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194화 (194/1,108)

194화

다른 운치 있고 깨끗하고 자그마한 방에 맑은 향이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차와 찻잔이 어우러져 빚어낸 호박색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을 편안히 해주었다.

“왜 내게 사리리를 만나게 해준 거죠?”

차를 낸 탁자를 가운데 두고 가부좌를 틀고 앉은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속세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던 그의 얼굴에 드디어 번뇌가 드리워졌다. 소은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느라 열심히 계획을 짜고 있는 중에 갑자기 사리리라는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내가 아까 언빙운에 대해 말했었죠?”

해당타타가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범한 대인이 세상 사람들처럼 바보 멍텅구리인지 알고 싶어서 한 말이었어요.”

“바보 멍텅구리라는 말 자체가 참으로 신기하고 황당하네요.”

“범한 대인은 《석두기》를 본 적 없나요?”

해당타타가 조금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범한은 속으로만 끙, 하고 소리 냈을 뿐 해당타타의 질문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쓴웃음을 지으며 다른 말을 했다.

“해당 낭자, 무언가 오해를 한 것 아닙니까? 사리리는 내가 직접 압송해 온 범인이에요. 협의 조건이었을 뿐이라고요. 나와 그녀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단 말입니다.”

“대인, 내 뜻을 오해했군요.”

해당타타가 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어 갔다.

“오늘 대인을 이 누추한 곳에 잠시 안내한 건 대인에게 도움을 청할 게 있어서예요.”

“무슨 일입니까?”

범한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해당타타가 미소 지었다.

“사실 지난번 폐하께서 범한 대인을 황궁에 부르셨을 때 고민하고 계셨던 일입니다.”

범한은 그녀를 잠깐 바라보았다. 해당타타는 평범한 외모였지만 사람에게 친근감을 주는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호기심에 대꾸했다.

“분명히 그때 폐하께서는 자신의 고민을 해당 낭자가 모르도록 하고 싶어 하셨어요.”

해당타타가 왼손으로 오른손 소매를 잡았다. 그런 후 오른손 두 손가락으로 작은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폐하께서 처음에는 분명 나에게는 알리고 싶어 하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그분의 고민은 나와 여러 해 정을 나눈 좋은 친구예요. 더군다나 북제 조정에서 그분의 고민을 풀어 줄 사람은 나를 포함해 몇 안 되고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범한은 북제 젊은 천자의 고민이 무엇인지 이미 추측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조정 안팎으로 사리리의 입궁을 크게 반대하는데 귀국의 황제께서는 왜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시는 건가요? 현 상황을 보니 사리리가 해당 낭자의 거처에 기거할 수 있는 것도 잠시뿐이고 또 황태후께서도 그녀의 입궁을 불허하실 것 같은데요.”

“범한 대인은 이 일 이면에 말 못 할 속사정이 있다고 의심하는 건가요?”

“네. 나는 황실 사람들에게는 소위 감정이란 게 없다고 믿거든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범한은 자신이 너무 심하게 말한 것 같아 기분이 은근히 안 좋았다.

해당타타는 깜짝 놀라 가만히 범한만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 후 그녀가 다시 입을 뗐다.

“황제도 사람이에요. 게다가 남녀의 일인데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요?”

범한은 전생 황제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쩌면 당나라 현종은 다른 부류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양귀비도 마외파에서 홀로 죽었다.

“범한 대인은 이미 혼인을 했군요.”

해당타타가 무의식중에 꺼낸 것처럼 말했다.

그녀의 말에 살짝 놀란 범한은 문득 집에 두고 온 처 생각이 났다. 그리고 경묘 향로 앞에서의 첫 만남도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행복에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해당타타는 범한의 표정에 주목하더니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범한 대인 부부가 금실이 좋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방해한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범한은 눈썹만 씰룩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기와 완아 사이에 감히 끼어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자는 분명 죽기를 자처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자 범한은 젊은 황제의 감정을 차츰 이해하기 시작했다. 비록 범한과 사리리는 협의에 따라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한데 황제가 좋아하는 대상이 사리리라니 범한에게 그 점은 여전히 의외였다.

이번 자리는 해당타타가 청한 것이기는 했지만 사실은 범한도 바라던 바였다. 만약 사리리가 입궁할 수 없게 된다면 경국의 감찰원만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단지 범한으로서는 상대방이 왜 자신을 찾아온 건지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던 것뿐이다.

