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181화 (181/1,108)

181화

황궁에서 나온 범한은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호위와 왕계년을 만나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북제 황제의 친위대인 어림군의 보호를 받으며 마차를 타고 별궁으로 돌아갔다. 별궁은 예상치 못한 소란에 시끌벅적한 모습이었다.

정문 앞으로 걸어가던 그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별궁 문 앞 공터에서 북제 관리와 시위들이 바닥에 쪼그려 앉아 물건을 줍고 있었고, 뒤에 커다란 마대가 놓여 있었다. 물건을 골라잡으며 뒤에 있는 마대에 던져 넣었는데 마대를 힘겹게 끄는 모습이 상당히 무거워 보였다. 범한이 토끼 눈을 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옆에 있는 왕계년에게 물었다.

“지금 뭘 하는 겁니까?”

왕계년이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공터에는 각양각색의 작은 검들이 버려져 있었다. 녹주석으로 장식된 검도 있었고, 예전 양식으로 만들었거나 최신 유행하는 양식으로 만든 검도 있었다. 물론 가장 많은 건 북제 사람들이 항상 차고 다니는 곡도였다.

범한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한번 들이마신 뒤 말했다.

“빨리 저 마대들을 뺏어 오세요. 우리가 머무르는 별궁 앞에 버렸으니 우리가 가져와야지요. 고철도 모아서 팔면 돈이 되는 법입니다.”

오늘 황궁에서 경치를 감상하고 돌아온 그는 기분이 좋아 농담 삼아 범사철과 같은 모습으로 말했다. 그러자 왕계년이 씁쓸히 웃었다.

“이런 농담까지 하시는 걸 보니 정말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범한도 씁쓸히 웃었다.

“정말 저 단검들을 다 주웠다가는 큰일 나겠지요?”

경도에서 수비대장의 딸 섭령아의 콧등을 때린 뒤로 범한은 이 세계 무예가들의 결전 규칙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바로 상대방이 자신의 발밑에 버린 칼을 줍는다면 그건 결전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소란이 벌어진 겁니까?”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때 노심초사하며 별궁 문 앞을 서성이고 있던 임정과 임문이 범한을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가 이번 협상 내용 일부를 노출하는 바람에 북제가 영토를 잃었다는 걸 알게 된 백성들이 굉장히 분개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귀족 자제들이 별궁 문 앞까지 찾아와 남쪽 사람과 무예를 겨뤄 치욕을 씻겠다고 소란을 피운 것입니다.”

범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 포로 교환과 영토 분할 내용은 북제 조정에서 절대 공개하지 않으려 한 내용인데 누가 폭로를 했다는 걸까.

‘이런 걸 보면 황궁 안에 있는 젊은 황제도 편하게 지내는 건 아닌가 보군.’

그런 생각을 하며 바닥에 널려 있는 단검을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여러분들이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저는 예부 관아에 다녀올 테니.”

그는 포로 교환이나 영토 분할, 국서 교환 등과 같은 일들은 담당하는 관리가 처리하도록 두더라도 언약해 문제만큼은 자신이 직접 하려고 했다.

“대인, 가시면 안 됩니다.”

임문과 임정은 뼛속까지 문신이라서 싸울 줄 몰랐다. 게다가 사신단에서 무예 솜씨가 가장 뛰어난 호위들은 항상 범한 곁을 지켰고, 각종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는 감찰원 고수들도 범 제사의 명령만 따랐다. 그래서 적국의 심장에서 날아오는 단검에 벌벌 떨던 두 사람은 범한마저 가버리면 북제 귀족 자제들이 소란을 피울까 봐 겁이 났다.

범한이 그런 두 사람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경국의 관리답게 체면을 지키십시오. 이만한 일로 약한 모습을 보여서 되겠습니까. 북제 조정에서 보낸 군대가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저들이 별궁 안으로 쳐들어오기야 하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범한의 눈빛에 기가 죽은 임문와 임정이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저 사람들은 범한 대인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대인께서 떠나 버리신다면 사람들이 겁쟁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순간 범한은 멀지 않은 거리에서 사신단 호위를 책임지고 있는 어림군의 표정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호위 수장인 고달도 느꼈는지 차고 있던 칼자루를 단단히 쥐었다.

