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189화 (189/1,108)

189화

더군다나 그의 부친 언약해는 4처의 수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1처 수장 자리가 아직 공석이다 보니 감찰원 내부 인사들도 진평평 원장이 북제에 감금된 언빙운을 1처 수장 자리에 앉히려 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의외의 사건만 터지지 않는다면 범한은 자신도 점차 감찰원의 모든 걸 접수해 나가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진평평 원장이 죽은 후가 되겠지만 그래도 범한은 훨씬 나중에라도 아니면 훨씬 일찍 그런 날이 오리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범한이 감찰원을 제대로 장악하려면 8대처에 있는 사람들부터 틀어쥐어야 했다. 한데 이는 범한에게는 가장 큰 문제였다. 3처와 8처를 제외하고는 감찰원 내부에 자신의 측근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범한은 이번 북제행을 통해 언빙운과 우의를 다지고 1처와 4처의 지지를 한꺼번에 얻어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언빙운은 첫 만남에서부터 자신에게 은근히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런 걸까? 그런데 범한은 언빙운이 굳이 적의를 숨길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에 살짝 안도감이 들었다.

“대인, 시간이 되었습니다.”

왕계년이 옆에서 조심스레 일러 주었다.

범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사신단 거처를 나섰다. 그러자 뒤쪽에 있던 사촌 형제 임정과 임문이 ‘정사 대인이 오늘은 또 어디를 가시려고 하는 거지?’ 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사신단 거처 밖에는 장영후가 보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궁의 누군가가 이미 말을 전했는지 사신단 호위를 책임지고 있는 어림군은 비단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기들 대신 마차를 호위해 북제 상경의 최대 번화가인 태평항 골목으로 가는 걸 묵인했다.

하늘에서는 가느다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데 이 빗물은 마차 행렬이 지나간 흔적을 순식간에 삼켜 버리고 있었다.

경국 감찰원 제사 범한은 오늘 북제 금의위의 진무사 심중 대인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밀정 우두머리와의 만남이니 아무래도 모든 게 범한에게는 신비로울 수밖에 없었다.

빗방울이 마차 지붕 위로 떨어지며 타닥타닥 소리를 내고 있었다. 범한은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는 중이었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마차가 드디어 멈추어 섰다.

범한은 두 손으로 마차 문을 열고 살며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비 내리는 마차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머리 위에는 일찌감치 우산이 있었다. 그리고 우산이 비바람을 막아 준 덕분에 주변 골목에서 불어오는 봄의 찬 기운만 우산 밑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온통 검은색 옷을 입고 있는 왕계년이 범한 머리 위로 우산을 들고 있었다. 왕계년 뒤로는 등에 긴 칼을 찬 일곱 명의 호위들이 조용히 두 줄로 범한의 양옆에 늘어서 있었다.

범한은 오늘 깃털로 장식된 짙은 색 외투를 입었다. 외투 안에는 흰색의 장삼을 입고 있었고 또 그 안에는 경도를 떠날 때 챙겨 두었던 잠행복을 입고 있었다. 수수한 차림새 속으로 궁사의 의상을 입고 여기에 영웅 같은 얼굴을 더하니 범한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범한 제사님, 이리로 드십시오.”

길 안내를 맡은 금의위가 무표정하게 손을 내밀며 범한 일행을 어느 후원 안으로 인도했다. 후원은 옆쪽으로 난 골목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앞쪽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자 범한은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보니 청루 후원이었군요.”

길잡이 금의위의 얼굴이 아까보다 경직되었지만 그가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제사 대인의 청력이 참으로 놀랐습니다. 이곳은 반산림의 후원입니다. 심중 대인께서는 이곳에서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걸 좋아하시거든요.”

범한은 반산림이란 곳을 알고 있었다. 전해 들은 바로는 북제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기루로 북제의 개국 황제가 자주 들르던 곳이다. 이에 범한은 미소 띤 얼굴로 잠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닥 석판 위에 고인 물을 밟으며 후원으로 들어갔다. 후원으로 들어서니 겹겹이 둘러쳐진 대나무, 층층이 쌓인 가짜 산 그리고 사방에 깔린 금의위 밀정들이 보였다.

왕계년은 줄곧 우산을 들고 있었고 일곱 명의 호위는 묵묵히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들은 앞장서서 쏜살처럼 나아가고 있는 범한을 따라 냉랭하고 자신만만하게 후원 내 깊숙이 자리 잡은 곳으로 향했다.

어린 대인과 그의 일행은 가는 내내 배짱 두둑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같은 일을 하는 적국 금의위에게는 살짝 놀랍게 느껴질 정도였다.

