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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88화 (188/1,108)

188화

이 순간 범한은 상대방의 미간에서 다른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얼굴이 굳어 버렸다. 그리고 조심스레 언빙운의 옷깃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언빙운이 고개를 들어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냉랭하지만 장난기 살짝 섞인 눈빛을 하고는 작게 말했다.

“보고 싶습니까?”

“네.”

범한은 차분하게 대답한 후 언빙운이 걸치고 있는 흰색 도포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끌어 내렸다. 도포는 구름과 눈처럼 희고 깨끗했다. 한데 도포의 옷감이 언빙운의 몸과 분리될 때 뜯어지고 쓸리는 작은 소리가 났다.

그런데도 언빙운은 낯빛이 변한다거나 눈썹을 움찔한다거나 하지 않았다.

범한의 낯빛이 일그러지면서 흰색 도포에 가려져 있던 끔찍하게 변한 목덜미 쪽 피부가 드러났다. 온통 불그죽죽한 상처뿐이었다. 분명 새로 돋은 피부였지만 이만큼 회복하려면 분명 오랫동안 요양해야만 가능했다. 목덜미에 난 수많은 상처는 커다란 흰 도포 밑에 가려진 언빙운의 몸에 대체 얼마나 많은 고문의 흔적이 있을지 짐작하고도 남게 해주었다.

분노한 왕계년이 욕을 몇 마디 내질렀다. 반면 평정심을 되찾은 얼굴을 하고 있던 범한은 여전히 냉정한 표정의 언빙운을 보며 물었다.

“고문을 안 당한 지 꽤 오래되었군요.”

“석 달입니다.”

언빙운이 웃으며 답했다. 그것도 반년 동안 끔찍한 고초를 겪은 몸은 절대 자신이 아니란 것처럼 말이다.

범한이 조심스럽게 그의 옷깃을 여며 주며 한탄했다.

“북제에서는 우리가 올 때를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석 달 동안 고문을 하지 않은 거지요. 한데 석 달이 지난 후에도 이리 끔찍한 걸 보니 언빙운 대인, 참으로 고생 많았습니다.”

그러자 언빙운이 범한의 눈을 냉담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제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냉랭하게 말했다.

“이제 보니 오지랖이 넓은 것 같군요.”

범한은 말문이 턱 막혀 순간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은 그저 관심을 보여 준 것뿐인데 저 형님께 형편없다고 비웃음만 사다니…….

* * *

“협의 내용을 확인하기 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언빙운은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저 조정에서 나를 북제에서 구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썼는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말을 마친 언빙운은 범한과 왕계년이 대답해 주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숨을 고르고는 곧장 음침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말해 주지 않는다면 나란 쓸모없는 놈 때문에 조정이 잠룡만의 초원을 내주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도 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도 폐하께서는 그 정도로 어리석은 분이 아니십니다.”

범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이번 협의의 대체적인 내용을 언 공자에게 말해 주었다.

그러자 실내에 갑자기 기괴한 침묵이 흘렀다. 언빙운은 고개를 반쯤 숙인 채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범한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의 혼잣말이 범한에게 들렸다.

“소은과 나를 맞바꾸기로 했다고? 얼간이들!”

언빙운이 느닷없이 고개를 치켜들더니 조소와 분노가 담긴 눈빛으로 범한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목소리만큼은 냉정하게 들릴 정도로 차분했다.

언빙운은 줄곧 그가 사람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차분함과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그가 매우 우수한 밀정이란 걸 보여 주는 예였다. 한데 조금 전 분노를 폭발시킨 모습도 경국이 북제에 심어 놓은 밀정의 우두머리가 얼마나 강한 위세와 장악력을 지녔는지 보여 주기에는 충분했다. 구금되어 있는 자가 눈에서 뿜어낸 분노의 불꽃에 범한도 무의식적으로 움찔해 피하려 했으니 말이다.

언빙운이 입술을 두어 번 떨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사포처럼 범한의 귀를 때렸다.

“소은이 아직 우리 통제권 안에 있습니까?”

범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작은 소리로 답해 주었다.

“무도하강을 지난 후 북제 금의위에 넘겨주었으니 어쩌면 벌써 상경했을 겁니다.”

“그자를 죽일 방도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자가 입에 담고 있는 비밀을 물어본 사람이 있습니까?”

깜짝 놀란 범한은 언빙운에게 바짝 다가가 그를 차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그자가 입에 담고만 있는 비밀을 알고 있습니까?”

언빙운은 이 젊은 대사 대인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이상하게 올렸다.

