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술기운이 잔뜩 오른 범한이 장영후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마차에 올랐다. 바로 그때 빠르게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말이 마차 옆에 멈춰 섰다.
범한이 창문 가림막을 걷어 보자 장영후의 큰아들이자 홍려사 소경인 위화가 급히 돌아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범한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늘 장영후 집에 찾아온 목적 네 가지를 모두 달성한 것이다.
“범한 대인, 뭘 하려는 것입니까?”
위화가 이를 갈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범한이 뭐라 말하려 입을 열자 지독한 술 냄새가 위화의 얼굴에 엄습했다. 위화가 급히 손으로 코를 막자 그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휘저었다.
“상경에 왔으니 오랜 술친구를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위화가 발끈했다.
“범한 대인은 사신이신 만큼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습니다. 단순한 친분으로 만나는 건 모든 일이 끝난 뒤에 홍려사나 예부가 황궁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한 겁니다. 이렇게 갑자기 만난 사실이 조정 대신들 귀에 들어간다면 내일 저희 부친께서 얼마나 난처해하시겠습니까!”
범한이 빙그레 웃었다.
“소경의 부친은 소탈하신 분이셔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으시던데요. 대인도 부친의 풍모를 좀 본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위화가 가슴속 깊이 치솟아 오르는 화를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듯이 저희 부친께서 술을 좋아하셔서……. 범한 대인,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겁니까?”
범한이 위화를 바라봤다. 그때 범한의 눈을 마주 보고 있던 위화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술에 취해 해롱대는 것과는 다르게 범한의 눈동자는 너무나도 침착했던 것이다.
“무슨 생각이냐고요? 부친에게 돈 버는 방법을 제안해 드렸습니다.”
범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직감적으로 위험한 일이란 생각이 든 위화는 마차 창틀을 붙잡았다.
“범한 대인,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솔직히 말씀하십시오.”
“제가 오늘 대인을 찾아갔는데 숨으셨더군요.”
범한이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부초무사를 만나려 했는데 그분 역시 예부에 안 계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누구를 찾아가야겠습니까?”
위화가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든 일은 경국 사신단과 예부 관리들이 협의해 진행하는 것 아닙니까?”
“영토 분할도 처리했고 포로 교환도 끝났습니다.”
범한이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보며 무섭게 말했다.
“홍려사 소경이시니 제가 처리하고 싶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 내일 안에 반드시 만나야겠습니다.”
위화가 고집을 부렸다.
“만난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절차가 복잡한 걸 어쩌란 것입니까.”
“그럼 내일도 부친을 계속 만나야겠군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범한은 오히려 웃었다.
“술도 마시고 대화도 하면서 돈 버는 일도 상의하면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마차가 호위를 받으며 떠났다.
마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위화가 말고삐를 종에게 건네주고는 말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저택으로 들어가면서 종에게 범한이 언제 집에 방문했으며 뭘 했는지를 물었다. 종이 위 통령과 함께 왔다고 말하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폐하 쪽 대신들이 이 일을 빌미로 삼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다.
위하가 거실에 들어가자 아직도 술을 마시고 있는 부친이 보였다. 그가 끓어오르는 화를 참고는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러자 아들은 본 장영후가 술에 취해 혀 짧은 소리로 말했다.
“이리 와봐라. 오늘 집에 손님으로 누가 온 줄 아냐? 내가 항상 말했던 범한이 찾아왔더구나. 오늘 그놈이 수수 거리에서 가장 비싼 술을 두 단지나 사서 왔어.”
결국 참지 못한 위화가 한숨을 쉬었다.
“아버님, 어쨌거나 적국의 사신이 아닙니까. 지금 조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저희 집안을 주시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이런 상황에 아버님께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영후가 크게 소리쳤다.
“뭐가 어때서? 황태후의 친동생인 내가 손님이 찾아와서 대접했는데 뭐가 나쁘단 말이냐!”
“범한 대인은 평범한 손님이 아니라 경국의 사신입니다!”
그러자 위화도 참지 못하고 일갈했다.
“저희 집안은 다른 집안과는 다릅니다. 아버님께서 고모님의 체면을 생각하셨다면 오늘 범한 대인을 집안에 들여선 안 됐습니다.”
위화가 큰소리로 나무라자 기가 죽은 장영후가 술병을 끌어안고 울먹였다.
