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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95화 (195/1,108)

195화

장가점은 원래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따라 비가 여러 차례 내리다 말다 반복하자 가뜩이나 사람 없는 거리는 유난히 더 휑했다. 하지만 기름 가게는 누구든 기름이 떨어지면 찾아오게 되어 있어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었다. 때문에 기름 가게 주인장은 오늘따라 가게 앞이 더 한산하다고 해서 조급해하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게 밖에 긴 의자를 내다 놓고는 멍하니 앉아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줄기를 감상했다.

어쩌면 주인장이 늙어서일수도 있을 것이나 가게의 젊은 일꾼은 최근 한 해 동안 주인장이 예년에 비해 멍하게 지내는 날이 부쩍 늘었다고 느끼는 중이었다.

“주인장, 기름 사러 왔소이다.”

누군가가 문 앞에 서서 점포 밖을 흐릿하게 비추고 있는 햇빛을 가로막았다. 늙은 주인은 손짓으로 그에게 가게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러자 손님은 비 모자를 벗어 수수한 얼굴을 드러내고는 잠시 웃었다. 그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막 하품하고 있던 일꾼에게 말했다.

“여보게, 기름 사러 왔네.”

일꾼이 빙그레 웃었다.

“어떤 기름을 사시렵니까? 종려나무 기름 말고도 새로 들어온 동쪽산 유채 기름도 있습니다.”

일꾼은 손님에게 공손히 대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우리 가게에 온 거면 당연히 기름 사러 온 건데 무슨 군소리가 이리도 많아!’라고 구시렁댔다.

손님이 점원에게 말했다.

“종려나무 기름 반 근 주게.”

그러자 일꾼이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재빨리 통에 든 기름을 저울에 올렸다. 그리고 기름 사러 온 사람의 양손이 빈 걸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손님, 어디에 담아 가시렵니까?”

“여기에 주전자가 있는가?”

“있지요. 나무 주전자는 하나에 석 문(三文)입니다.”

일꾼은 물건 하나를 더 팔게 되자 기분이 들떴다. 그런데 손님은 기름이 든 주전자를 건네받은 후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일꾼이 궁금한 생각에 질문을 던졌다.

“뭐, 더 필요하신 게 있습니까?”

“향유도 있는가?”

* * *

“향유도 있는가?”

손님이 크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가게 밖에 앉아 있던 주인이 긴 의자에서 잠시 비쩍 마른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일꾼이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우리 가게에는 그런 고급 물건은 없습니다. 장가점 안에서 향유를 먹을 만한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까?”

점원이 말하고 있는데 주인장이 느긋하게 계산대로 걸어왔다. 그리고 손짓으로 일꾼을 내보내며 환한 미소로 손님을 바라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향유는 너무 비쌉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나 쓰는 것이라 일반인 중에는 사는 이가 없어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날까지는 아직 반년이나 더 남았고요. 그러니 저희 같은 작은 가게에서는 그 물건을 들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손님이 웃으며 물었다.

“하늘에 제사 지낼 때 말고도 사람에게 제사 지낼 때 써도 되지요?”

그러자 주인장은 아까보다 훨씬 더 공손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필요한 양을 말씀해 주시지요. 저희 가게에서는 물건을 대신 구해다 드리기도 하니까요.”

대화 내용이 중요한 대목에 이르자 두 사람 모두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기억력이 정말 좋은 사람인지 손님은 많은 내용을 빠른 속도로 똑똑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7근 329전 4호…… 종려나무 기름을 사려 합니다.”

주인장이 주판을 튕기더니 난색을 표했다.

“가격에 조금 문제가 있네요. 그러니 손님, 내실로 들어가 다시 얘기하실까요?”

“그것도 나쁘지 않군요.”

늙은 주인장은 일꾼에게 바깥을 지키고 있으라고 분부하고는 손님을 데리고 뒤쪽에 자리 잡은 내실로 들어갔다. 이제야 손님이 기름을 사러 온 게 아니라 기름을 팔러 온 것이란 걸 눈치챈 일꾼은 혀를 내밀었다. 그리고 방금 향유를 팔러 온 손님에게 자신이 잘못한 게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 *

향유를 팔러 온 상인은 당연히 변장한 범한이었다. 주인장을 따라 내실로 들어온 범한은 접선 장소라는 게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햇살이 맑고 가득히 비추고 있어서였다.

주인장은 차를 내오지도, 인사말을 하지도 않은 채 범한의 두 눈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늙고 혼탁한 눈에는 세밀함과 신중함이 엿보였다. 주인장이 말했다.

“손님께서는 남쪽에서 오셨나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장이 무언가를 요청하는 손짓을 해 보였다. 범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언빙운이 만들어 놓은 절차가 살짝 번거로운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내 기억하고 있던 다른 숫자들을 읊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분 확인을 마친 주인장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소매 안에 감춰 두었던 칼을 꺼내 손 옆에 두었다. 독이 묻어 있는 칼이다 보니 주인장은 이것을 소매에서 꺼낼 때 손을 벌벌 떨었다. 범한은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제국의 밀정이라면 이 늙은 주인장은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자결하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방금 상황은 왜 언빙운이 생포되어 줄곧 굴욕감을 느끼고 있었는지를 알려 주는 이유이기도 했다.

주인장이 범한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대인, 감찰원에서는 어느 직책에 계십니까?”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렇게 떠들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주인장이 소리 내어 쓴웃음을 지었다.

