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191화 (191/1,108)

191화

“비개가 누구입니까?”

“감찰원에 비씨 성을 가진 사람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대인께서 말한 자가 혹시 비 노인입니까?”

“바로 그 늙은 괴물입니다.”

범한은 모든 조치를 마치자 사람을 시켜 따뜻한 물을 떠 오도록 했다. 그 물에 깨끗하게 손을 씻고 물기를 닦아 내고는 언빙운에게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너무 오랫동안 고문을 받아 심맥이 다친 상태입니다. 그러니 무공 실력이 회복된다고는 해도 크게 손상되어 있을 거예요.”

말을 마친 범한은 상대방의 표정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한데 언빙운의 얼굴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평온하기만 했다. 범한은 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리고 냉담해 보여도 기실 오만하기 그지없는 젊은이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겠노라 결심했다.

“귀국하면 몸조리부터 해요. 치료를 못 할 정도는 아니니까요. 뽑힌 손톱은 다시 자랄 테고 어긋난 뼈는 7처 대머리에게 다시 부러뜨리도록 한 후 내가 치료해 주겠습니다. 그러니 진평평 원장 대인처럼 절름발이가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범한은 농담을 하고 있는데 언빙운은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감찰원 사람들과 천하에 숨어들어 있는 밀정 중 그 누구도 자기 옆 사람에게 진평평 원장을 감히 절름발이라고 부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언빙운이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이 마치 사건 뒤에 있는 진상을 꿰뚫어 보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예를 들어 이렇게나 젊은 범한이 왜 벌써 감찰원 제사가 되었느냐와 같은 것 말이다. 바로 이때, 무언가 후끈한 느낌이 그의 가슴을 훅 치고 올라왔다. 그는 의지가 매우 강한 사람이었지만 느닷없이 밀려드는 통증에 눈썹 꼬리 부분이 움찔했다.

“괜찮습니다. 독을 몰아내는 중이에요. 오랫동안 몸 안에 있던 독이 무엇인지 몰라 조금 독한 약을 썼습니다. 하나 내가 옆에 있으니 죽지는 않을 겁니다.”

범한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처럼 언빙운에게 옷을 입혀 주었다.

“참아요.”

언빙운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통증이 극심했는지 잔뜩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염병할, 중독됐을 때보다 더 힘들군요. 대체 무슨 약입니까?”

그러자 범한은 기뻐하며 언빙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바닥까지 쳐가며 감탄했다.

“언 형이 그런 욕도 할 줄 알다니! 그랬었군요. 대체 누구에게 보여 주려고 그런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겁니까? 북제 금의위 앞에서는 멋진 척해도 되지만 내 앞에서는 그런 수는 쓰지 말아요. 어려서부터 지겹도록 봐왔답니다.”

범한이 어릴 적부터 지겹도록 봤다는 건 멋진 오죽 아저씨를 두고 한 말이었다.

“해독하는 방법은 누구에게 배우셨습니까? 저로서는 대인이 미덥지 않습니다.”

약을 바른 상처 부위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오자 언빙운이 싸늘하게 던진 질문이었다.

“이미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범한이 미소 띤 얼굴로 언빙운을 바라보았다.

언빙운의 눈에서 잠시 이상한 빛이 번뜩였지만 몸 안팎으로 밀려드는 어마어마한 통증에 그는 다른 건 다 잊고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비개의 제자이시라고요?”

놀라움이 섞인 말투였다. 한데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에게는 당신 같은 제자가 없는데요.”

“언제는 내가 열두 살 되던 해까지는 손바닥 보듯 훤히 안다면서요.”

범한이 꺼내 두었던 병들과 상자들을 치우며 놀리듯 말했다.

“그런데 어째 내 스승님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겁니까?”

언빙운은 범한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범한이 자기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 돌아보더니 턱을 괴고 언빙운 공자 몸에 난 지렁이 같은 상처를 보며 소리를 낮췄다.

“언 형, 그런데 언 형께서는 왜 나를 볼 때마다 그리 노기등등한 얼굴인 겁니까?”

범한은 언빙운의 태도가 가시라도 박힌 듯 계속 거슬렸던 터였다. 그래서 언빙운을 굴복시키려면 우선 상대가 자신에게 강한 심리적 반감을 갖고 있는 이유부터 알아내고 그것을 제거해야 했다. 그러니 만약 이번에 알아내지 못한다면 훗날 두 사람의 사이는 매우 불편해질 게 뻔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언빙운은 이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몸 안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점차 사라지자 북쪽에 잠입해 있던 감찰원 밀정 우두머리의 판단력은 살짝 흐려지기 시작했다.

