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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92화 (192/1,108)

192화

그사이 황후의 남동생, 즉 지금의 장영후가 황궁 한구석으로 난 하수구 구멍으로 기어 나갔다. 그런 후 금의위 심중과 몰래 접촉해 황실에 충성하는 연합 세력을 구축하고 반역자들을 죽인 후 황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로써 위태로웠던 북제 상경의 국면은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고하는 이 일과 관련해 그 누구도 추궁하지 않았다. 황후 역시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에 황궁을 겁박했던 왕족과 귀족들은 당시에는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후 자연스레 험한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어쨌든 지금 황태후가 된 황후가 안정적으로 황궁에 있을 수 있는 진짜 이유는 모두 고하라는 한 사람의 명망과 그자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실력 덕분이었다.

* * *

“고하, 정말 미쳤네!”

범한이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다.

“혼자서 천군만마를 막아 내다니 천만이 덤벼도 거뜬하겠어. 대단해. 실로 대단해!”

언빙운은 범한의 말투가 너무 저속해 그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4대 종사에게 너무 존경심을 드러내지 않는 것 같아 몇 마디 했다.

“고하는 4대 종사 중 한 분으로 초월적 존재이십니다. 그분이 나서면 그 누구라 할지라도 꺼리게 되는 거죠.”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궁을 에워싸고 있던 바보들이 동시에 화살을 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고하도 어쩌지 못했을 거예요.”

“그때 고하는 피의 맹세를 했습니다. 누구든 감히 용좌에 앉는다면 당장 죽여 버리겠다고 말이죠.”

언빙운은 순간 감찰원의 제사 대인이 조금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어 갔다.

“고하처럼 무서운 실력자라면 여기 북쪽 천하에서는 누구든 죽이고 싶다면 그냥 죽여 버렸을 겁니다. 그리고 용상에 궁둥이만 살짝 걸쳐도 곧장 몸에서 머리가 분리될 판인데 그런 황제를 누가 하고 싶었겠습니까?”

“대종사라…….”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난생처음 초월적 실력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성가시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범한 대인은 젊고 장래가 유망하니 대종사도 별거 아닌 걸로 보이십니까?”

언빙운이 냉담하게 범한을 쳐다보았다.

범한은 아무런 말 없이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다. 천하 4대 종사 중 직접 만나 본 건 섭류운뿐이었다. 그때는 섭류운의 노랫가락이 정말로 듣기 좋다고만 느꼈을 뿐이다. 그리고 명성은 없는, 그런데도 그들 4대 종사와 동등한 실력을 지닌 오죽 아저씨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터라 그는 섭류운에게는 전혀 마음의 동요란 게 일지 않았었다.

“상경에 관해서 계속 얘기해 줘요.”

그런데 범한은 손을 들어 잠시 먼저 말하고 넘어가겠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만약 황태후가 고하의 말을 듣는다면 고하가 소은을 죽이려 드는 거니…….”

언빙운이 중간이 끼어들었다.

“대인은 왜 고하가 소은이 죽기를 바란다고 단정하시는 겁니까?”

“나에게도 나만의 정보원이 있습니다.”

범한은 웃기만 할 뿐 해당타타와의 일과 신묘의 비밀에 대해서는 쏙 빼놓고 말을 이어 갔다.

“그렇다면 상삼호는 황제에게 붙어서 황제와 연합한 사람들의 힘을 모아야 늙은 소은의 목숨을 지킬 수 있을 테고……. 언빙운 대인, 대인이 보기에 우리가 그 속에서 이득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언빙운이 고개를 가로젓다가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미소를 지었다.

“실력으로 치면 북제는 약자가 아니었습니다. 최근 네 해 동안 저 역시 수없이 많은 걸 봐왔으니……. 하지만 우리 경국과 비교한다면 북제는 영원히 승기를 잡을 수 없을 거라 믿습니다.”

범한은 그가 왜 갑자기 그러한 결론을 내렸는지 이해가 안 돼 살짝 의아했다. 한데 언빙운은 기분 좋게 웃기 시작하며 말을 이어 갔다.

“조정이 소은을 북제로 돌려보낸 것만 봐도 요 1년 동안 북제 황태후와 황제 사이에 겨우 유지되던 균형과 평화에 균열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하관은 정말로 감탄했습니다. 그러한 계획을 세운 분에게 말이죠.”