범한이 몸을 돌리니 다시 문 앞으로 다가오는 무리가 보였다. 범한이 앞으로 나오자 맨 앞에서 뻣뻣이 고개를 들고 있던 귀족 자제도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범한이 손바닥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토실토실한 주먹을 인정사정없이 밀어냈다. 그는 천하에서 손꼽을 정도로 난폭한 정기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오죽의 가르침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그렇기에 갑자기 날아오는 주먹에도 당황하지 않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장풍을 쏘아 상대방의 주먹을 막을 수 있었다.

사실 그가 해당타타와 싸움을 주도하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너무나도 강한 상대였기 때문이다. 범한의 무예 수준은 이미 동년배 중에서는 최상위에 속했다.

게다가 겁도 모르고 그에게 덤벼든 귀족 자제는 기껏해야 열 살 정도 되는 어린 소년이었다. 범한의 공격에 바닥에 주저앉은 소년은 고통에 겨운 신음 소리를 냈다. 소년은 약하게 생긴 범한이 이렇게 강한 실력을 갖추고 있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자신을 넘어뜨린 범한을 노려보며 소년이 소리쳤다.

“남쪽 오랑캐가 미쳐서 날뛰는구나.”

별궁으로 돌아가려 했던 범한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웃으면서 돌아와 소년의 팔을 잡아 부축해 주려 했다. 소년의 옆에 있던 종이 긴장한 표정으로 범한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뭐라 말하려 했다.

바로 그때 관절이 분해되는 소리와 함께 비명과 분노에 찬 호통이 동시에 들렸다.

‘만약 내 어머님께서 그 말을 들었다면 너를 갈가리 찢어 죽이려 하셨을 거야.’

범한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소년을 보았다. 경국 사신단 앞에서 소란을 부리는데도 북제 어림군이 막지 못한 걸 보면 분명 상당한 세력을 가진 집안의 자제일 터.

그 소리에 소년을 따라온 종들이 몰려와 모시는 도련님이 축 처진 손을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

‘저놈이 우리 도련님의 손목을 부러뜨렸어!’

분에 받친 종들이 일어나 범한을 노려보며 뭐라 말하려 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어림군이 급히 달려와 앞을 막아섰다. 이어서 남쪽 오랑캐 어쩌고 하는 상스러운 욕설이 계속 들려왔다.

범한이 임정을 잡고는 물었다.

“저놈은 어느 집 자제입니까?”

그러자 북제 관료 사회를 잘 알고 있는 임문이 끼어들었다.

“장안후 집안 자제입니다.”

그는 장안후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자신과 주량을 겨뤘던 장영후가 떠올라 말했다.

“설마 황태후의 친동생입니까? 작년 전쟁에서 패배한 뒤 집에서 휴양하고 있다는 장영후의 동생 말입니다.”

임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안후는 작년 전쟁에서 패배한 책임으로 권세를 잃은 뒤 올해 황태후의 명령으로 다시 중용되어 이전의 세력을 회복하는 중입니다. 아마도 장안후 집안 자제가 상경 사람들이 사신단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걸 틈타 집안의 복수를 하려 한 모양입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이군요.”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사신단이 머무르는 건물로 들어가려 했다.

“사람을 때리고 도망치려 하다니!”

뒤에서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감히 우리 도련님을 때리다니 너희들이 정말 간덩이가 부었구나.”

어림군을 이끄는 수장이 상황을 통솔하고 있었기에 범한은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용히 떠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지 그는 몸을 돌려 북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저 공자가 갑자기 휘두르는 주먹을 막으려다 보니 세게 때린 것뿐이오. 이따가 저택으로 탕약값을 보내 줄 테니 그만 물러들 가시오.”

싸운 뒤에 탕약값을 배상해 주는 것은 귀족 자제들끼리 상황을 해결할 때 하는 방법이었다. 문제는 범한은 경국의 정사이며 그가 때린 소년은 북제의 귀족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니 상대측에서 이 방법을 따를 리가 없었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돌계단 밑에 서 있는 어림군 수장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위 통령, 설마 사신단과 북제 백성들이 싸우도록 해서 양국이 다시 전쟁을 치르게 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그의 말을 들은 위 통령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물론 그렇게까지 상황이 악화하지는 않겠지만 범한이 북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구타라도 당한다면 자신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순간 덜컥 겁이 난 그가 서둘러 장안후의 집안사람들을 막았다. 이후 범한이 별궁 안으로 들어가자 대문을 굳게 잠갔다.