해당타타가 말했다.

“조정에서 폐하 편에 서서 사리리를 궁으로 들이려는 사람은 없어요. 대인은 잘 알 거예요. 리리가 남쪽에서 지녔던 신분이 조금 문제가 될 거란 걸요. 그리고 결국 신분 문제 때문에 나도 이번 일에서 발언권이 없어요.”

범한이 냉소를 띠었다.

“당신들, 북제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에요.”

그러고는 되물었다.

“설마 나라고 발언권이 있는 줄 알아요? 나는 외국 사신일 뿐입니다. 이번 일은 무도하강을 건넌 순간부터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란 뜻이에요.”

해당타타가 미소 지었다.

“폐하와 나는 그저 범한 대인의 지혜를 빌리고 싶은 것뿐이에요.”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손으로 흐트러진 정수리 쪽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쓸어내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해당 낭자는 저를 정말로 아끼시는군요.”

해당타타가 평온하고 조용하게 말했다.

“아무 명성도 없던 범한 대인은 불과 1년 만에 천하가 주목하는 시선이 되었어요. 그리고 경국 조정에서 실권을 쥔 큰 인물로 성장했죠. 그러니 대인에게 지혜가 없다고 말한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겁니다.”

“방도를 생각해 보죠. 한데 그 방도가 먹힐지는 장담 못 합니다.”

범한이 찻상 위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냉정하게 말을 이어 갔다.

“관건은 황태후마마예요. 황태후께서 원치 않으시면 그 어떤 방법을 써도 실패할 거예요.”

그러자 해당타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살며시 몸을 굽혀 인사했다.

“먼저 고맙다는 인사부터 하겠습니다.”

“이제 보니 낭자와 사리리 사이에 정이 꽤 깊었군요.”

말을 마친 범한도 몸을 굽혀 예를 갖춰 인사하고는 다시 차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훗날 제가 낭자께 도움을 청한다면 오늘 일을 떠올려 주기 바랍니다.”

그러자 해당타타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본국 조정과 관련된 일만 아니면 약속 못 할 것도 없지요.”

이에 범한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십시오. 낭자께 부탁할 일은 영원히 없을 거예요. 혹시라도 부탁할 일이 생긴다면 우리 경국 내부의 문제 때문일 것이니 낭자가 평생 추구하는 자연의 도를 그르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면 다행이고요.”

범한의 설명에 해당타타는 부담감이 조금 줄어들었다.

* * *

범한은 경국 조정의 정사이므로 상경에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북제 조정의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이는 양측의 외교적 사무와 관련해 일종의 묵계이자 관습처럼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범한에게는 자유롭게 행동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해당 낭자와 산책을 한 덕분이었다. 해당 낭자는 금의위라는 쥐새끼들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걸 대놓고 싫어했다. 그래서 범한과 우산을 함께 쓰고 동행하는 동안에도 한가하게 마음 내키는 대로 걷는 척하며 따라붙은 이들을 모두 떨쳐 버렸다. 물론 금의위는 해당타타에게 대놓고 적의를 드러낼 만큼 용기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범한은 두 사람을 뒤따라왔을 거라 믿고 있었다.

두 낭자가 기거하는 기묘한 작은 사당에서 나온 후 범한은 허리를 쭉 폈다. 그러다가 길거리에 늘 보던 금의위가 정말로 없자 기쁜 마음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에 범한은 모퉁이로 난 좁은 골목길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아직 개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상쾌한 바람은 가지 끝에 맺힌 빗방울이 그의 얼굴 위로 떨어져 미끄러져 내리도록 했다.

사리리와 황제 일을 생각하면 범한은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었다. 하지만 방금 해당타타가 꺼낸 화제 때문에 만 열일곱에 불과한 남자의 마음은 송두리째 경도로 돌아가 처와 누이동생 곁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고향 생각이 간절해진 범한은 가슴 가득 훈훈했다.

