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183화 (183/1,108)

183화

범한은 이곳에 경국 황실에서 운영하는 상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오래전에 섭가의 재산이었던 곳이다. 팔고 있는 물건들만 보아도 당시 어머니가 귀족들을 상대로 상당히 많은 은전을 벌어들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수수 거리를 걸으면서 어머니의 글씨가 적힌 현판을 보자 범한은 마음이 울적해져 구경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대인, 장영후 저택에 가지 않고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임정이 옆에서 걱정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순간 정신이 든 범한이 웃으면서 말했다.

“빈손으로 갈 수는 없으니 선물을 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는 팔을 걷어붙이고 가장 큰 유리 상점으로 들어섰다. 가게에는 각양각색의 유리로 만든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술잔이나 양쪽에 귀 모양 손잡이가 있는 술병 그리고 투명한 주전자 등 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외에도 다양한 생활품들이 진열되어 있었으며 그중에는 유리로 만든 작은 상자나 바둑 도구, 심지어 맑고 투명한 등잔도 있었다.

수정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 제품들을 보던 범한은 자신도 모르게 자부심이 생겼다. 이 세계에서 유유자적 살던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남긴 물건들을 보니 감탄스러웠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미 모두 다 해놨는데 내가 할 게 뭐가 있겠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동향 사람인 걸 엿들어서 아는 상인이 해맑게 웃었다.

“제가 장사를 하기 싫은 건 아니지만 경국 사람이 상경에서 유리를 사는 건 손해 보는 겁니다.”

상인의 솔직한 말에 범한이 실실 웃었다.

“나도 상경이 경국보다 비싸다는 건 알고 있네. 그러고 보니 북제 황궁에 유리가 굉장히 많이 쓰인 걸 보면 여기 사람들은 가격이 비싸도 신경 쓰지 않나 보네?”

그러자 사장이 눈썹을 씰룩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천하에서 가장 멍청한 손님이 누군 줄 아십니까? 바로 황제입니다. 심지어 예전에 우리 주인께서는 북제 황궁을 상대로 천하 거상들도 기겁할 정도의 거금을 벌어들이셨다고 합니다.”

범한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담력도 좋군. 북제에서 장사하면서 그런 말을 했다가 관리들이 잡아가면 어쩌려고 그러나?”

“무서울 게 뭐가 있습니까, 우리 경국이 천하에서 제일 강한데. 덕분에 저희 상인들도 어디 가서 무시받거나 하지 않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겁이 난 듯 상인은 더듬거리며 살며시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손님이 어쩌고 한 말은…… 실은 제가 한 말은 아니고 저희 스승께서 예전에 주인께 들었던 말입니다.”

범한이 웃으며 물었다.

“스승은 몇 번째 섭 대행수인가?”

화들짝 놀란 상인은 고개를 들어 범한을 자세히 바라봤다. 젊은 청년이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자 뭐라 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임정이 옆에서 웃으며 설명했다.

“이분은 이번 사신단의 정사이신 범한 대인이네. 설마 멀리 북방에 있다고 해서 범한 대인이 누군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러자 유리 가게 사장이 대경실색했다.

‘범한 대인이라고? 몇 년 뒤에 황실 금고를 물려받을 범한 대인이라고?!’

그러고는 재빨리 앞섶을 들추며 주저앉더니 범한을 향해 엎드려 절했다.

범한이 급히 일으키려 하자 상인은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절했다. 몇 번이나 범한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 상인이 감격한 표정으로 일어나 말했다.

“미래의 주인이 사신단의 정사로 이렇게 오셨는데 어찌 절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다른 나라에 있는 탓에 평소에 고향을 향해 절을 하고 싶어도 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고는 문득 자신이 경국 사람 앞에서 금기시되는 말을 했다는 생각에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범한 대인께서는 무슨 일로 여기 오신 겁니까?”

북제는 경국 황제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었기에 이곳에 있는 상인들은 두려울 게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오래된 현판을 사용하며 서슴없이 이전 주인인 섭경미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다. 범한도 그가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상인은 자신이 한 말이 경도에 들어가서 황실의 미움을 받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범한이 다 안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이건 뭐에 쓰는 물건인가?”

범한이 사신으로 온 김에 나중에 물려받을 상점을 조사하러 왔을 뿐 정말 물건을 사러 온 건 아니라고 생각한 상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임정이 상황을 설명하자 상인은 급히 종을 부르더니 당장 창고에 있는 최고급 상품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범한은 상인과 대화를 나눴다. 그가 뭘 알고 싶어 하는지 아는 상인이 몇 년 동안 경국에서 북제로 들여온 유리 제품의 수량을 보고했다.