우선 범한의 예쁘장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냥 미웠다. 그리고 그동안 북제 조정과 재야에서 목숨을 걸고 지내 온 자극적인 삶이 생각났다. 그러자 통제력을 잃은 생기 없는 두 입술에서 단어들이 속박을 풀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제사 대인, 아직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다섯 해 전에 담주에서 험악한 사건이 벌어졌지요.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요.”

상자를 닫고 있던 범한은 살짝 놀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범한은 당연히 그때 살인 사건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두 번의 생을 통틀어 자신에게는 첫 살인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자객의 목구멍에서 터진 차가운 밤알은 아직도 범한의 손바닥을 자극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 일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

그러자 언빙운이 괴상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자객은 4처 소속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제가 여기 북쪽까지 와 쥐새끼 노릇을 하게 된 거고요.”

“그래서 내가 밉습니까?”

말을 마친 범한은 침묵했다. 그리고 한참 후 갑자기 쾌활하게 웃었다.

“내가 보기에는 언 형이 내게 고마워해야 옳습니다.”

* * *

“왜죠?”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이 조금 가신 언빙운이 조금 의외란 생각을 하다가 냉정을 되찾고 물었다. 그러자 범한은 언빙운의 두 눈을 주시하며 한 자, 한 자 똑똑히 말하기 시작했다.

“내게는 다 보이기 때문입니다. 언 형은 뼛골까지 밀정이고 이런 생활을 즐기고 있거든요. 그러니 네 해 전에 북제에 잠복했을 때는 날마다 불안하고 긴장되었겠지만 그래도 본인 입장에서는 자극적이면서도 충실한 삶이었을 겁니다.”

그러자 언빙운이 대꾸했다.

“그렇게 좋은 거라면 대인께서 그리 한번 살아 보시지요.”

범한이 잠시 웃고는 의원처럼 약상자를 등에 짊어지고 방에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손을 뒤로 뻗어 문을 닫고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슬쩍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후 손톱 안에 끼워 둔 미약을 상자 가장자리에 밀어 넣으며 속으로 자신에게 경고를 날렸다.

‘내 사람에게 미약을 쓰는 건 딱 오늘 한 번뿐이다!’

언빙운은 역시나 대단했다. 가라방을 썼는데도 금방 깨어났으니 말이다. 그러니 만약 자신이 언빙운에게 미약을 썼다는 걸 들키기라도 했다면 둘의 관계는 절대 융합될 수 없는 지경이 됐을 거라 범한은 생각했다.

언빙운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범한도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상대가 자신을 아니꼬운 눈으로 보는 이유를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범한은 언빙운과 자신이 그리 이상한 인연으로 얽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섯 해 전 담주에서 일어난 미결 살인 사건으로 언빙운은 북쪽으로 오게 되었고 감찰원의 북제 밀정 우두머리까지 되었다. 그리고 다섯 해가 지난 지금, 언빙운을 본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온 사람이 범한 자신인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범한은 세상일이란 언제 다시 돌고 돌지 모른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 * *

“대인, 술 가게 주인 성회인이 술을 가져왔습니다.”

부하 하나가 범한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범한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여러분이나 만나 봐요. 나는 그자가 보고 싶지 않네요.”

부하들이 대답을 하고 곧장 밖으로 나가자 범한은 이맛살이 찌푸렸다. 최 공자에게 훈계를 좀 했더니 신양 쪽에서 곧장 서한을 보내오다니 장 공주가 급하긴 급한 모양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왕계년이 손에 서한을 쥐고 들어와 소리를 낮춰 말했다.

“성회인이 가져온 서한입니다.”

범한은 봉투를 뜯고 서한의 내용을 세세히 읽어 나갔다. 그리고 미간에 걱정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며 혼잣말하기 시작했다.

“이자들이 대체 무슨 장난을 하고 있는 거야!”

범한이 눈썹을 한번 씰룩이고는 후원으로 향했다.

범한이 문을 여는 순간 언빙운은 곁에 둔 검에 손을 얹으며 경계했다.

“마음 놓으세요.”

범한이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언빙운을 바라보았다.

“여기에서 당신을 암살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언빙운이 서서히 두 눈을 뜨고 범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에 쌀쌀맞은 기색을 드러냈다.

“제게 무슨 약을 썼습니까? 왜 머리가 계속 어지러운 거죠?”

“정신을 안정시켜 주는 약입니다.”