“벌써 1년입니다. 꼬박 1년 동안 상부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했습니다. 우두머리께서 잡혀 가신 후 조정에서 후임자를 파견하지 않아 조정이 우리에게 침묵기로 들어갈 준비를 시키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침묵기’란 적국에 잠복해 있는데 첩보 체계에 틈이 생기면 곧장 모든 활동을 중지해 정보 유출을 막는 걸 의미했다. 이때 기간은 한 달이 될 수도 아니면 10년이 될 수도 있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우두머리인 언빙운이 붙잡힌 사건은 원래 양국 첩보전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희박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언빙운 자체는 정보를 지니고 귀국하거나 직접 위험한 일들을 알아보고 다닐 필요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장 공주는 그런 언빙운을 적국에 넘겨 감찰원이 북쪽에 깔아 놓은 모든 첩보망을 마비시켰다.

언빙운이 줄곧 북제 사람들 손아귀에 있으니 조정과 감찰원에서도 하위 밀정들에게 연락하는 모험을 감행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공백기가 생긴 것이었다.

“한 해 동안 활동을 멈춘 것 때문에 몸이 녹슬어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대인, 염려 마십시오.”

주인장은 앞에 있는 사람이 언빙운 대인의 후임이라면 분명 감찰원에서도 대단한 인물일 거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상대방의 몸에서 어렴풋이 피비린내가 풍겨 오자 주인장은 조심스레 대답했다.

“대인,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세 가지입니다. 급히 할 것과 천천히 할 것이 모두 있습니다.”

범한은 자기 앞에 있는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은 이 노인과 그 밑에 있는 정확한 인원수를 알 수 없는 감찰원 밀정들이 한 해 동안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돌아갈 집이 없어 정처 없이 떠도는 고아처럼 말이다. 이에 범한은 말을 할 때 일부러 더 부드럽고 편안하게 하려 노력했다.

“가장 시급히 할 일입니다. 곧장 소은이 갇혀 있는 곳을 알아내 주세요. 두 번째는 황태후와 황제 사이가 틀어진 진짜 이유를 조사해 주세요.”

북제 황제와 관련해서 범한은 줄곧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범한에게 북제 황제는 배가 불러도 너무 부른 사람에 불과했다.

주인장은 이 두 임무가 모두 매우 어려운 일인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가만히 세 번째 명령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렸다.

“소은의 일이 빨리 처리해야 하는 거고, 황궁의 일은 천천히 해도 됩니다.”

범한이 망설이다가 말을 이어 갔다.

“세 번째 명령은 내 생각엔 주인장께서 알고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황실 금고에서 최근 북쪽에 밀수를 했습니다.”

그러자 늙은 주인장이 실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 잠시 이상한 광채가 번쩍하고 스쳤다.

“그 건은 신양 쪽 일인데 대인, 감찰원에서 드디어 손을 쓰기로 결정한 것입니까?”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조사를…… 확실하게 해주세요. 그런데 그들의 털끝 하나도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은 모두 통제해야 합니다. 나중에 감찰원에서 손을 쓰려 할 때 우리가 쥐고 있는 것이 그 밀수 통로를 깨끗이 쓸어 버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주인장은 이미 이 건도 천천히 해도 되는 장기적인 임무란 걸 알고 있었다.

범한은 임무를 내려놓고 잠시 다른 생각을 했다. 최 공자 일은 장모가 자신을 시험해 보려 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할 게 있어 잠시 참고 있는 것인지 자신으로서는 알 수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글 종이 사건과 광신궁 침입 사건이 범한의 소행임을 신양 쪽에서는 모르고 있다고 해도, 형부 법정에서의 충돌로 장 공주와 범한 간의 대립은 이미 점차 수면 위로 떠 오르고 있었다.

“대인께는 어떻게 알려 드려야 할까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한데 범한은 애당초 언빙운이 수하들과 어떻게 몰래 연락을 취했는지 아는 게 없었다. 이에 감히 경거망동할 수 없어 소리를 낮춰 말했다.

“두 달 안에는 특정 집행자가 상경에 오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과 연락할 사람을 파견할 예정이기는 합니다.”

그러자 주인장이 살짝 걱정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대인, 부디 신중하십시오. 소은이 잡혀 있던 스무 해 동안 북제의 금의위가 북위의 근위병보다 형편없어졌다고는 해도 그래도 대인은 적국에 와 계시는 중입니다. 그러니 아랫사람 관련 일들은 제가 알아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주인장이 한 말은 감찰원이 1년 동안 미루고 또 미루며 북쪽에 보낸 ‘고아’와 감히 연락할 수 없었던 이유다. 이에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내가 보낼 사람은 감찰원에서도 가장 추격하기 힘든 작자니까요.”

그 작자는 의심할 여지 없이 바로 왕계년이었다. 그는 평생 다른 사람을 뒤쫓기만 하고 절대 미행당해 본 적이 없어 이 분야에서는 보기 드문 인재였다.

여기는 오래 머물 곳이 못 되었다. 이에 몇 마디를 더 나눈 후 범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말했다.

“접선 암호를 바꾸었습니다.”

“네, 대인.”

주인장이 미소 지으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일, 삼, 일, 사, 오, 이, 칠, 칠, 칠.”

“네, 대인.”

얼핏 듣기에 아무런 규칙도 없어 보이는 숫자를 주인장이 다시 한 차례 암송했고 그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만족한 범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에서 나왔다. 이어 그는 여느 손님처럼 주인장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종려나무 기름 두 주전자도 잊지 않고 챙겼다. 그런데 손님이 나가자 일꾼이 농담하듯이 말했다.

“주인어른, 향유를 그렇게나 일찍 들이시려고요?”

주인장이 가게의 유일한 일꾼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 큰 건이지 않냐.”

일꾼은 ‘이런 싸구려 기름 가게에서 배를 몇 척이나 굴리는 동이성 기름 장사꾼처럼 크게 장사를 하겠다고?’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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