대략적인 수량임에도 범한은 속으로 놀랐다. 상경에 하나밖에 없는 유리 상점에서 팔리는 수량이 어마어마했다. 아마도 북제의 생산물이 풍부하다 보니 경제력이 경국과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온 것 같았다.

대화를 나누던 사장이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요 몇 년 동안은 무슨 이유인지 경도에서 보내오는 상품들이 질이 좋지 못한 데다가 새로울 것도 없어서 장사가 잘되지 않습니다.”

“가장 좋았을 때와 차이가 얼마나 나는가?”

“3할 정도 차이가 납니다.”

범한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바로 섭가가 황실 금고로 들어간 뒤 장 공주가 모든 권한을 쥐게 된 게 문제였다. 그 미친 여자는 정치적 지혜와 수완은 대단했지만 유리나 비누를 만드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유리의 질이 나빠지는 것은 분명 원료 배합이나 제조 공정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지금 경여당 섭 대행수들이 직접 관리하지 못하는 이상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수익이 3할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경영 방식의 문제였다. 장 공주는 황실 상점들이 경국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과감한 시도를 하지 않고 이전의 방식대로만 운영했다. 가장 안정적인 방법이긴 했지만 이렇게 옛날 방식만을 고수한다면 발전할 수 없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종들이 가게에서 가장 진귀한 유리 술잔을 들고 왔다. 범한이 가게 밖 햇빛에 비춰 보니 유리에 아무런 이물질도 없는 게 경도 유리창보다 더 품질이 좋아 보였다.

“아주 좋군.”

범한의 말에 사장은 종에게 포장하라고 이르면서도 안색이 약간 어두웠다. 눈치 빠른 범한이 그 모습을 보고는 물었다.

“주인장은 성이 어떻게 되나?”

“저는 여씨입니다.”

사장이 급히 대답했다.

‘경여당 제자 중에 여씨도 있나.’

범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물었다.

“여 사장께서는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건가?”

그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범한 대인, 사실 이 술잔은 월말 황태후의 생일 때 쓰려고 준비해 둔 것입니다.”

범한이 놀라 말했다.

“북제 집권자들이 자네에게 황실 생일 선물도 제작을 의뢰하는가? 그런 거면 다른 걸 보여 주시게나.”

그가 이렇게 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여 사장은 급히 해명했다.

“북제 집권자들은 저희 가게에 좋은 물건이 많다는 걸 알고 있기에 따로 주문하지는 않습니다. 또 보여 드린 유리 술잔이 가장 비싼 물건도 아닙니다. 다만 황실 금고가 정한 규칙이 너무 엄하다 보니 대인께서 물건을 가져가시면 월말에 남쪽에서 정산할 때 금액이 많이 모자라게 돼서…….”

여 사장이 걱정하는 게 뭔지 이해한 범한이 웃었다.

“걱정하지 말게. 돈을 내고 갈 테니.”

왕계년도 옆에서 같이 웃으며 타박하듯 말했다.

“황실 금고에서 장부를 조사하러 올까 무섭다고? 자네 바로 앞에 계신 분이 미래에 황실 금고의 주인 되실 분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

여 사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쭈뼛대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범한 대인이 나중에 황실 금고를 차지할 분이라는 건 알지만, 문제는 지금 황실 금고를 관리하며 천하에 흩어진 몇천 개의 상점을 운영하는 사람은…… 범한 대인이 아니라는 사실이지.’

여 사장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범한이 차고 있던 돈주머니를 치며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북제 사신으로 오면서 돈을 가져오지 않았구먼.”

사신단 정사 신분으로 북제에 오다 보니 개인 돈을 많이 준비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여 사장이 땀을 닦으며 한 가지 생각을 내놓았다.

“대인, 공무에 필요하신 거라면 공금으로 보고할 수 있습니다. 대인께서 써주신 명세서를 제가 경도에 보내면 해결될 것입니다.”

“그래, 좋은 방법이군.”

범한이 말하자 여 사장이 기다렸다는 듯 먹과 벼루를 준비했다. 이곳에 와서 명세서를 쓰는 사신단이 많은 것 같았다. 그가 종이 위에 쓱쓱 글을 쓰자 여 사장이 조심스럽게 은전 액수를 적었다. 마지막으로 범한이 서명을 하려다가 머뭇거리며 왕계년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감찰원에 돈이 있습니까?”

