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예상하였다는 듯 범한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수수 거리에 온 진짜 이유는 북쪽에 있는 황실 상점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성 사장이 자신을 향해 어르신이라 말했을 때 놀라지 않았던 것이다. 황실 금고를 현재 장 공주가 관리하는 이상 그녀의 측근도 북제에 매복해 있을 터.
왜인지 모르겠지만 범한은 장 공주가 먼저 자신에게 사람을 보낼 거라 생각했다. 이건 직감이자 경국 사람의 성향을 고려한 추측이었다. 경국 사람들은 똑똑하든 멍청하든 편집적인 자신감과 거만함을 가지고 있었다.
장 공주가 소은을 놓아준 것은 분명 어떠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고 이것이 신묘의 비밀과 관련 없는 것이라면 분명 한가롭게 상경에 머무는 상삼호와 관련이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소은이 상삼호가 아닌 북제 황실의 손에 넘어간 이상 장 공주는 그를 꺼내기 위해 사신단의 정사이자 딸의 사위인 범한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을 터.
범한은 성회인이란 사람이 자신을 직접 부른 걸 보면 장 공주의 심복 중 심복일 거라 생각했다. 그가 성화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나에게 전해 줄 말이 무엇인가?”
성회인이 아무 말 없이 편지 한 통을 그에게 건넸다.
* * *
마차 안에서 범한이 소매 안에 있던 편지를 꺼냈다. 아직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이 편지가 가진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최고의 추적자인 왕계년과 상당한 무예 실력을 가진 고달이 있었지만 상황을 판단하고 정보를 분석할 사람은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그의 머릿속으로 춘시에서 자신이 거둔 서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관리는 될 수 있을지라도 음모를 꾸미고 적의 생각을 간파해 내는 능력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범한의 머릿속에 순간 언빙운이 떠올랐다. 만약 언빙운을 빨리 구해 올 수만 있다면 앞으로 계획을 세우는 데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이때 왕계년이 얇은 종이를 그에게 건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종이를 받아 든 범한이 자세히 살펴보자 놀랍게도 5백 냥짜리 지폐였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뭡니까?”
“유리 가게 여 사장이 준 수수료입니다.”
“명세서를 쓰는 데도 수수료를 주다니…… 대인과 고달이 나눠 가지십시오. 아, 호위들에게도 좀 남겨 주고요.”
은전 5백 냥은 상당한 금액이었지만 범한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사실 백작가처럼 상당한 재력을 가지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임정이 옆에서 웃었다.
“돈을 돌 보듯 하시니 감탄스럽습니다.”
범한은 임정이 청렴함이 아니라 사남 백작가의 재력에 감탄한 걸 알고 있었기에 같이 웃으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마차는 아름다운 거리를 지나 장영후의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은 경국 경도성 남쪽 지역과 유사했다. 담 너머로 뻗어 있는 나뭇가지가 봄바람에 흔들렸고 나뭇잎이 햇살을 막아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범한이 마차 옆에 서서 거리와 호화로운 저택 문 옆에 있는 돌사자를 바라봤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맨 처음 담주에서 경도로 왔을 때가 생각났다.
마차가 어림군의 호위를 받으며 장영후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주변은 고요했지만 분명 사람들이 그늘 속에 숨어서 훔쳐보고 있을 것이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는 마차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주인에게 보고하러 쏜살같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 안에서 사람들이 나오자 문지기들의 눈은 더 휘둥그레졌다. 복식을 보니 경국에서 온 사신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사신이 다른 나라 대신의 집에 찾아오는 일도 있단 말인가. 미리 정해진 일이었으면 어르신이 준비하라고 지시하셨을 텐데…… 사신이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치는 법도 있나.’
사신단은 오늘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장영후의 집에 온 게 아니었다. 더구나 범한은 북제 홍려사에서 보낸 관리도 따돌리고 온 상황이기에 같이 온 북제 사람으로는 호위를 책임지는 위 통령이 전부였다. 범한을 비롯한 네 사람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위 통령이 급히 앞을 막았다.
“범한 대인, 이러시면 안 됩니다. 사신은 조정의 허락 없이 독단적으로 대신과 만날 수 없습니다. 범한 대인이 장영후 대인과 교분이 두텁다 하더라도 이렇게 들어가셔서는 안 됩니다. 만일 이러다가 장영후 대인께서 화를 입으면 어쩌려고 하십니까?”
‘장영후는 황태후의 친동생이니 화를 입을 리 없잖아. 더구나 화를 입으면 더 좋지. 그의 아들이 오늘 종일 나를 피해 다녔는데 본때를 보여야 하지 않겠어?’