그제야 사람들은 무지막지한 방법을 사용한 젊은 청년이 남쪽 사신단의 정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범한의 조상까지 들먹이며 상스러운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얼마 뒤 별궁 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자 밖에서 소란을 피우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하지만 나온 사람이 범한이 아니자 범한을 내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문 앞에 선 왕계년이 빙그레 웃으며 손을 모으고 사람들을 향해 인사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손에 들고 있던 벽돌과 몽둥이를 내려놓고는 그가 뭐라 말하는지 들을 준비를 했다. 바로 그때 왕계년이 손짓을 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쳐라.”

그 말과 함께 뒤에 있던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북제 사람들을 향해 돌진했다. 난데없는 상황에 위 통령이 놀라 뭐라 명령을 하려 하자 왕계년이 은근슬쩍 다가와 팔짱을 끼며 한가할 때 자신과 함께 유흥가에 가서 놀자고 말했다.

말문이 막힌 위 통령이 명령할 기회를 놓치자 어림군은 멍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남경 사신단을 안전하게 지키는 임무를 맡은 그들로서는 몽둥이를 휘두르는 남경 사신단을 보호해야 하는 건지 북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별궁 앞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곳곳에서 돼지 멱따는 것 같은 비명과 함께 공중을 가르는 몽둥이 소리가 들렸다.

위 통령이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왕 대인, 상황을 너무 악화시키는 것 아닙니까?”

“무슨 소립니까. 제가 상황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겁니까?”

왕계년이 큰 소리로 일갈했다.

“사신단이 상경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런 소란을 피우다니 북제 조정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겁니까?”

왕계년의 지시에 따라 돌진한 사람들은 비록 검은 차고 있지 않았지만 네 명의 호위와 감찰원 고수들로 북제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범씨 집안 조상들을 욕한 건 상관없지만.”

범한이 고달과 함께 별궁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담주에 계시는 할머님과 어머님을 욕한 건 절대 참을 수 없어.”

일이 커지는 걸 바라지 않은 범한이 손짓해 부하들을 불러들이자 어림군도 다시 문 앞의 질서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광경을 못마땅한 표정을 지켜보던 위 통령이 땅에 침을 뱉었다.

‘장안후 집안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가. 굳이 집안 자제까지 나서서 결투를 신청한 이유가 뭐란 말인가. 북위가 천하를 호령하던 건 예전이고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는데 경국을 건드려 좋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이때 어떤 남자가 인파를 뚫고 나왔다.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갑자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와서는 주먹을 휘둘렀다. 동작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걸 봐서는 무예 실력이 7, 8등급은 되어 보였다.

남자의 주먹은 단순했지만 상당히 빨랐다. 범 제사의 명령에 따라 돌아가고 있던 감찰원 관리들은 난데없는 공격에 재빨리 몸을 피하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느 군대에서 온 고수지?’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만으로는 상대방의 무예 수준을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위풍당당한 기세가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특히 군인 특유의 강인한 기세에 범한의 부하들조차도 슬금슬금 물러섰다.

장안후 가솔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해준 남자는 자리에 우뚝 서서 주변의 분위기를 살폈다. 응당 자신에게도 몽둥이 세례가 쏟아질 거라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자 의심하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던 중 돌계단 위에 서 있는 범한을 바라본 그가 소리쳤다.

“우리는 부대에서는 누가 나와도 6등급 이상의 고수가 온다. 콧대 높은 남경 사신아, 한번 붙어 보자!”

범한이 그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외국에 방문한 사신은 국가의 위세를 더럽히지 않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오. 군대에 소속된 분이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오?”

땅을 구르며 곡소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본 남자가 인상을 썼다.

“그럼 어린아이가 무례하게 굴었다고 집안의 종들까지 무지막지로 폭행하는 건 옳은 일이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대인은 조상과 가족을 모욕해도 참을 수 있소?”

남자가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아는 위 통령은 존경 어린 표정으로 다가가 말했다.

“담 장군께서 여긴 왜 오셨습니까?”

상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그가 덧붙여서 설명했다.

“하관은 위무기라고 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