골목 입구에 어떤 행인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 행인은 큰 짐수레를 밀고 있었고 일하는 가게에 서둘러 가기 위해 지름길을 이용하는 중이었다. 범한은 햇살처럼 아름답고 따스한 웃음을 지은 채 느긋하게 골목 입구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커다란 짐수레가 범한의 뒤쪽에서 다가왔다. 수레가 몸을 스치고 지나가려 할 때 범한은 손목을 젖혔다. 그러자 순간 손바닥에 숨어 있던 검은색 비수가 횡으로 날았다.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힘들게 일하는 척하던 밀정의 목구멍에 비수가 꽂혔다. 차가운 칼날이 살을 파고 들어가자 미행자는 즉사했다.

잠시 후 범한은 넘어진 수레를 밟고 있다가 그림자처럼 골목 끝으로 옮겨 가 손가락 사이에 끼워 둔 독침을 누군가의 가슴팍 혈 자리에 꽂아 넣었다. 이어 왼손을 괴상하게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에 끼워 넣더니 쇠뇌의 화살 세 발을 한꺼번에 날려 겁에 질려 있는 또 다른 사람을 죽였다.

그런 후 범한은 아까 독침에 찔려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사람의 경추를 손으로 으스러뜨려 버렸다. 범한은 곧장 옷을 벗어 뒤집어 입고 비 모자로 햇살처럼 따뜻하게 생긴 얼굴을 가려 버렸다. 그러고는 죽은 사람 몸에서 쇠뇌의 화살을 뽑아 들고 골목에서 걸어 나갔다.

작은 사당에서 나온 후로 줄곧 세 사람이 범한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들이 금의위 소속 밀정인지 아니면 북제 황궁 사람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범한은 오늘만큼은 그 누구도 자기 뒤를 쫓는 걸 허용할 수 없었다.

미행자 셋을 없애 버린 범한은 자신을 쫓는 이가 더 이상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다음 행동에 들어갔다. 골목에서 나온 후에는 마차에도 올라타지 않았다. 혹시라도 누군가와 접촉하게 된다면 이는 곧 북제에게 단서를 남기는 꼴이 되어서였다.

축축하게 젖은 거리에 행인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범한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타국 백성들 사이로 숨어들어 그들의 엄호를 받으며 걸었다.

감찰원의 미행 방지 수칙에 따르면 범한은 지금 포목전 같은 곳을 찾아 들어가야 했다. 그런 후 포목전 뒷문으로 나가 몇 차례 길을 돌아 나간 후 목적지로 향해야 했다. 하지만 범한은 그 수칙을 따르지 않았다. 우선은 자기 뒤를 밟는 사람이 없다고 확신해서였고 다음으로는 길을 너무 많이 돌아가게 되면 그만큼 접촉하게 되는 사람이 늘어나 외려 발각될 위험이 커져서였다.

그리고 대체 거기에는 왜 간 건지는 모르겠으나 범한은 도중에 어느 관리의 저택으로 몰래 숨어 들어갔다. 그런데 때마침 하늘에서 비가 다시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본디 소리는 없지만 형체는 있는 것이라 범한의 행적을 제법 잘 감추어 주었다.

* * *

상경의 성 남쪽에는 기녀 양성소인 교방이 있었고 그 부근에는 장가점이라고 부르는 평민 거주지가 있었다. 이곳에는 착한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뒤섞여 살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치안 상태가 좋아지고 생활이 편리해지자 점점 많은 사람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자기 자본이 별로 없는 소규모 행상 중에도 가진 돈을 긁어모아 좌판을 깔고 장사하기 시작한 이가 늘었다.

이곳은 수수 거리와 달리 가격이 싼 일상용품만 팔았다. 그러니 이곳 물건은 수수 거리 것보다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동쪽으로 향하는 길목의 세 번째 점포도 바로 그런 곳 중 하나였다. 여기에서는 동이성에서 가져온 외국산 종려나무 기름을 팔았다. 가격은 쌌지만 맛은 괜찮았다. 하지만 색상이 별로인 데다 특히나 겨울에는 하얗게 침전물이 생기는 바람에 돈깨나 있는 부호들은 차라리 북제 동쪽에서 생산되는 유채 기름을 샀다.

한데 다행히도 장가점에서는 여윳돈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이 기름 가게는 현판을 내건 것도 아닌데 그럭저럭 장사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람을 많이 고용할 형편은 안 되어 나이 많은 주인장과 일을 도와주는 일꾼 정도가 다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