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179화 (179/1,108)

179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9등급 고수가 놓칠 리 없었다.

“범한 대인은 다른 견해가 있으신가 봅니다?”

다만 의외인 점은 해당타타가 적의나 비꼬는 말투가 아니라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는 것이다. 북제는 치세에 관해 토론하는 문화가 발전되었기에 경국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데 관대했다.

잠시 고민하던 범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백성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먼저 근심하고 백성들이 즐거워한 뒤에 즐거움을 좇는 것은 제왕이나 신하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해당 낭자의 말처럼 폐하께서 밤낮 백성들의 고통을 잊지 않으신다면, 자각심을 가지고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실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그렇게 한다면 지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기력이 떨어지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 소신은 세상의 근심을 계속 고민하기보다는 잊을 수 있을 때는 완전히 잊는 게 좋다고 생각됩니다.”

설득력 있는 말투는 아니었다. 하지만 해당타타는 그가 맨 처음 한 말이 너무 좋아서 뒤에 뭐라고 하는지는 듣지 않은 채 앞말만 여러 번 곱씹었다.

황제는 손으로 탁자를 치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백성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먼저 근심하고 백성들이 즐거워한 뒤에 즐거움을 좇아야 한다니, 범 경의 말이야말로 진심 어린 충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라 할 만하군.”

주변을 지키고 있던 태감과 궁녀들은 황제의 말뜻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남쪽에서 온 사신의 말에 황제가 기뻐하자 미소를 지으며 범한에게 감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범한도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남몰래 속으로 이 말의 원작자인 북송 시대 위인, 범중엄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젊은 황제가 범한을 범 경이라 칭한 걸 보면 그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게 분명했다. 황제는 원래 범한과 다른 주제에 관해 대화하며 풍경을 감상할 계획이었지만 황태후가 해당타타와 함께 가라고 말하면서 범한과 편하게 대화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화제를 바꿔서 말한 것이었는데 범한이 이렇게 대답하니 더욱 흥미가 돋았다.

만족하는 얼굴로 웃던 황제가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 공자는 문예와 무예 모두 출중하니 정말 세상에 나오기 힘든 인재입니다.”

범한이 아무 말 없이 미소 짓자 옆에서 해당타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럼 범 공자께서는 천인의 도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난데없는 질문에 범한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도가 사상처럼 두루뭉술한 현담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가장 어려워하는 그로서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난처해했다. 그 모습을 본 황제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해당타타의 말을 막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범 공자가 보기에 짐이 그날 밤처럼 세상 근심을 모두 잊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같소?”

그러자 범한은 정자 주변을 둘러보더니 향로를 가리켰다.

“폐하, 저 향로를 옮기고 옆에 있는 시종들을 뒤로 물리신다면 그날 밤과 같은 기분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태감과 궁녀들에게 향로를 멀리 치운 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물러나 있으라고 지시했다. 이후 시원한 산바람이 숲의 향기를 머금고 불어왔다.

두 눈을 감고 있던 황제의 얼굴에 기뻐하는 기색이 비쳤다. 잠시 뒤 눈을 뜬 황제가 웃었다.

“맞소, 이런 기분이었지.”

범한도 웃으면서 설명했다.

“황궁에서 아무리 최고급 향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산에서 불어오는 향기와 비교할 수는 없지요.”

옆에서 해당타타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범한의 말에 동의했다.

다시 정자에 앉아 차를 마시던 범한은 마음속 의문이 갈수록 짙어졌다. 젊은 황제가 자신을 황궁에 남게 한 것은 분명 규정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다. 더구나 양국은 겉으로는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뒤로는 서로를 무너뜨릴 수단을 고민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황제는 왜 자신을 황궁에 머무르게 한 것일까.

이런 고민을 하던 차에 황제가 갑자기 탄식했다.

“짐이 공자를 황궁에 남으라고 한 이유를 아오?”

자신이 고민하던 것을 황제가 물어보자 범한은 놀랐다.

‘내 생각을 읽은 것인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일 뿐인 건가.’