* * *

왕계년이 우산을 접고는 조용히 범한의 뒤를 따랐다. 범한은 뒷짐을 지고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은 꽤 넓은 거실에 들어와 있었다. 거실 중앙에는 커다란 원탁이 있었다. 그리고 넓게 펼쳐진 공간은 여러 양식으로 정교하게 꾸며져 있었다. 원탁은 열대여섯 명 정도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딱 두 사람만 앉아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평범한 부자처럼 보였다. 비단 모자를 쓰고 손가락에는 커다란 옥가락지를 끼고 있었다. 이자는 게다가 너무나도 평범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한데 범한이 거실로 들어서는 순간부터는 범상치 않은 싸늘한 눈빛을 뿜어내며 범한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범한 제사입니까? 오래전부터 흠모했는데 오늘 보니 역시나 비범한 사람이었군요.”

일상적인 인사치레의 말이었으므로 범한은 즉시 반응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잠시 상황을 가늠해 보았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금의위들은 모두 자신을 제사라는 관명으로 불렀다. 그러니 오늘은 경국 감찰원과 북제 금의위 간의 만남이지 조정 간 외교 담판 자리는 아니었다.

범한이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 두 개로 목에 채워진 단추를 풀었다. 이때 단추를 교묘하게 풀어 걸치고 있던 얇은 외투가 그의 등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리도록 만들었다.

왕계년은 일찌감치 범한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다.

범한은 커다란 원탁 한쪽에 앉아 맞은편에 앉아 있는 부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사람의 눈썹이 그려 놓은 것처럼 두꺼운 걸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심중 대인께서는 천하 사람들을 차갑고 화난 눈초리로 바라보신다던데 제게는 어찌 이리도 겸손히 대해 주시는 건가요?”

이제 보니 이 사람은 북제 금의위 진무사 지휘사인 심중 대인이었다. 심중은 북방에서 금의위를 무수히 많이 거느리고 있는 사람으로, 세상에서 손꼽히는 대단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한데 이처럼 평범한 부자로 보일 줄이야. 만약 감찰원이 심중에 관한 정보를 상세히 기입해 놓지 않았더라면 단순히 부자처럼 보이는 사람의 진짜 신분을 범한은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겸손한 게 아닙니다.”

심중 지휘사가 탄식하며 대답했다. 그는 범한의 맑고 수려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절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범한 대인이 시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고 하니 이 늙고 거친 이의 입장에서는 그저 탄복하게 되더군요. 두 달 전에 갑자기 범한이라는 시인이 남경 감찰원의 제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그게…… 그게 본관으로서는 진평평 선생께서 무슨 생각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범한 대인 같은 인물을 어찌 우리 같은 시궁창 쥐처럼 살게 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그러자 범한이 웃었다.

“심중 대인께서는 겸허하시군요. 천 리를 마다 않고 관직을 수행하는 것은 모두 돈 때문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무슨 일을 하든 첫째는 조정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둘째는 제 집안이 근심 걱정 없이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범한이 조금은 대놓고 말한 게 있다 보니 심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일을 하는 남쪽 조정 사람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체면이 좀 깎인 탓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어린 사람이라고는 해도 말을 조금 막하는 걸 보니 심중은 진평평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그리고 남쪽의 무서운 황제도 왜 이 황당해 보이는 감찰원 인사에 동의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심중은 그 자신이 북제의 금의위 진무사 지휘사였지만 속으로는 경국 감찰원 사람들을 늘 부러워했다. 그리고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절름발이에게도 존경심과 더불어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남쪽의 감찰원이 어떻게 황제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얻게 되었으며 그리고 황궁 사람에게 언제 헌 신발짝처럼 내쳐질지 몰라 조정에서 떨며 버티는 중인 자신과 어떻게 다를 수 있는 건지 늘 궁금해하고 있었다.

살짝 정신이 흐트러졌던 심중이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는 상대방이 정사라는 직위에 있으며 왜 장영후를 통해 자신을 만나려는 모험을 한 건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거래에 어마어마한 이득이 걸려 있기는 해도 그것 때문에 심중 자신과 북제 황궁이 흔들리지 않을 거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황금이나 은과 같은 걸 싫어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심중이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다만 이 늙은이 입장에서는 그 일을 했을 때 우리 진무사가 어떤 이득을 보게 될지는 모르겠더군요.”

범한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자 왕계년과 일곱 명의 호위들이 모두 물러났다. 심중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거실에 있던 나머지 관련 없는 사람들도 모두 물러났다.

