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방 안은 매우 단출했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그리고 일상적인 물건들 몇 점뿐이었다. 감옥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거주하는 방처럼 보였다. 범한은 북제 측이 자신이 올 걸 알고 임시방편으로 이런 곳을 마련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범한은 의자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의자에는 냉담한 표정의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영민하게 생겼으며 얇은 입술과 위로 올라간 눈썹은 관상학적으로 보았을 때 인정이 박한 부류였다. 하지만 사람들을 놀라게 한 건 이 젊은이의 무릎 위에 엎어져 있는 한 여인이었다. 여인은 작게 울먹이고 있었으며 고요한 방 안에서는 그녀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범한은 깜짝 놀라 벌어져 있던 입부터 꾹 다물었다. 그리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돼 씁쓸하게 웃었다.
‘북제로 보낸 밀정 우두머리라 걱정했는데 감옥 안에서는 로맨스물이나 찍고 있었다니, 이게 무슨 <007>에 나오는 고문 장면도 아니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젊은이는 당연히 언빙운이었다. 그는 바깥에서 들어온 몇 사람 중 두 사람이 경국의 복장을 하고 있자 이내 이맛살부터 찌푸렸다. 그가 인상을 쓰자 방 안에는 순식간에 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지자 언빙운의 무릎 위에 엎어져 울고 있던 여인도 놀라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범한은 그녀가 아름답기도 하고 또 미간에 유순한 느낌이 감도는 것으로 보아 대부호 가문의 여식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경비가 삼엄한 구금실 안에 어떻게 들어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심 낭자?”
아연실색한 위화가 소리쳤다.
“여봐라, 심 낭자를 밖으로 모시거라!”
“심씨라고?”
범한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한데 속으로는 일이 점점 재밌어진다고 생각했다.
문밖에서 금의위 몇 명이 들어왔다. 그러자 위화는 새파랗게 질린 채로 그들을 꾸짖었다.
“일을 어찌하는 것이냐, 심 낭자가 이런 위험한 곳에 있도록 하다니!”
부초무사 역시 노기등등한 표정으로 금의위들의 뺨을 몇 대 후려갈겼다. 찰싹! 하고 몇 번 소리가 울린 후 중범죄인을 지키는 금의위가 얼굴을 부여잡고 심 낭자 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들은 감히 그녀에게 손대지는 못했다.
“심 낭자, 계속 여기 계실 거면 하관이 거칠게 행동해도 언짢게 여기지 마십시오.”
부초무사가 주먹 쥔 한 손을 나머지 한 손으로 감싸 쥐고는 심 낭자를 향해 실례하겠다는 인사부터 했다.
위화도 그녀 곁으로 다가가 부드럽게 권유했다.
“누이, 돌아가지. 만약 심 아저씨께서 아시기라도 하는 날에는 누이를 때려죽이려 하실 거야.”
* * *
범한은 단 한 번도 언빙운과 눈빛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계속 언빙운의 무릎 위에 있던 여인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낭자의 성이 심씨이고 금의위가 지키는 삼엄한 장원에 들어올 수 있었다면 더 이상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분명히 심중 대인 댁의 아가씨일 게 뻔했다.
한데 이 심 낭자와 언빙운이 무슨 관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에 범한은 씁쓸하게 웃으며 ‘설마 우리의 언빙운 대공자께서 미남계를 쓰신 건가?’라고 생각만 할 뿐이었다.
심 낭자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지금껏 말 한마디 않는 언빙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유순한 두 눈에서는 이내 광기 어린 원망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고 결국 아랫입술을 깨물고 단어 하나하나에 힘주어 말했다.
“하나만 물을게요. 당신이 한 말 중에 진실이 있기는 했나요?”
언빙운은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기만 할 뿐 감정이라고는 전혀 담겨 있지 않은 눈으로 심 낭자를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본관은 경국 감찰원 4처의 관원입니다. 그러니 심 낭자도 내가 한 말 중에 사실은 단 한 마디도 없다는 걸 알 겁니다.”
이 광경을 차분하게 지켜보고 있는 범한을 위화가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심 낭자가 계속 말하도록 놔둔다면 경국의 관리들에게 우스운 꼴만 보일 거란 생각에 금의위에게 서둘러 이 여인을 문밖으로 끌고 나고도록 했다.
그러자 심 낭자가 금의위의 손을 차갑게 뿌리치며 가만히 앉아만 있는 언빙운을 향해 구슬프게 말했다.