범한이 황제의 눈치를 보다가 공손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황제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반한재 시집》이 좋아 남으라고 한 것은 핑계였소.”

그러고는 웃는 얼굴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물론 경의 시를 정말 좋아하기는 하오. 담박서국에서 가격을 너무 비싸게 팔기에 나랏돈으로 범 경의 시집을 발행해서 각지 서원에 보낼 정도로 좋아한다오. 짐이 이렇게까지 경을 생각하는데 느끼는 바가 없소?”

한 나라의 군주가 젊은 시인의 명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나랏돈까지 사용했는데 어째서 당사자는 감동하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그러자 범한이 똥 씹은 표정으로 느릿느릿하게 일어나 황제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는 예의를 차리면서도 속으로는 계속 욕을 했다.

‘이 세계는 해적판에 관한 자각심이 없다니까. 올해 북방 쪽 수입이 3할이나 줄어서 섭 대행수가 매일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심하고 있는데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하다니.’

해당타타가 그 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 담박서국은 범한 대인의 집안에서 운영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범한 대인은 폐하께서 하신 일에 고마워하기보다는 원망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범한이 급히 웃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폐하를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놀란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 경은 시인이면서 장사도 하는 것이오?”

범한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냥 소소하게 용돈 벌이를 하는 것뿐입니다.”

그 말에 해당타타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천하에서 가장 큰 서점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범 공자에게는 용돈 벌이밖에는 안 되는 모양입니다.”

무도하강에서 범한과 해당타타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르는 황제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둘이 티격태격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여승과 범 경은 남과 북을 대표하는 인물이지 않소. 그런데 왜 어린아이처럼 말싸움하는 것이오?”

해당타타도 자신이 평소 온화한 말투와는 다르게 신경질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범한이 웃으며 설명했다.

“아마도 해당 낭자께서는 장사가 천한 직업이라 생각해서 그런 것이겠지요.”

섭가로 인해 상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드러났지만, 각 나라 황실은 여전히 상업을 경시했고 사람들도 장사를 천한 직업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범한의 짐작과는 다르게 해당타타는 고개를 저었다.

“세상일에 귀천의 구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농업과 상업 모두 중요하지요.”

그 말에 범한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황태후의 명으로 해당타타가 동행하면서 젊은 황제는 범한과 하고 싶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답답한 마음에 황제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황제의 심경을 눈치챈 범한이 해당타타에게 눈짓을 했다. 둘만 있을 수 있게 물러나라는 표시였지만 해당타타는 모르는지 계속 황제 옆에 머물렀다.

황제가 갑자기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정자 옆으로 걸어가더니 발밑에 흐르는 시냇물을 보았다.

“범한, 대제국의 모습이 어떠하오?”

범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북제는 산수풍경이 아름답고 땅이 넓어 생산물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편안하게 살면서 즐겁게 일하니 저로서는 감탄스러울 따름입니다.”

황제가 갑자기 몸을 돌려 열일곱 살답지 않은 침착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럼 짐의 천하와 경국을 비교하면 어떻소?”

‘북제와 경국을 비교하라고?’

상당히 민감한 주제였다. 경국의 관리로서 자국을 낮게 평가할 수도 없었고 사신으로서 북제를 깎아내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꼭 태어나면서부터 답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당당하고 힘차게 말한 것이다. 그의 대답에 줄곧 평온한 표정을 짓던 해당타타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황제도 잘 관리된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입을 쩍 벌렸다.

범한이 얼굴 가득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말은 한마디였다.

“외국에서 온 신하는 알지 못합니다.”

이 말에 황제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어쨌든 외국에서 온 신하이니 경국이 어떤지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모른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지만 범한을 꾸짖을 수는 없었다.

황제가 웃었다.

“태학의 학생들에게 시선이라 불리는 범 경의 강연을 들려주면 좋을 것 같소.”

범한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경도 태학에서도 강의하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내가 어떻게 북쪽에서 강연을 할 수 있겠어.’

“범 경이 보기에 짐이 남벌을 할 수 있을 것 같나?”