범한이 조용조용히 설명을 해나갔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소모가 많은 상태입니다. 빨리 회복되기를 바란다면 잠을 제대로 자야 합니다. 한데 생각했던 것보다 대인의 몸이 약물에 저항을 해 안타깝지만 쓸모가 없었을 뿐이고요.”

범한은 앞서 미약을 사용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때 그의 순진무구한 얼굴은 자신이 저지른 이상한 짓을 가리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 되었다.

언빙운은 범한이 되돌아온 걸 보면 분명 무슨 질문거리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에 범한의 손을 바라보며 인상을 쓰고 말했다.

“범한 대인,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범한이 손에 쥐고 있던 서한을 흔들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장 공주마마의 서한입니다.”

언빙운은 조금 놀라웠지만 얼굴에는 전혀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담담하게 물었다.

“그것과 하관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경도로 돌아가기 전까지 언빙운 대인은 경국 감찰원이 북제에 파견한 밀정의 총지휘관입니다.”

범한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조정 일이라 언빙운 대인의 의견을 들어 보려고요.”

“대인, 말씀하시지요.”

언빙운이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 * *

범한이 신양 쪽에서 연속으로 보내온 두 개 서한의 내용을 말해 주자 언빙운의 미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흰 눈썹이 몇 가닥 섞여 있어 언뜻 보면 맥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런 그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장 공주마마께서는 왜 이런 일들에 관여하시는 겁니까?”

이에 범한이 말해 주었다.

“이번 일에 감찰원이 손을 대야 하는지 대인의 의견을 묻고 싶었습니다.”

언빙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감찰원에서는 소은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장 공주마마께서는 우리가 상삼호와 함께 소은을 구하기를 바라시는군요. 애초에 목적 자체가 완전히 다른데 어찌 따를 수 있겠습니까?”

범한이 아예 자리까지 잡고 앉아 언빙운의 냉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문제는 일단 접어 두죠. 현재 북제 조정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부터 듣고 싶습니다.”

언빙운이 범한을 잠시 바라보더니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다.

“세 가지 국면입니다. 첫째는 황태후, 둘째는 황제, 셋째는 상삼호. 한데 상삼호는 상경으로 불려 온 이상 세력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황태후와 황제 사이에서 한 명을 선택해야 합니다.”

매우 투박해 보이고 간단한 설명이었지만 확신에 찬 판단이었다. 이에 범한은 침묵으로써 언빙운에게 계속 말하라는 의사를 표시했고 언빙운은 그렇게 했다.

“대인의 말씀대로 소은은 상삼호의 양아버지이고, 고하 국사가 소은이 죽기를 바란다면 상삼호는 황제 쪽으로 기울 게 분명합니다.”

“왜죠?”

“황태후는 분명 고하의 말을 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눈썹을 움찔거리더니 망설이며 질문하기 시작했다.

“황태후는 아직도 상당히 젊던데…… 한데 고하 국사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건가요?”

언빙운은 놀라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얼굴은 말끔한데 생각은 자질구레한 젊은 대인이 자기 말뜻을 오해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에 범한을 얕보는 것처럼 바라보고는 말했다.

“대인이 상상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언빙운의 설명으로 범한은 ‘원래 그런 거였구나.’라며 알게 되었다.

경국에서 세 차례 북벌을 진행하는 동안 전(戰)씨가 그 틈을 타 북제를 세웠다. 그런데 나라를 세운 황제는 열두 해 전에 불행히도 사망했고, 황후와 겨우 몇 살 되지 않은 황세자만 넓고 휑한 황궁에 남게 되었다.

경국이 북벌을 멈춘 상태이기는 했지만 악독한 진평평 원장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북제 상경에 남아 있는 일부 이전 왕조 사람들과 전씨 가문의 방계 귀족들에게 자금을 대며 황궁을 압박하라고 사주했다. 그리고 과부와 고아가 된 황후와 황태자가 반역자들에 의해 황궁에서 끌려 나오게 된 순간, 고하가 전청풍 총독의 친구 자격으로 황궁으로 들어갔다.

당시 3천 명에 이르는 병사가 황궁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고하는 대전 앞에 떡 버티고 앉았다. 이때 고하 뒤로는 불쌍한 모자와 촛대며 빗자루를 들고 벌벌 떠는 한 무리의 내관과 궁녀만 있을 뿐이었다.

무수히 많은 창과 화살이 겨누고 있는 가운데 고하 홀로 대전 앞에 앉아 있었지만 그 누구 하나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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