범한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오늘 새벽 황궁에서 폐하께서 괜찮다고 말씀하셨는데 누가 토를 달겠습니까?”
북제 황제가 거론되자 위 통령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범한 일행이 저택에 들어서자 문지기가 인사하며 예의에 맞게 일행을 안내했다. 살갑게 일행을 맞이하는 문지기의 모습에 범한은 속으로 명문가답게 질서가 잘 잡혀 있다고 생각했다.
“남쪽에서 술친구가 왔다고 전해 주게.”
지난 1년 동안 관리들과 술자리를 하면서 상당한 경험을 쌓은 범한이 자신 있게 말하자 문지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작년에 어르신이 경국에 사신으로 가셨을 때 술자리를 많이 가졌다고 들었는데 설마 저 젊은 사신과 마셨던 건가?’
하지만 외국 사신을 저택에 들이는 건 상당히 큰일이었기에 문지기는 섣불리 알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때 누군가가 살며시 걸어 들어오더니 범한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어르신께서 들어오시랍니다.”
이렇게 쉽게 들어갈 거라고는 범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거실에 들어선 그가 의자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를 보고는 크게 웃으며 반갑게 포옹했다.
“1년 동안 풍채가 더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사실 작년 경도에서 두 사람은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던 데다가 마지막으로 만난 연회 자리에서는 둘 다 고주망태가 돼서 서로에 대한 인상이 별로 없었다.
범한이 살갑게 인사하자 장영후는 어색한 듯 헛기침을 했다. 사실 황태후의 동생을 이렇게 서슴없이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못 본 사이에 범한 대인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셨더군요.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오늘 새벽 입궁해 폐하를 뵈었는데 아는 분이 한 분도 없지 뭡니까. 그래서 후작 어르신이 생각나서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술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장영후의 얼굴은 부어 있었고 몸에서 희미한 술 냄새도 풍겼다. 어젯밤에 밤새도록 술을 마신 게 분명했다. 범한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선물로 술을 준비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장영후는 술을 좋아하는 호색한인 데다가 변변치 않은 인생을 살고 있었다. 황태후에게는 두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그중에서 군대를 이끄는 장안후는 비록 패전한 장수지만 그보다는 뛰어났다. 항상 상경에 틀어박혀 안락한 삶을 사는 장영후는 세상 물정도 모른 채 황태후의 힘만 믿었다. 그렇기에 일의 심각함도 모른 채 경국의 사신인 범한을 집안에 들인 것이다.
범한은 오늘 황태후의 친동생과 술을 마시면서 아들인 위화 소경을 불러낼 생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종들이 고급술을 올리자 장영후는 싱글벙글 웃으며 좋아했다. 그는 높은 관직에 올라 있지는 않았지만 황태후의 동생인 만큼 모든 사람을 무시했고 경국 감찰원 제사인 범한도 풋내기로 보일 뿐이었다. 그런 그가 범한을 자신의 집으로 들인 이유는 쓰디쓴 기억 때문이었다.
사신이 찾아 왔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술을 유달리 잘 마시던 젊은이가 떠올랐다. 사실 그는 북제로 돌아온 이후에도 자신에게 패배를 안긴 범한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고급술과 정교하게 만든 유리 술잔을 보자 화색이 돈 장영후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내가 사람을 볼 줄 알아. 나와 취향이 같은 사람일 줄 알았어.’
감찰원의 정보에 따르면 장영후는 비록 과거 장묵한 밑에서 배웠지만 북제 조정에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북제 대신들은 그가 황태후 동생이라는 이유로 존중할 뿐 그의 명성은 아들인 위화보다도 낮았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자 술에 의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대낮부터 술상을 차려 놓고 외국 사신들과 마시기 시작했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술을 한 잔 마신 뒤 감질나는 표정으로 있는 장영후를 향해 말했다.
“좀 전에 후작 어르신의 집에 들어오려고 하니 위 통령께서 불편해하실 거라고 막더군요.”
“무슨 소립니까!”
장영후가 펄쩍 뛰었다.
“찾아온 손님을 돌려보내는 경우가 어디 있답니까! 작년에 경도에서 대인과 신기물 소경께서 저를 잘 대접해 주셨기에 오늘 보답하려는 건데 누가 토를 단다는 말입니까?!”