위엄을 드러내며 황제가 물었다. 이런 민감하면서도 황당한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단 두 사람밖에 없었다. 다만 적국의 사신에게 한 질문인 만큼 농담 섞인 질문이기도 했다. 이에 범한은 침착한 얼굴로 담담히 대답했다.

“조금의 가능성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북제는 현실에만 안주해 싸우려 하지 않는다면 위태로워질 것이고, 경국은 힘을 믿고 싸우길 좋아하면 위험해질 것입니다. 다행히 두 분 폐하 중 한 분은 강성해지려 노력하시고 다른 분은 나라의 평화를 유지하려 하시니 양쪽의 균형이 갖춰지리라 생각됩니다.”

범한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황제가 다시 물었다.

“경국의 황제는 어떤 사람인가? 두 통의 서신을 받기는 했지만 도통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

범한이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경국의 신하인 나에게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야? 이유가 뭐지?’

범한이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자 북제 황제가 오히려 웃었다.

“자네 황제는 언젠가 늙을 것이고 짐은 언젠가 장성할 것이네. 나중에 내가 말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범 경을 나의 문학 시종 대신으로 삼을 거야.”

황제의 당돌한 말에 범한은 당당하면서도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폐하께서 손님으로 남쪽에 내려오신다면 소신이 시를 써서 축하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말에는 각자 다른 의미가 담겨 있었다. 북제 황제는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경국의 영토를 장악하겠다는 의미였고, 반대로 범한은 북제 황제가 손님으로 남쪽을 방문하면 대접하겠다는 의미였다.

서로의 의견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와중에도 범한의 표정은 침착했다.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젊은 황제는 분명 큰 포부를 가진 인물이었다. 다만 제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왕성한 혈기에 실수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입을 통해 그의 생각을 경국 조정에 전달하려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북제 황제의 얼굴에 순간 근심하는 기색이 비쳤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손을 가볍게 저었다.

“상경은 항상 평온하지만 양국 사이에 여태까지 많은 오해가 있었기에 누군가가 범 경을 방해할까 걱정스럽네. 비록 그런 사람들이 범 경을 어떻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만약 도발하려 한다면 짐을 봐서 양해해 주게.”

범한은 화들짝 놀랐다. 황제가 한 말의 내용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도 젊은 황제의 말투 때문이었다.

‘황제의 체면을 봐서 뭘 양해해 달라는 거지?’

범한은 자신이 한 나라의 황제가 중요하게 생각할 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젊은 황제가 자신을 중요시 생각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짐이 좀 피곤하니 범 경은 먼저 돌아가시게.”

젊은 황제가 난간을 가볍게 치며 고개를 돌려 줄곧 침묵하고 있던 해당타타를 바라봤다.

“범한 대인이 길을 잃지 않게 여승께서도 함께 가시오. 그리고 그동안 경국에서 온 사신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사람이 있다면 여승이 혼내 주시오.”

해당타타의 말은 애국주의에 심취해 거칠게 행동하는 사람들도 귀담아듣기 때문이었다.

해당타타가 두 손을 모아 절했다.

“폐하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범한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속으로 생각했다.

‘해당타타를 자꾸 만나는 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어.’

그때 황제가 갑자기 미소 띤 얼굴로 범한을 향해 말했다.

“범 공자가 더는 시를 짓지 않는다는 말들 듣고 굉장히 실망했소.”

범한이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폐하께서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는 모름지기 마음의 언어인 법인데 요새 외국의 사신으로 나와 마음이 편치 않으니 쓰기가 어렵습니다.”

황제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으로 말했다.

“짐처럼 멍청한 사람과 있으니 쓸 마음이 안 생기는 것이겠지요.”

그 말에 범한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자 황제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어제 황태후께서 짐에게 짧은 시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게…… ‘모르는가? 모르는가? 푸른 잎만 짙어지고 붉은 꽃은 시들었을 거란 걸.’이란 구절이었지요. 범 경은 과연 좋은 재주를 타고났습니다.”

범한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옆에 있는 해당타타를 슬쩍 보자 그녀는 더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