왕계년이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감찰원 재정 중 삼 분의 일은 폐하께서 관리하시고 삼 분의 이는 호부에서 관리하는데, 대인의 부친께서 어찌나 꼼꼼하신지 요새 재정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범한은 고개를 돌려 고달을 바라봤다.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니 돈을 많이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시선을 느낀 고달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련님, 어르신께서 호위 재정 역시 깐깐하게 관리하십니다.”

범한이 한숨을 쉬며 임정을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홍려사 명의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임정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홍려사가 뒤집어써야 하는 분위기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쨌든 공무 자금으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임정도 아쉬울 건 없었다.

“황실 금고든 개인 금고든 국고만 한 게 없지요.”

이 말은 장 공주가 관리하는 황실 금고의 돈이든 사남 백작 범건이 관리하는 호부의 돈이든 모두 경국 금고로 흘러 들어간다는 소리였다.

사신단 정사인 범한과 부사인 임정은 각각 서명한 뒤 2,200냥이란 금액을 확인하고는 유리 가게에서 나왔다.

따라온 종이 없는 데다가 범한이 상품을 어디에 쓸지 말하지 않았기에 여 사장은 가게 종들에게 유리 술잔을 들고 따라가라고 분부했다.

이어서 범한은 장난감 가게에 진열된 상품들을 쓱 본 뒤 술을 파는 가게로 갔다. 그가 오기 전부터 고향에서 온 고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주인이 문 앞까지 나와 공손히 맞이했다.

의자에 앉아 가게 안을 둘러보던 범한은 이곳에서도 술을 담는 주기를 판다는 걸 발견했다. 하지만 자신이 ‘구입’한 유리 술잔보다는 품질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앞에 있는 사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서 가장 좋은 술은 뭔가?”

성씨인 사장이 어디선가 투명한 호리병을 꺼내 왔다. 안에 담긴 술은 사람을 매혹하는 붉은색으로 색깔이 진하면서도 탁하지는 않았다.

범한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포도주인가?”

“과연 범한 대인께서는 술과 시의 신선이라 불릴 만하십니다. 아주 맛 좋은 포도주입니다.”

일찌감치 사신단 사람들이 누군지 들어 알고 있는 성 사장이 아첨하는 눈빛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잔을 가져와 따라 주자 범한이 눈을 감고 잔을 살짝 흔들어 냄새를 맡았다. 그 모습에 과거 도둑질을 하며 호화롭게 생활했던 왕계년뿐만 아니라 임정과 성 사장 모두 속으로 과연 명문가 자제답다고 감탄했다.

하지만 사실 범한은 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할 뿐이었다. 그가 술잔을 내려놓더니 말했다.

“이거보다 더 강한 술을 가져와 보게.”

그의 말에 성 사장은 재빨리 다른 술을 내왔다. 범한이 살짝 맛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도 자신이 평소 마시던 술과 별반 차이가 없는 데다가 도수도 너무 낮았다. 담주에 있을 때 오죽이 자신에게 줬던 고량주나 공물로 진상하는 술인 공주만도 못했다.

범한의 표정을 본 성 사장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북쪽은 독한 술을 금지하고 있어서 그러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범한은 사장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돈으로 구하지 못하는 물건은 없었고 이건 북제 귀족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난처해진 사장이 다시 더 좋은 술을 내놓았지만 그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눈치를 보던 성 사장은 다시 두 병의 술을 꺼내더니 작은 잔에 따라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한 모금 마신 범한은 미간을 잔뜩 찌푸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술맛이 좋지 않아 그런다고 생각한 왕계년은 급히 물었다.

“대인, 왜 그러십니까?”

범한이 쓰읍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켜자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던 목구멍에 기분 좋은 자극이 일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좋아! 아주 좋은 술이야. 이건 이름이 뭔가?”

성 사장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오량액입니다.”

범한이 침착한 표정으로 술을 살펴보았다.

“좋은 이름이군,”

그러고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어머님은 정말 풍류를 아시는 분이었군.’

볼일을 끝낸 일행이 가게를 나서려 하자 성 사장이 범한에게 자신을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궁금한 마음에 그가 세 사람을 먼저 보낸 뒤 성 사장을 따라서 뒤편에 있는 장부를 정리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방 안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성 사장이 몸을 꼿꼿이 세우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은 범한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절했다.

“황실의 금고 성회인, 어르신을 뵙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