“네, 네. 그럴게요, 사랑 가득한 언빙운 님.”
사랑 가득한 언빙운 님이라니!
찢겨 나간 마음과 절망으로 무수히 점철된 참으로 간절한 말 아니던가. 심장이 단단한 돌덩이 같은 범한도 절로 감탄하게 만든 말이건만 위화는 분노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는 언빙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도 적국의 밀정 우두머리를 지금이라도 당장 갈가리 찢어 버릴 태세로 말이다.
들릴 듯 말 듯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심 낭자가 드디어 구금실 밖으로 나갔다.
범한이 다시 한번 감탄사를 내뱉었다.
“사랑 가득한 여인이로군.”
한데 말만 그렇게 했을 뿐 범한은 외려 궁금증만 더 커진 상태였다. 일단 그 아가씨가 북제 금의위의 총괄책임자 심중의 여식이라 치고, 언빙운이 북제에 잠복해 있는 동안 그녀와 감정적으로 얽히게 되었다고 해도…… 그래도 언빙운이 어떤 사람인데! 북제가 열다섯 해 만에 붙잡은 경국의 최고위 밀정이고 또 삼엄한 곳에 갇힌 사람 아니던가. 그런데 심 낭자는 어떻게 구금실 안까지 당당하게 걸어 들어올 수 있었으며 더군다나 하필이면 경국 사신들 앞에서 이런 상황까지 연출하게 된 거지?
범한은 순간 자신들과 동행한 북제 사람들의 생각을 알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이 구금실 같지도 않은 구금실도 제법 안정을 찾은 상태였다. 의자에 앉아 있는 언빙운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천천히 차나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다년간 북제에 잠입해 있던 대단한 인물이라 그런가. 그는 서리같이 싸늘한 양미간과 냉담한 얼굴로 자신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그러니까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는 듯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위화도 앞서 일었던 분노에서 많이 벗어난 상태였다. 그런 그가 언빙운을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언빙운 공자, 어떤 말을 하든 두 해 전 우리는 좋은 친구였고 우리 모두 자국을 위해 그런 것이니 애당초 별일 아닌 것일 수 있겠지. 하지만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영원히 널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그 점 부디 기억해 주기 바란다! 이번에 떠나면 다시는 우리 북제에 단 한 발자국도 들이지 말란 뜻이다! 폐하께서는 심중 대인의 밀지를 이미 윤허하셨다. 그러니 오늘 이후로 다시 우리 제국에 발을 들인다면 3천 명에 이르는 철갑으로 무장한기마병 부대가 네놈 목을 베어 버릴 것이다.”
한데 언빙운은 위화의 말은 전혀 귀담아듣지 않는 듯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찻잔의 자그마한 손잡이를 만지며 손장난이나 치고 있었다. 그는 작년에 신분이 드러나고 감옥에 갇힌 후로는 더 이상 북제 상경의 사교계에서 넓은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멋들어지게 춤추던 ‘재주꾼 운’이 아닌 타고난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오늘은 저분을 보러 온 것입니다.”
범한이 아무런 표정 없이 위화에게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저분을 언제 사신단으로 데려갈 수 있을지 확실한 날짜를 약속받고 싶습니다.”
“사신단으로는 돌려보낼 수 없습니다. 저자는 아무도 모르게 상경을 떠나야 하니까요. 상경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언빙운이란 자를 산 채로 갈가리 찢어 버리고 싶어 하는지 모를 겁니다.”
위화의 말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그러자 범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폐하께서는 언 대인을 반드시 사신단으로 데려가라 명하셨습니다. 그러니 알아보는 사람이 없도록 언빙운 대인을 위장하는 작업도 우리 측에서 할 겁니다. 설마 우리가 불필요한 소란을 일으키길 바라시는 건 아니겠지요?”
위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어서였다. 우선 소은과 사리리는 이미 상경으로 돌아왔다. 다음으로 이번 비밀 협의에서 경국 측이 이미 충분히 선수를 친 터라 자신들이 날짜를 미루며 시간을 끄는 건 여의치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범한이 지난번에 장영후 저택에 쳐들어가 수많은 논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때 내놓은 황당한 제의는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황궁 쪽과 권력을 잔뜩 쥔 심중 대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이에 그는 대답했다.