소은이 귀국할 수 있게 만든 인물은 장 공주였다. 그래서 범한은 차분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냉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범한이 말했다.

“그다지 감탄할 거리가 못 됩니다. 그 거래의 대가가 대인 본인이었다는 걸 안다면 말이죠.”

“무슨 뜻입니까?”

언빙운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자 범한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장 공주마마께서 언빙운 대인을 직접 북제 조정에 넘기셨습니다. 그런 후 상삼호와 짜고 소은을 북제로 돌려보냈고요. 소은 때문에 북제 조정에 풍파가 조금 일기는 했는데 대인은 그 파도가 대체 얼마나 커질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대인은 높은 분들에게 휘둘리는 장기판의 장기짝에 불과했어요. 아무리 장기짝이라고 해도 자각이란 걸 해야지요. 대인처럼 자기 머리를 쥐고 있는 손에게 감탄하는 사람을 보면 정말이지 이해가 안 갑니다.”

묘하게 사람을 자극하는 말이었다. 범한이 언빙운의 마음에 장 공주에 대한 미움의 씨앗을 심으려 일부러 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예상과 달리 언빙운의 얼굴은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여전히 평온하기만 했다. 오히려 계속 범한에게 훈수하는 말만 했다.

“이번 일에 우리가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소은의 생사를 고하가 쥐고 있는 이상 사신단은 타국에 있는 입장이니 끼어들 능력도, 끼어들 필요도 없는 겁니다.”

“언 대인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범한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내게 다른 일이 하나 더 있는데 듣고 의견을 주었으면 합니다.”

범한은 최 공자와 있었던 일을 언빙운에게 말했다. 그러자 언빙운은 또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물었다.

“대인께서는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범한은 한동안 침묵했다. 한데 말문이란 건 일단 열리면 자연스레 계속 말하기 마련이다.

“감찰원의 의견을 따르면 신양이 북쪽에서 얻는 이익을 점차적으로 축소해야 합니다.”

“감찰원의 의견이요?”

언빙운이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며 소리를 낮췄다.

“제사 대인께서 내년에 황실 금고를 관리하게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러자 범한은 못 들은 척하며 미소 지었다.

“언빙운 대인은 감옥에 반년이나 갇혀 있었는데도 소식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네요.”

* * *

오랜 침묵이 흐른 후 언빙운이 문득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 일을 왜 저와 논의하시는 겁니까?”

“북쪽 노선들은 대인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요. 나중에 첩보망을 거두어들이는 날이 온다 해도 그래도 지금부터 바짝 주시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언빙운 대인께서 떠나고 나면 내가 북쪽에서는 아무런 힘도 없어서입니다.”

언빙운이 차분히 말했다.

“범한 대인께서는 하관을 너무 대단하게 보시는군요.”

“언빙운 대인이 단순히 환자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범한이 냉정하게 말을 이어 갔다.

“언빙운 대인이 그걸 바라신다면 여전히 북쪽을 호령하는 인물로 남아 있을 수 있으리라 믿거든요.”

“제가 왜 대인을 도와야 합니까?”

“내가 대인의 상사니까요.”

범한의 낯빛이 점점 싸늘해졌다.

“지금 언빙운 대인에게 도움을 구하는 게 아닙니다. 함께해 주시길 요청하는 겁니다.”

언빙운은 이 식상한 말에 넘어가지 않고 싸늘하게 웃었다.

“제사 대인께서 감찰원을 제대로 이어받는 날 다시 얘기해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요.”

범한이 웃기 시작하더니 손사래까지 치며 말했다.

“이런 장난이 안 통하리란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범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 갔다.

“사실 매우 간단한 이유에서입니다. 장 공주마마는 우리의 공동의 적이거든요. 그러니 나만 언빙운 대인이 필요한 게 아니라 생각해 보면 언빙운 대인에게도 내가 필요하답니다.”

언빙운은 더 생각해 보지도 않고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툭 까놓고 말하겠습니다. 제사 대인의 계획은 처음부터 제대로 잘못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 거죠?”

“만약 장 공주마마의 밀수로 벌어들이는 이익을 차츰 줄여 나갈 작정이라면 심중을 찾아가서는 안 되었습니다.”

“심중은 금의위 진무사의 지휘사로 줄곧 북쪽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찾아가지 않는다면 대체 누구를 찾아가야 했나요?”