“무슨 체면을 생각하라는 거야. 네 고모가 황궁에 들어간 그날부터 나는 어떻게 산 줄 아느냐? 내가 어떤 사람이냐? 나는 장묵한의 제자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 줄 아느냐? 너도 오래 봐서 알지 않으냐. 조정의 대신 중에서 나를 만나러 오려는 사람이 있느냐? 찾아오는 것들이라고는 뱃속이 검은 후안무치한 놈들뿐이라서 싫증 날 지경이야!”
“모처럼 나를 만나러 온 사신이 있구나.”
장영후가 떨리는 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아들아, 이 아비가 황태후마마의 친동생이란 생각은 말거라. 그 범한이란 자가, 세상이 알아주는 시선 범한이 말이다, 이 아비의 체면을 살려 주었구나!”
아버지의 말에 위화도 마음이 슬프고 괴로웠다. 자신들의 집안이 호사스럽고 권력을 누리며 살고 있기는 해도 명성을 중시하는 북제 조정과 재야에서는 상대적으로 매우 떨어지는 평가를 받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참고 견디며 겨우겨우 홍려사 소경이라는 직위에 올라 드디어 소인배들의 입을 막아 버리는 권력을 쥐게 되었는데도 어떤 이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황실이 황태후의 집안에 하사한 자리라고 여기고 있어서였다.
위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버지가 옛날에 장묵한의 가르침을 받아 천하에 도움이 되는 큰일을 도모하려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모 때문에 한직인 후작으로밖에 살 수 없어 마음속 응어리를 술로 삭여 온 것도 잘 알기에 무언가 말을 더 하기가 불편했다. 하지만 범한이 떠나기 전해 말한 것들을 생각하니 은근슬쩍 두려워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범한이 아버님과 장사를 한다고 말했습니까? 그자는 경국 감찰원에서 제사로 있는 자인데 어찌 장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체 어떤 장사이기에 아버님께서 직접 나서셔야 합니까?”
그러자 장영후가 대답했다.
“나는 주선자일 뿐이고 그가 진짜로 원하는 사람은 심중 대인이다.”
“심중 아저씨요?”
“그렇다. 범한의 부친은 경국의 호부 상서다. 범한 그자는 사생아 군주의 남편이기도 하지. 나중에 경국 장 공주의 황실 금고에서 운영하는 일은 모두 그자가 이어받을 게다. 그러니 그의 의중은 몸이나 좀 풀어 보려는 거야. 북쪽으로 오는 동안 심중 대인의 호위가 없다면 오래 하는 건 고사하고 시작도 못 할 테니.”
위화는 아버지 입에서 나온 사전 정보에 많이 놀란 사람처럼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설마 그자가…… 밀수를 하려는 것입니까?”
“함정입니다!”
위화의 첫 번째 반응은 위와 같았다.
“그자는 나를 위협할 필요가 없단다.”
아들의 말에 찬성하지 않는 장영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러자 위화의 마음이 급해졌다.
“이번에 양국 간에 협의가 있었는데 모르셨군요. 범한이 지금 그 일 때문에 조급해서 그런 겁니다. 폐하께서는 최대한 시간을 끈 후 경국 사신단이 조급해하면 그때 다시 말하자는 입장이십니다. 하온데 아버님께서 이리 나오시면 그 장사 제안이라는 게 사실인 걸 떠나, 심중 대인과의 만남이 성사되는 즉시 우리도 연루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범한이 저에게까지 찾아와 사람을 내놓으라 하면 제가 어찌 시간을 끌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시간을 끌고 싶어 하신들 그리될 것 같으냐?”
장영후가 아들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어쨌거나 그는 풀어 줘야 할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득이 좀 되면 범한을 도와줄 수도 있지 뭘 그리 벌벌 떠는 게냐? 네 고모님께서도 아직 황궁에 계시지 않으냐!”
위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한참 후 작은 소리로 말했다.
“범한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가 왜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북제까지 와서 밀수를 하려는 건지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재물을 위해 죽고 새는 먹이를 위해 죽는다고 했다!”
장영후는 아직 술이 깨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모두 꿰고 있다는 듯 멸시와 조소를 쏟아 냈다.