“곧 수속에 들어가겠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편의를 좀 봐주시겠습니까? 언 대인과 단독으로 두어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그럽니다.”
위화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말로 무언가를 상의할 생각이라면 언빙운이 사신단으로 돌아간 후에 더 은밀히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리저리 범한의 의도를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알 길이 없자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부초무사와 함께 잠시 나가 있겠다는 뜻이었다.
이윽고 방 안에는 범한과 왕계년 그리고 계속 고개를 반만 숙인 채 냉담한 태도로 일관 중인 언빙운만 남게 되었다.
* * *
범한은 적국의 금의위 대감옥에 있었지만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사람처럼 따사롭게 활짝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빙운 앞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잘생긴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범한이라고 합니다.”
범한은 자신이 경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언빙운이 붙잡히기 전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감찰원이 북쪽에 파견한 밀정의 총우두머리는 분명 자신의 이름을 들어 보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과연 그의 생각대로였다. 범한이라는 이름을 들은 언빙운은 매끈한 찻잔 손잡이에서 천천히 손가락을 떼고는 고개를 들어 잠시 범한을 바라보았다.
한데 언빙운의 눈에 비웃음과 무시만 담겨 있어 범한으로서는 그의 반응이 의외였다.
“범한? 호부 시랑 범건의 서자? 어릴 때 담주에서 자랐고 음주를 즐기고 재능도 없다는 그 사람이군.”
언빙운이 다시 입을 뗐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매우 부드러웠다. 어찌나 나긋나긋한지 조금 전 냉담한 표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여기에는 왜 온 것입니까?”
범한이 한숨을 내쉬며 그의 말에 답했다.
“저기요, 언빙운 대인. 반년 정도 갇혀 계시는 동안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우선 내 아버님은 벌써 호부 상서가 되셨습니다. 둘째, 말씀하신 이 재주 없는 인간이 지금 사신단 정사로 있습니다. 이번에 북제에 온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대인을 데려가기 위해서고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언빙운은 범한이란 이름에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범한은 그 이유를 몰랐다.
“날 본국으로 데려간다고?”
언빙운이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겨우 스물하고도 몇 살 더 먹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흰 눈썹이 희끗희끗 섞여 있어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너는 누구냐! 내가 왜 너를 믿어야 하지?”
“본인은 범한이고 지금 감찰원 제사로 있습니다.”
범한은 언빙운이 밀정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에 현재 극도로 조심하는 중이란 걸 알고 있었다. 이에 자신이 북제가 친 덫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허리춤에서 요패를 꺼내 언빙운의 눈앞에 대고 잠시 확인시켜 주었다.
언빙운은 두 눈으로 나무로 된 패를 훑어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제사 패가 위조하기 매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보다 어려 보이는 이가 감찰원 제사 대인이란 사실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제사 대인은 원장 바로 아래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로, 감찰원 8대처에 대해 명의상 관할권은 없지만 실제로는 감찰원을 견제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언빙운은 반년 동안 구금 생활을 한 탓에 어느덧 마음을 꽁꽁 닫아 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말도 안 되는 변화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위험도 감수해서는 안 되서였다. 그가 털어놓는 정보는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북제에 숨어 있는 밀정의 첩보망을 완전히 전복시켜 버릴 수 있었다. 그러니 그로서는 극도로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내 옆에서 조용히 있던 왕계년이 앞으로 나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언빙운 대인, 범한 대인께서는 최근에 임명된 제사이십니다. 이번에 북제로 오신 건 대인을 감옥에서 구출하기 위해서입니다.”
언빙운이 냉담한 표정으로 왕계년을 쓱 보았다.
“1처의 왕계년 대인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왕계년은 의자에만 앉아 있는 언빙운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긴장하고 말았다. 그가 벌써 반년이란 시간 동안 갇혀 지냈다는 생각을 하니 탄복해야 할지, 그를 동정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분명 힘든 시간을 보냈을 거란 생각은 들었다.
“직접 내 신분을 확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범한이 언빙운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웃는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어쨌든 이번 일은 빨리 끝내는 게 좋겠죠. 그리고 계속 이렇게 침묵해도 괜찮습니다. 사신단과 함께 귀국해 진평평 원장 대인이나 댁의 부친을 만나 뵌 후 그때 입을 떼도 늦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하는 편이 마음이 놓일 것 같군요.”
언빙운이 들어도 이는 절대로 북제 사람들의 셈법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