언빙운이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심중과 장영후, 이들은 모두 황태후의 측근으로 그들과 장 공주마마의 거래는 이미 여러 해 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만약 다른 방도를 생각 중이라면 왜 젊은 황제는 찾아가시지 않은 겁니까?”

범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황제의 생각을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

“북제 황제는 순수해서 쉽게 흥분하는 사람입니다.”

언빙운이 당부하듯 손가락 하나를 들더니 설명을 이어 갔다.

“순수한 급진파에게는 은자를 써야 합니다.”

범한이 언빙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잠시 후 입을 뗐다.

“언빙운 대인의 말을 믿겠습니다.”

“지금은 저를 믿으셔도 됩니다.”

언빙운이 맞받아쳤다.

한 시름 놓은 범한이 언빙운의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 말아요. 지금 세계는 저들의 것이지만 결국에는 우리 것이 될 겁니다.”

말을 마친 범한이 방을 나섰다. 자신의 이상한 말을 곱씹고 있는 언빙운을 뒤로한 채.

* * *

그 후로 연속 사흘 동안 사신단은 북제와의 외교 사무를 처리했다. 한편 그사이 범한은 언빙운과 함께 은밀히 계획을 세웠다. 언빙운 역시 더는 숨기는 것 없이 자신이 쥐고 있던 정보들을 범한과 함께 분석하면서 향후 행동 방향을 결정했다.

신양 쪽과 마찬가지로 북제 황태후 쪽도 시간 끌기 작전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편이 낫다고, 어떻게든 황궁 쪽과 접촉해 볼 필요는 있었다. 이에 범한이 상삼호 대장을 찾아가 봐야겠다고 했다가 언빙운에게 싸늘하게 저지만 당했다.

언빙운은 그런 일들 때문에 상삼호 대장을 직접 찾아갈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직접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범한이 상경에 와서 한 일은 그의 전문가적 안목으로 봤을 때 그야말로 엉망 그 자체였다.

이에 범한은 입 다물고 언빙운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런 일에서는 자신이 언빙운보다 확실히 뒤처진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한담을 나눌 여유가 생기자 범한은 북제 밀정의 첩보망을 재정비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언빙운은 범한의 능력에 확신이 서지 않아 자신이 지니고 있던 밀정들의 정보를 계속 혼자만 꼭 쥐고 있었다.

하루는 식사 후 범한이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심 낭자는 매우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언빙운 대인이 사신단에 숨어 있는 걸 알고는 또 찾아오다니 말입니다.”

그러자 언빙운은 찬바람이 이는 얼굴로 몰인정하고 담담하게 답했다.

“심중에게 알리십시오. 자기 딸 일이니 그가 직접 처리할 것입니다.”

범한은 언빙운을 잠시 쳐다보았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젊은 관원이었다. 대체 어떤 수련을 했기에 마음이 이다지도 냉정하고 몰인정한지 문득 궁금해졌다.

경국의 사신단이 안정을 찾아 가고 있을 무렵 다른 세력들은 애가 타기 시작했다. 술집 주인 성회인은 자주 술을 들고 찾아와 납작 몸을 낮추며 신양 쪽의 의중을 전달했다. 심중도 범한을 몇 차례 초대했다. 그런데 범한은 상대방이 신경질조차 낼 수 없는 적절한 핑계를 둘러대며 초청을 거절했다. 그런데도 장영후는 빈정이 상해 입꼬리를 축 늘어트리고 울상을 지은 채 몇 번이나 심중을 다그쳤다.

장 공주와 상삼호 간에 어쩌면 어떤 협의가 있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신양 쪽은 북제에 굳게 뿌리를 내린 상태도 아니어서 시종일관 감찰원의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범한의 설득 끝에 언빙운이 그의 계획에 동의했고 네 해 동안 깔아 놓은 밀정들의 첩보망을 움직일 준비를 했다.

남쪽에서 날아든 소식에 따르면 경국 조정은 겉으로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건 감찰원 보고서에 있는 최근에 산동로 쪽에서 발생한 수상한 살인 사건 몇 건뿐이었다. 살인범이 죽인 건 일반 백성이었다. 한데 그 행위와 수법이 너무나도 흉포하고 잔인했다. 원래는 형부에서 처리해야 했지만 줄곧 해결을 하지 못한 터라 지금은 감찰원 4처가 이어받아 처리하고 있었다.

범한은 이 살인 사건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언빙운 역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상경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고 지금 두 사람은 어떤 일을 준비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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