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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78화 (178/1,108)

178화

범한은 황제의 앳된 얼굴을 보자 순간 여러 가지 정보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이 예의 없이 황제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황제가 바라보고 있을 때 신하는 눈을 똑바로 보아서는 안 됐다.

그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북제 황제가 왜 자신을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했지만 감히 물을 수 없었다.

이때 옆에 선 임정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사인 범한이 맡은 일을 하지 않으니 부사인 그가 대신 복잡한 예절과 공무를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는 경국 황제가 보낸 국서를 읽는 중이었다.

옆에서 양국이 우정을 영원히 공고히 하고 형제로 지내자는 내용을 엄숙하게 읽는 소리를 듣던 범한은 속으로 담주에서 두부 장사를 하는 동아도 믿지 않을 만큼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북제 황제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찬성을 표시했다. 그 모습을 보며 범한은 속으로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양국의 우애로운 분위기에 도취한 것처럼 공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어서 북제 예부 관리가 앞으로 나와 아름다운 문장을 읊으며 화답했다.

평범한 과정이었지만 범한은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그는 젊은 황제 이외에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실 마음이 무겁기는 북제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경국 사신단 정사가 시선이라 칭송받는 범한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상당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자국의 대가인 장묵한에게 창피를 준 젊은 풍류가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도 궁금했던 것이다. 더구나 오늘 정전에서 입을 꾹 다물고 국사를 읽는 중요한 일마저 부사에게 넘기자 북제 군신들의 눈은 더욱 범한에게로 쏠렸다.

범한은 자신에게 쏟아진 시선을 의식하면서 반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정전을 빠른 속도로 훑었다. 북제 조정의 대신 중에서 특별한 인물은 없었다. 오히려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높은 용상 옆에서 흔들거리는 주렴이었다. 뒤에 있는 물이 주발에 비치면서 푸른 빛을 내뿜는 것이 상당히 아름다웠다.

그는 북제의 진정한 권력자인 황태후가 주렴 뒤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가 지루한 듯 하품을 했다.

“멀리서 와서 피곤할 텐데 이만 물러가 쉬시게.”

젊은 황제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범한은 체증이 내려간 듯 홀가분했다. 사신단과 함께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절한 그는 속으로 북제 실무자를 만나 언 공자의 소재를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범…… 공자?”

북제 황제가 웃는 듯 입꼬리를 올리더니 범한을 부른 것이다.

“짐과 함께 한담을 나누지 않겠나?”

대신들이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상대국의 사신에게 공자라고 칭하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너무 놀라 이 부분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젊은 황제가 왜 자신과 대화를 나누려 하는지 생각했다. 그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외국 신하가 폐하를 대면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괜찮네. 아무 문제 없어.”

젊은 황제가 두 눈을 반짝였다.

“짐은 범 공자와 마주 보고 대화하면 아주 좋겠어. 짐이 범 공자의 《반한재 시집》을 읽을 때마다 태부 대인이 범 공자의 재능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거든. 오늘 국사는 모두 끝났으니 짐과 함께 산책하면서 황궁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건 어떤가?”

황제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상 범한도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북제 태부는 장묵한의 아들이 아닌가? 나 때문에 아비가 경국 황궁에서 창피를 당했는데 내 재능을 칭찬했다고?’

사신단이 정전을 나갈 때 임정이 걱정하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여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북제 대신들과 사신단이 정전을 나가자 안은 더욱 넓어 보였다. 주변이 너무 조용해서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소리나 멀리 궁녀들이 걸어 다니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모두 나가자 용상에 앉아 있던 젊은 황제는 긴장이 풀렸는지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헤벌쭉 웃으며 범한을 바라보다가 곧장 용상에서 뛰어 내려와 태감이 건네준 수건으로 대충 손을 닦았다. 그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범한의 어깨를 쳤다.

“가세, 남조의 시선에게 북제의 선궁을 보여 줄 테니.”

범한이 속으로 통곡하며 어린아이 같은 황제를 따라가려 할 때 그가 계속 주시하고 있던 주렴 뒤에서 마른기침 소리가 들렸다. 순간 북제 황제가 멈칫하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소자가 범 공자를 만난 기쁨에 예의 없이 굴었습니다. 모후께서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궁녀들이 살며시 주렴을 걷어 내자 구슬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귀부인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 범한은 급히 고개를 숙여 주렴 안에서 나온 사람의 발끝을 바라봤다.