“황실 금고라고? 참으로 큰 먹을거리로다. 하나 안타깝게도 범가 것이 되지는 않을 게다! 그자의 부친이 경국 호부 상서로 있어 국고를 통해 이득을 보는 건 있겠지. 한데 그렇다 한들 그 액수가 대체 얼마나 되겠느냐? 반면 범한이 나중에 황실 금고 물건들을 몰래 북쪽에 판다고 해보자꾸나. 그러면 그걸로 벌어들이는 돈이 대체 얼마나 되는 줄 알고는 있는 것이냐?”
위화는 지혜롭고 영민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대략적인 계산을 금세 마쳤다. 십여 년 동안 경국의 모든 경비는 우선 기본적으로 섭가가 남겨 둔 사업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다른 나라에서 벌어들인 은자였다. 그러니 범한이 그런 경천동지할 일을 정말로 할 수 있고 또 그 속에서 이익을 낼 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액수임이 분명했다.
“범한이…… 그런 돈으로 속이려 한다고?”
위화는 세상이 다 아는 인재 범한과 방금 들어 알게 된 탐욕스러운 범한이 선뜻 같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장영후가 고개를 젖히고 다시 독한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딸꾹질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시인도 먹고는 살아야 하느니라.”
과거에는 북제의 인재였을지 몰라도 이제는 나라의 좀벌레가 된 장영후는 말을 마치자마자 탁자 위에 엎어져 깊이 잠들어 버렸다. 온몸은 향이 좋은 술에 찌들어 있건만 그에게서는 향기롭지 않은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 * *
마차 안. 왕계년이 옆에서 잠든 척하고 있는 임정을 잠깐 쳐다보더니 범한에게 자기는 반대한다는 의사를 눈빛으로 보냈다. 제사 대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조정 대신의 면전에서 밀수 따위의 경솔한 말을 꺼내서는 안 된다고 눈치를 주는 것 같았다.
범한이 씨익 웃었다.
“임정 대인은 정말로 믿을 수 없으신가 보군요.”
반면 왕계년은 정말로 믿고 있었고 고달도 그러했다. 황실 금고를 전부 장악할 수 있고 또 앞에 있는 투명 유리통에 손만 뻗으면 몇 배의 폭리를 얻을 수 있는 게 확실한 상황이라 해보자. 그렇다면 정말로 꿈쩍하지도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한데 범한은 그런 사람이었다. 장 공주 입장에서 보면 황실 금고는 조정의 물건이었다. 하지만 범한의 입장에서 보면 황실 금고는 섭가의 것이고, 그러니 자신의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언젠가는 온전히 자기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 집 물건을 훔쳐다가 북쪽에서 싼 가격으로 팔아 버리겠다고? 바보가 아닌 이상에는 누구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문제의 묘미는 범한의 진짜 생각 그리고 범한과 소위 황실 금고로 불리는 황실 상단 간의 역사적인 연관성을 아는 이가 없다는 데 있었다. 이에 범한의 계획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음처럼 생각했다.
‘범가 자식 놈이 황실 금고라는 황금 광산에서 아예 자기 금광을 발굴하려 드는구나!’
하지만 범한에게는 금광 따위나 발굴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그 모든 산을 몽땅 가질 생각이었다.
“자는 척하지 마세요.”
범한이 조금 피곤해 하품을 했다. 그사이 옆에 있던 임정이 약간 난처하다는 듯 눈을 뜨고는 얼핏 두려움 담긴 시선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자신은 고작 부사인데 자기 앞에 있는 이 젊은 관리는 직급이 정사이고 동시에 감찰원이라는 무시무시한 관청의 제사 대인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재산 몰수의 형벌을 당하고 멸족에까지 이를 수 있는 이야기를 자기 앞에서 거리낌 없이 해대다니. 임정은 어쩌면 귀국길에 자신이 해코지당할 수도 있으리라 은근슬쩍 걱정하고 말았다.
범한은 웃긴다는 듯 임정을 잠시 바라보고는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바보예요? 내가 대놓고 말했다는 건 임정 대인이 알아도 게 무서울 게 없다는 뜻 아닙니까. 저녁에 돌아가서 경도로 보낼 서한을 작성하세요. 걱정 마시고요! 조정에서도 내 뜻을 분명히 알아챌 겁니다.”
실은 조정에서 분명히 알아채지 못해도 황제만 정확히 이해하면 되는 일이었다.
임정은 자기 앞에 있는 젊은 대인이 경국 건국 이래 최고의 탐관일 리 없다며 자신에게 강제적으로 최면을 걸었다. 그런 그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