다만 심중 옆에 한 사람이 나가지 않고 앉아 있자 범한은 의아해하며 그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는 호화롭고 비싼 의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이 봤을 때 그의 미간과 눈매에서는 황가 사람의 느낌이 전혀 없었다. 북제 황궁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도록 보낸 사람은 아니라는 판단이 서자 범한은 ‘그렇다면 저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이쪽은 최 공자입니다.”

심중이 소개했다. 그러자 최 공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범한에게 인사했다. 그의 얼굴에서는 오만함이 살짝 엿보였다. 이에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경국 사람입니까?”

그러자 심중이 크게 웃었다.

“두 사람이 원래 알는 사이인 줄 알았습니다. 범한 제사께서 좋은 걸 알려 주었군요. 여기 최 공자는 경국 최씨 가문의 둘째 공자입니다. 경국에서 최씨 가문과 범씨 가문은 늘 함께 거론되고 있으니 둘 다 세도가 자제 아닙니까.”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심중 대인,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가요?”

그러자 심중의 눈에서 순간 음험한 기색이 번뜩했다. 하지만 심중은 담담한 말투로 대꾸했다.

“범한 대인은 거래를 하려는 거 아니었나요? 그러니 대인에게 알려 주는 것입니다. 사실은 말이지요, 대인이 제안한 거래는 본관이 수년 동안 해오던 것입니다. 그러니 범한 대인이 내게 얼마나 더 좋은 걸 줄지 알아야겠습니다.”

범한이 살짝 고개를 갸우뚱한 채로 최 공자란 사람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상대방의 얼굴에서 무엇이든 읽어 내 보려 했다. 그러다가 범한이 갑자기 입을 뗐다.

“최 공자, 오늘 이 만남 자리는 공자가 원해 온 것입니까, 아니면 집안 어르신께서 원해 온 것입니까?”

“이리도 융숭한 자리에서 내 어찌 실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최 공자는 범한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일이 이쯤 되자 모든 게 명확해졌다. 최 공자란 사람은 최씨 일족의 이익을 대표해 온 게 분명했고, 최씨 가문 뒤에는 당연히 저 멀리 신양 땅에 있는 장 공주가 있는 것이었다. 범한은 장 공주가 황실 금고에서 많은 이익을 가로채기 위해 밀수라는 경로를 이용할 거란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금의위 진무사 지휘사가 장 공주의 대리인을 이 자리까지 끌고 나오리란 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최가 놈이 감히 이 자리에서 협상의 추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범한은 너무 화가 났다. 그런데 장 공주는 지금 자신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 처지였다. 어찌 되었든 자신의 일을 망쳐서는 안 되는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분명 최씨 공자의 독단적인 행동이란 뜻이었다.

범한이 자진해서 심중과 연락한 이유는 첫째, 관계를 트기 위해서였으며 둘째, 신양 장 공주의 돈줄을 칠 생각에서였다. 한데 북제 조정이 끼어들어 장난질을 칠 줄이야. 원래 아무도 모르게 거래해야 하는 계획이었는데 몽땅 들통나 버린 것이다.

범한이 씁쓸해하는 것처럼 보이자 심중이 미소를 지었다.

“범한 대인, 어찌 된 일인지 다 말해 주리다. 모두 돈 벌자고 이러는 거 아닙니까. 한데 최 공자와 범한 대인이 거래하려는 것 중에 겹치는 부분이 있지 뭡니까. 내가 양쪽을 다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해서 여러분의 의견부터 들어 보자 생각했지요.”

범한은 마음을 진정시킨 후 최 공자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최 공자께서는 이리도 큰 거래를 할 만큼 배포가 있는 분이셨군요.”

“어디 범한 대인만 하겠습니까.”

최 공자가 살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심중이 두 사람의 대화에 조금 난처했는지 잠시 웃어 보이고는 말했다.

“최 공자도 세도가의 자제입니다. 집안 분 중 경국 조정에서 관직에 오르신 분도 여럿 계시지요. 최 공자가 지금은 외지에 나와 있어도 언젠가는 조정에 들어가 관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두 사람이 많이 가까워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심중이 말하는 내내 범한은 속으로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이에 심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심중 대인, 제 신분을 잊으신 겝니까? 세도가 따위 제게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말을 마친 범한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인사도 없이 곧장 거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일찌감치 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던 왕계년이 맞이하러 나왔고, 일곱 명의 호위들도 긴 칼을 쥐고 후원 밖으로 나가는 대인을 호위했다. 한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심각해 금의위 중 그 누구도 감히 그들을 막아서지 못했다.

후원 밖에서 마차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범한은 그냥 그렇게 무례하게 떠나 버린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