귀부인은 금실로 수놓은 비단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가 가장 놀랐던 점은 비단 신발을 따라 다른 발이 주렴 안에서 나온 것이었다. 천하에 북제 황태후와 함께 나란히 앉아 황제와 외국 사신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뒤에 따라 나온 사람은 헝겊신을 신고 있었다. 발목 부분에 흑백 띠가 둘려 있고 발꿈치 부분에는 꽃이 그려진 평범한 헝겊신이었다. 시골에서 새해에 자주 보는 헝겊신을 북제 황궁에서 보게 되니 이상했다.

난데없이 나온 헝겊신에 놀란 범한은 예의를 망각하고 고개를 들었다. 경계하며 올려다본 곳에는 꽃무늬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는 해당타타가 서 있었다. 해당타타가 바로 황태후와 함께 주렴 안에 있던 사람이었다.

범한과 해당타타의 눈빛이 서로 마주치자 정전의 분위기가 경직되기 시작했다. 범한은 재빨리 눈길을 거둬들이고는 해당타타 옆에 서 있는 귀부인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소신 범한, 황태후를 뵙니다.”

그를 본 황태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범한이란 경국 관리는 왜 이렇게 잘생긴 거야. 어쩐지 타타가 오늘 기어코 정전에 오려고 하더니 이유가 있었군. 설마 이놈한테 마음이 있는 건가?’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 뒤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의 여승이 돌아왔으니 범한 대인과 함께 궁궐을 다니시려면 여승도 데리고 가셔야 합니다.”

황제는 해당타타와 같이 가고 싶지 않은 듯 난색을 보였지만 황태후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기에 씁쓸히 웃었다.

“여승은 언제 상경에 돌아오셨소?”

차가운 눈빛으로 범한을 쏘아보고 있던 해당타타가 황제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폐하, 어젯밤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스승님께서 상경에 악한 사람이 너무 많아 걱정된다며 저를 황궁에 돌려보내셨습니다.”

그 말에 범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악한 사람이 많다고? 분명 춘약을 사용한 나를 지칭하는 것이겠지.’

* * *

북제 황제를 따라 황궁을 구경하던 범한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감탄했다. 황궁은 젊은 황제가 말했듯이 신선이 사는 ‘선궁’이라 할 만큼 고풍스럽고 아름다웠다.

전체적으로 색깔이 어두운 황궁 건물들 사이로 높고 푸른 나무가 뻗어 나와 있는 것이 마치 쌀쌀맞으면서도 세심한 여자가 누군가를 향해 부채를 흔들어 주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높이 솟은 푸른 나뭇가지들은 검은색 처마를 훔쳐보거나 청색 기와에 기대 기지개를 켜거나 땅에 피어 있는 꽃들을 깔보는 듯했다.

황궁의 검은색과 나무의 초록색이 어우러지면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냈다. 무엇보다도 여러 층으로 된 궁들이 푸른 산을 따라 지어진 것이 특이했다.

세 사람은 태감들의 시중을 받으며 산 중간에 시냇물을 따라 이어진 긴 복도를 걸어 2층으로 올라갔다. 비로소 놀란 마음을 어느 정도 진정시킨 범한은 주변 경치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보면 볼수록 감탄스러웠다. 산세를 따라서 황궁을 지은 것은 전쟁이나 거주 목적에서 보면 바보 같은 선택이었지만, 긴 복도 옆으로 유유히 흐르는 시냇물과 사방으로 탁 트인 푸른 경치를 보니 오래전 사람들이 이곳을 황궁 장소로 선택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름다웠다. 정말이지 너무 아름다웠다.

하지만 범한은 북제 사람이 아니었고 양옆에 아름다운 미인을 품고 풍경을 즐길 만한 신분도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옆에는 북제의 젊은 황제와 해당타타밖에 없었다.

황제는 소매가 넓은 검은색 외투에 허리에는 금실로 꾸며진 옥패를 찬 것이 고풍스러워 보였다. 그가 뒷짐을 지고 앞장서서 황궁 안을 안내했다.

범한은 쭈뼛대며 어색하게 황제를 따라가면서 이따금 옆에 있는 해당타타를 슬쩍 쳐다봤다. 그녀가 황궁 안에서는 자신을 공격하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긴장되었다.

반면 해당타타는 범한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그를 만난 적도 없고, 춘약에 중독된 적도 없으며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다는 듯이.