그 말에 범한은 안심하고 술잔을 기울였다. 술잔이 세 순배 돌자 장영후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 눈동자는 풀리기 시작했다. 장영후가 취하자 범한은 기회를 봐서 자신이 묻고 싶었던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들은 장영후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범한 대인, 진무사 지휘사 심중 대인을 만나고 싶으십니까?”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상경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후작 어르신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궁을 나가 황태후의 친필 편지를 심 대감이 이끄는 금의위에게 전달한 덕분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들었습니다. 심 대감은 명망 높은 관리기도 하시고 후작 어르신과도 교분이 두터우니 소개해 달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 말은 장영후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이미 취해서 얼굴이 불콰해진 그가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딸꾹질을 하다가 의심하는 눈초리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사신인 범한 대인이 진무사 지휘사를 만난다는 게…… 규정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범한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후작 어르신께서도 아시겠지만 사신은 뭐 하나 쉽게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도 경도 대신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어 폐하조차도 저를 보호할 수 없어 사신으로 북제에 오게 된 것입니다.”
동병상련의 정을 느낀 장영후는 딸꾹질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북제가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황태후와 관련 있는 권세가들의 입지가 좁아졌다. 그래서 장안후도 좌천당해야 했고 자신은 황태후의 친동생임에도 경국 사신으로 가서 치욕적인 협상에 서명해야 했다.
범한이 경도 대신들에게 미움받고 있다는 건 조금 놀라웠다. 하지만 재상이 사직하고 예부 상서는 교수형을 처해졌으며 열여섯 명의 고관은 참수형에 처해진 걸 들어서 알고 있었다. 회시 부정행위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북제 조정 대신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장영후는 범한의 말이 진실이라 믿었다.
“진무사 지휘사를 만나려 하는 이유는 뭡니까?”
장영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정말이지 경국에서 온 젊은 사신이 뭘 생각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돈을 벌고 싶어서입니다. 대인께서도 벌고 싶지 않으십니까?”
돈을 번다는 말에 장영후가 순간 관심을 보였다. 범한이 그의 잔에 술을 따라 주면서 가까이 다가갔다. 술자리에는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주변을 슬쩍 둘러본 범한이 소곤소곤 말했다.
“장사를 하는 겁니다. 늦어도 내후년에는 제가 경국의 황실 금고를 물려받을 거라는 소문을 들으셨겠지요? 황실 금고 상품 중 최소 4할이 북쪽으로 운반됩니다. 그러니 진무사 지휘사와 교분을 쌓아 두어야 길이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장영후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소리쳤다.
“밀수를 하겠다는 겁니까?!”
범한이 집게손가락을 입술을 갔다 대고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호탕하게 술을 한 잔 들이켠 뒤 말했다.
“후작 어르신이 보시기에 할 만한 것 같습니까?”
범한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장영후는 너무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술기운이 싹 날아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경도 관리의 배짱이 이렇게 크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장영후는 눈을 굴리며 한참을 고민했다.
‘정말 밀수를 하려 한다면 진무사 지휘사와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게 좋은 건 사실이지. 더군다나 범한이 가로채려는 건 경국 황실 금고의 돈이니 북제 조정이 손해 보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밀수로 상품 가격이 내려가면 조정은 돈을 아낄 수 있을 테니 황태후나 황제에게도 좋은 일인데 내가 굳이 안 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생각을 마친 장영후는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말했다.
“합시다! 제가 심중 대인과 만날 수 있는 주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다만 무엇입니까?”
장영후가 입맛을 다시며 범한의 눈치를 보았다.
“나는 반드시 황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오늘 모두가 이득을 볼 수 있는 장사라고 충분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후작 어르신께서는 저를 북제 조정의 손바닥에서 놀아나게 하시려는 것입니까?”
장영후도 범한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이렇게 큰일을 할 배짱이 없습니다.”
“그럼 후작 어르신께서는 할지 말지 더 고민해 보십시오.”
범한이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하더니 갑자기 장영후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만 이 일에 제 목숨이 걸려 있는 만큼 비밀은 지켜 주셔야 합니다.”
범한의 눈빛이 순간 표독스럽게 빛나자 장영후는 무서워하기는커녕 냉소를 띠었다.
‘문신 주제에 아무리 음흉한 수단을 부린다 해도 진무사의 적수는 없지.’
장영후는 밀수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생각에 범한의 진짜 신분을 잊은 지 오래였다.
그런 장영후의 눈빛을 살피던 범한은 상대방이 자신이 미끼에 걸려들었다는 걸 알아챘다. 그래서 웃으며 화제를 돌려 오늘 별궁 앞에서 장안후 집안사람들과 충돌했던 일을 털어놓으며 화해를 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범한과 심 지휘사를 어떻게 만나게 할지 그리고 황태후를 어떻게 설득할지 고심하고 있던 장영후는 생각도 하지 않고 호탕하게 대답했다.
“그 일은 해결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