“북제에서 네 해를 지내다 보니 북제 황실이 소은을 잊지 않고 있음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지요. 비록 그 비밀의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지만 북제 황실이 그리 중히 여기는 걸 보면 분명 별것 아닌 건 아닐 겁니다.”

말을 마친 언빙운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별안간 질문을 던졌다.

“소은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습니까?”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으며 답했다.

“소은에 대해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자 언빙운이 또 속사포처럼 범한을 질책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 어찌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 뒀습니까!”

범한이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폐하와 진평평 원장 대인의 뜻은 분명했습니다. 소은은 이미 많이 늙었고 언빙운 대인은 아직 젊으니 이번 거래에서 실제로 이득을 본 쪽은 우리라고 말입니다.”

언빙운이 다시 침묵했다. 자기 때문에 경국 조정이 소은을 맞교환 상대로 쓰다니. 북제로 파견된 밀정 우두머리는 좌절하고 말았다. 자신이 북제 금의위에게 생포된 것도 굴욕적인 일인데 경국 조정까지 나서서 자기 때문에 큰 대가를 지불하다니,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굴욕이었다.

잔뜩 실망한 언빙운은 몸을 웅크리려는 것처럼 새하얀 도포로 온몸을 뒤덮었다.

범한이 가만히 언빙운을 바라보았다.

“대인은 총명한 분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된 이상 안전하게 남쪽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게 우리 쪽에서 손해를 덜 보는 거고요.”

언빙운은 냉담하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불쑥 찾아온 감찰원 제사가 제대로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어서였다.

“사흘 후 사신단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범한은 미소 띤 얼굴로 왕계년과 나란히 문을 나섰다. 그리고 문밖에서 지키고 서 있던 위화와 부초무사의 안내에 따라 마차에 올라타고는 곧장 사신단으로 돌아갔다.

범한이 사신단으로 돌아오자 경국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최근 있었던 일들을 모두 취합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후 모두 돌아가고 범한과 왕계년 두 사람만 남자, 범한은 턱을 괸 채 깊은 생각에 잠겨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계년이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대인, 무슨 생각 중이십니까?”

“왜 심 낭자가 그곳에 있었던 걸까요?”

범한은 하품을 하고는 하려던 말을 이어 갔다.

“어쩌면 북제가 우리의 생각을 흩뜨려 놓기 위해 벌인 수작일 수도 있겠네요. 적어도 언빙운 공자를 향한 우리 조정의 믿음을 약화시키려고 말이죠.”

“어떻게요?”

왕계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언빙운 대인이 사용한 수단은 당연히 조정에서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일이란 건 원래 복잡해지기 마련이니까요.”

범한이 무표정하게 말을 이어 갔다.

“만약 누군가가 대놓고 일을 꾸미려고 한다면 분명 트집거리가 되겠지요. 그런데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습니다. 우리가 언빙운 대인을 만나러 갔을 때 분명 귀국하게 될 거란 걸 알았을 겁니다. 그런데 왜 그분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 전혀 없었을까요? 왕 대인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분을 귀국시키기 위해 조정이 지불한 대가가 너무 커서겠지요.”

왕계년은 감찰원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감찰원에 몸담고 있는 이상한 대인 중 하나였던 그도 이번 일에 대해서는 범한보다 훨씬 더 정확히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왕계년이 공손하게 설명했다.

“조정에서 소은과 자신을 맞교환할 걸 알고 있었다면 어쩌면 언빙운 대인은 붙잡히자마자 자결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않았겠지요.”

감찰원 관원들의 심리 상태를 잘 이해할 수 없었던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설마 뛰어난 감찰원 관리가 정말로…….”

범한은 여러 차례 주저하며 바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소심하게 물었다.

“정말로 나라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려 한다고요?”

“그렇습니다.”

왕계년이 범한을 슬쩍 보았다. 한데 얼굴에 망연자실함이 보이자 다시 공손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하관은 언빙운 대인에게 감명받았습니다. 감찰원 관원으로서, 조정의 밀정으로서 감찰원에 들어온 초기에는 나라를 위해 희생하려는 마음가짐이 분명 있었을 테니까요. 감찰원 밀정들이 신봉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목적이란 걸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말아야 하며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목적인데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경국을 위한 모든 목적입니다.”

대답을 마친 왕계년의 얼굴에서 은근히 광적인 기색이 감돌았다.

