 범한의 심복 중 심복으로 과감하게 질문을 던졌다.
“일, 삼, 일, 사, 오, 이, 칠, 칠, 칠……. 대인, 숫자들이 무언가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일생(一生) 일세(一世) 오~ 이 몸은 쩐이 좋아! 쨍그랑, 쨍그랑.”
말을 마친 범한은 살짝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담주 사투리로 돈을 쩐이라고도 불렀는데 범한은 여기에서 착안해 암호를 만든 것이었다.
* * *
기름 가게의 늙은 주인장은 요 며칠 장사가 잘되어 기름을 몇 통이나 팔았다. 그러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정보들이 1년 동안 잠잠했던 감찰원 4처 북방사의 첩보 연락망을 타고 상류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제에서 이런저런 모습의 평민으로 위장하고 있던 밀정들이 1년 후에나 착수하게 될 첫 임무를 수령하게 되었다.
그러자 다시 정보들이 각종 경로를 통해 모이기 시작했고 몇몇 끊긴 연락망들은 통합된 후 최종적으로 장가점의 기름 가게로 모였다.
그동안 경국 사신단 사람들은 몇 차례 연회를 열었다. 그때마다 술은 더 많이 필요했고 수수 거리의 술 가게 주인 성회인도 사신단이 머무는 거처에 자연스레 몇 차례 오가며 범한에게 아첨을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범한으로부터 신양 쪽과 상삼호가 줄곧 원하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사신단 거처에서는 많은 정보를 처리했고 그 정보 중에 유용한 것들은 분석을 거쳤다. 마지막으로 상대적으로 정확한 결론을 내리는 일은 언빙운이 맡아 처리했다. 이에 요 며칠 동안 후원 쪽에서는 언빙운의 기침 소리가 자주 들려왔다.
범한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대신 사신단의 정사였으므로 술을 마시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마중하는 게 그의 업무였다. 그러다 하루는 해당타타와 함께 궁에 들어갔다. 그녀가 며칠 전 그에게 전해 준 황태후의 상담 요청 때문이었다.
범한에게 술을 마시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언제나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는 적국의 황태후와 술을 마시는 건 그에게는 전혀 고생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신단으로 돌아갔을 때 모든 관원 및 부하들은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가 기분 나쁜 상태란 걸 알 수 있었다.
방 안에서 범한이 임정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 사신단에서 내가 정사입니까, 아니면 임정 대인이 정사입니까?”
임정이 살짝 긴장하며 대답했다.
“범한 대인,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사신단은 당연히 범한 대인을 따라야 합니다.”
“네, 네, 네.”
범한은 두어 번 소리 내어 웃고는 임정을 질책했다.
“그렇다면 어디 임정 대인이 이야기를 좀 해보시죠. 오늘 입궁했을 때 북제의 황태후께서 왜 북제 큰 공주마마를 우리 1 황자마마께 시집보내겠다는 이야기를 꺼내셨는지 말입니다. 이건 중차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북제에 온 후로 정사인 내가 그 일을 모르고 있던 겁니까. 홍려사와 태상사에서는 그동안 공주의 혼인 문제를 다 정해 놓았을 텐데 왜 나는 오늘에서야 귀국길에 공주를 데려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느냔 말입니다!”
임정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작 그 일로 화를 낸 거냐는 생각에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대인, 그 일로 하관과 임문 대인을 질책하시면 안 됩니다. 사신단에서는 그저 우리 황태후마마의 친필 서한을 북제 황태후께 전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하관으로서는 알 길이 없지요. 두 마마님께서 서한으로 따님의 혼사를 정한 거니까요. 그러니 궁에서 그런 일이 들려온들 저희로서는 할 말이 없지 않겠습니까? 이 일은 원래 대인께 통지를 해드렸어야 하나 그동안 대인께서는 사신단에 계신 날이 별로 없어 말씀드릴 때를 놓친 것뿐입니다.”
임정이 눈을 굴려서 보니 젊은 대인이 화가 좀 난 것처럼 보였다. 이에 웃는 얼굴로 편지를 건넸다.
“공식적으로 국서가 곧 도착할 것입니다. 이는 조정에서 보낸 밀서입니다. 황제 폐하와 황태후마마의 입장이 표명되어 있고, 당연히 이번 혼사를 바라신다는 내용으로……. 사실 여기에는 또 다른 경사스러운 일이 담겨 있습니다. 범한 대인,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헛소리, 다 헛소리!”
범한은 생각할수록 이런저런 일들이 떠올라 열불이 났다. 그리고 언제 진평평 원장의 말버릇을 배웠는지 비웃으며 욕하고 있었다.
“무슨 짠지나 잔뜩 먹어 놓고 싱겁다고 투정하는 것도 아니고, 원! 우리 같은 심부름꾼들이 피곤해 죽겠는 건 생각도 않고!”
임문은 깜짝 놀랐다. 방금 범한이 대역무도한 짓을 범했다는 생각에 그가 서둘러 저지했다.
“조정 일에는 조정의 규칙이 있듯 황실의 일은 황실만의 법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인께서는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혼사가 어처구니없는 일인 것 같기는 해도 각국 조정에서 서두르는 걸 보니 모두가 원하는 국면인 것 같다고 범한은 생각했다. 반면 양대 강국으로 불리는 남쪽의 경국과 북쪽의 북제가 혼사로 맺어진다면 한쪽 구석에서 은근슬쩍 비웃는 것밖에 못 하는 소국의 황제들에게는 기분 상하는 일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들 중에서도 가장 골치 아파하는 쪽은 사고검이 지키고 있는 동이성일 테고.
“그렇지, 방금 내게도 기쁜 일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범한은 가을 초엽에 경도에서 혼례를 치르게 될 1 황자와 자기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몰라 인상을 찌푸렸다.
사촌지간인 임정과 임문은 서로를 바라보며 키득키득 웃다가 입을 열었다.
“대인께서 조정에서 보낸 서한을 직접 보시면 알 겁니다.”
관례에 따르면 조정에서 서한이 왔을 때 정사가 자리에 없다면 부사인 임정이 대신해서 볼 권한이 있었다.
“두 분, 어서 말해 보세요!”
범한은 미간을 문질렀다. 이유 없이 불안감이 들고 그 느낌이 갈수록 강해졌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임정이 대답하고는 미소 지었다.
“1 황자마마의 혼사가 정해진 후 2 황자마마의 혼사도 함께 정해졌습니다. 폐하의 성지로 2 황자마마와 경도 수비대장 섭씨 가문의 섭령아 아가씨의 혼사가 정해졌고 혼례는 내년 봄에 올린다고 합니다.”
범한은 살짝 놀라 음,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호숫가에서 자신을 사부라고 부르던 어린 여인이 혼례를 올린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2 황자는 만나 본 적 있었다. 그는 독서와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분수에 맞지 않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섭령아가 2 황자에게 시집을 간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불쑥 그녀가 걱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