* * *

범한의 손가락이 약간은 무의식적으로 탁자 위에 어떤 글자를 쓰고 있었다. 범한은 오늘 처음으로 언빙운을 보았을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언빙운은 범한이 있는 내내 의자에 앉아만 있었다. 그것도 무슨 창끝에라도 앉은 사람처럼 궁둥이만 의자에 붙인 채 신체의 다른 부분은 의자에 닿지 않도록 이상한 자세로 말이다. 그의 두 발이 쇠사슬에 묶여 의자에 고정되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범한 자신이 구금실을 나가면서였다. 그러니 앉은 자세가 이상했던 이유는 범한이 보았을 때는 하나뿐이었다.

바로 언빙운의 몸에 성한 곳이 없다는 뜻이었다. 온통 불에 지져진 탓에 그와 같은 자세로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경국을 위한 모든 것이라고요?”

범한은 이맛살을 더욱 강하게 찌푸렸다.

“이제 보니 모두들 이상주의자였군요!”

* * *

경국 조정의 문서가 공식적인 경로로 사신단에 도착했다. 그러니 이 서한에는 비밀 내용 같은 게 숨어 있지 않았다. 이제 곧 북제 황태후의 생신날이니 사신단은 귀국을 연기하고 그 중요한 일을 제대로 완수한 후 귀국길에 오르라는 내용뿐이었다.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두 나라가 외교적인 왕래를 하는 와중에 황태후의 생일이 겹치게 되었으니 응당 분위기는 맞춰야 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상경에서 범한은 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이 조금 더 남아 있었으므로 기쁜 마음으로 며칠 더 묶기로 했다. 한데 그렇다고는 해도 집에 두고 온 아름다운 아내와 누이동생은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황태후의 생신이니 우리도 조정을 대표해 얼굴을 비쳐야겠지요. 그리고 선물을 초라한 것으로 준비해도 안 될 것입니다.”

부사 임정이 골똘히 생각하며 말을 이어 갔다.

“사신단의 다른 대인들을 불러 함께 수수 거리에 가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수수 거리’라는 네 글자에 범한은 술 가게 주인 성회인와 그가 건네준 서한이 생각나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 상경의 물 자체도 충분히 깊은데 신양에 있는 장 공주마저 멀리서 타국의 내란을 지휘하려 하고 있으니 이런 혼탁한 물에는 도무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선물을 보내야 할까요?”

임정은 연회에 보낼 선물 때문에 골치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한데 일찌감치 생각해 둔 것이 있던 범한은 손을 한번 휘 내저었다.

“내가 시 한 수를 짓고 그걸 표구해서 가져가면 그만입니다.”

참으로 시건방진 말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수하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했다. 시선 범한이 시를 짓지 않겠다고 선언한 일은 천하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 범한이 북제 황태후의 생신에 예외를 두어 시를 짓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체면을 세워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그 시를 손수 쓸 수는 없었다. 그러자 왕계년이 또 유치한 생각을 내놓았다.

“언빙운 대인이 북제에서 지녔던 신분은 ‘재주꾼 운’이었습니다. 바둑, 금(琴), 서화까지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지요. 서예 실력도 대가이신 반령 대인께 전수받았고요. 요전에 북제에서 중간 정도 크기의 서예 작품 한 점이 은자 천 냥 정도에 거래됐습니다. 범한 대인께서 지은 시에 언빙운 대인이 글씨를 더한다면 경국의 두 젊은 인재들이 나선 게 되니 북제 황태후도 좋아서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을까요?”

임정과 임문 두 사람은 왕계년이 범한의 심복인 걸 알고 있던 터라 그의 제의가 제법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야 언빙운의 북제에서의 신분을 알게 된 두 사람은 무언가 이상하기는 해도 왕계년의 제안에서 콕 집어 이상한 점을 찾아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범한이 웃으며 질책했다.

“언빙운 대인이 어떤 사람입니까? 북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분의 살점을 씹고 피를 마시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분의 필체가 들어간 시를 황태후 생신 선물로 보낸다면 황궁 안은 분명 제삿날 같은 분위기가 될 거예요.”

왕계년은 그제야 자신이 내놓은 의견이 황당하다는 걸 알아차리고 난처해했다. 하지만 이내 뻔뻔하게 웃었다.

“만약 북제의 황태후가 화병이 나 죽게 만든다면 우리 감찰원 입장에서는 멋진 미담이 되겠죠.”

그런데 범한은 왕계년이라는 중년 남성의 재미없고 썰렁한 농담이 귀찮아 이미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든 상태였다. 만약 언빙운이 무탈하게 경국으로 돌아간다면 그는 곧장 감찰원 윗자리로 올라갈 게 분명했다. 그에게는 네 해 동안 북제에서 경국 밀정이 활동할 기반을 닦은 공과 최근 1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다는 전적이 있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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