범한도 그저 온화한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젊은 황제가 지친 표정으로 평지에 있는 정자를 가리켰다. 그러자 따라오던 태감들이 쏜살같이 달려가더니 순식간에 정자를 깨끗하게 치우고는 불을 피운 뒤 찻잔을 가지고 왔다.

정자로 걸어가자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왔다. 황제가 뒷짐을 지고 난간 옆에 서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간을 치니 차가운 산바람 불어와 꽃과 나무가 나부끼고, 목 놓아 부르는 노랫소리에 뜬구름이 흩어지네.”

듣고 있던 범한이 맞장구쳤다.

“좋은 문장입니다.”

황제가 몸을 돌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짐에게 이렇게 성의 없이 아첨한 사람은 범 공자가 처음이오.”

당황한 범한이 두 손을 모으며 공손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불안해할 것 없소.”

황제가 앉아 차를 한 모금 들이켠 뒤 해당타타를 바라보고는 웃었다.

“오늘따라 여승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군. 이전에는 오라고 해도 응하지 않고 정원에서 채소만 가꾸지 않았는가. 이왕 이렇게 입궁했으니 마음 푹 놓고 풍경을 즐기도록 하게.”

그러고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황궁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나가고 싶지 않을 정도야.”

젊은 황제의 말에 무슨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 같았지만 범한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가 앉으라는 표시를 하자 그가 앉아서 태감이 건네주는 차를 홀짝이며 마셨다. 젊은 황제가 무슨 심경의 변화로 자신에게 남으라고 한 것인지 궁금했다.

해당타타는 정자 밖 난간에 앉아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보며 차를 마셨다.

“범 공자, 황궁의 경치가 어떠하오?”

범한이 긴장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황제가 오늘 여러 번 말한 화제가 아닌가?’

그러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황궁이 산속에 지어져 있어 주변 나무들과 어우러져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특히 겹겹이 있는 처마가 산의 풍경과 어우러지는 것이 가장 특이했습니다. 산의 경치가 황궁의 위엄을 해치지 않고, 황궁의 화려함이 푸른 경치를 가리지 않는 것이 마치 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천인합일을 이룬 것 같아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런가?”

범한의 품평에 북제 황제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북제 황제와 해당타타가 동시에 의심쩍다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황제가 내키는 대로 한 질문에 범한이 천인합일을 거론하자 두 사람 모두 놀란 것이다. 4대 종사 중 한 명인 고하 국사가 이끄는 일파는 천인합일을 중요시했지만 이것을 외부인에게 알린 적은 없었다. 그러니 범한이 풍경을 이야기하며 자연스레 천인합일을 말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해당타타가 밝게 빛나는 눈으로 범한의 얼굴을 바라봤다. 마치 그가 우연히 천인합일을 말한 것인지 아니면 황궁의 경치를 보고 알아챈 것인지 확인하려 하는 것 같았다.

오래전 철학 수업에서 지루하게 들었던 ‘천인합일’이란 말을 은연중에 꺼낸 범한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황제와 해당타타가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자 그가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조심히 물었다.

“소신이 말실수한 것입니까?”

황제가 호탕하게 웃었다.

“실수할 게 뭐가 있겠는가. 정말 시선이라 불릴 만한 사람일세. 아무 생각 없이 한 말도 이치에 맞으니 정말 대단해.”

황제가 부드럽게 웃으며 해당타타를 슬쩍 바라보았다.

“여승이 보기에 범 공자의 말이 어떠한가?”

해당타타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풍경을 통해 이치를 설명하니 인재라 할 만합니다.”

이후 계속 한담을 나누면서 이 문제는 세 사람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난달에도 여기 정자에서 오랜 시간 머무른 적이 있었네. 울창한 나무들과 구름에 걸친 달을 구경하며 시냇물 소리를 들으니 어찌나 좋은지 세상의 근심도 모두 잊을 정도였지. 그런데 요즘은 이곳에 있어도 세상일을 잊지 못하니 왜 그런지 모르겠어.”

그 말에 해당타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는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북제의 군주십니다. 폐하에게 천하의 안위와 백성들의 행복이 달려 있는데 어찌 일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세상의 근심을 잊으려 하십니까. 지금 천하의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백성의 근심을 자신의 근심으로 여기시는 것이 제왕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일 것입니다.”

해당타타의 진지한 충고에 황제가 몸을 일으켜 공손히 말했다.

“일깨워 주니 고맙네.”

범한은 해당타타의 가르침에 황제가 진지한 모습으로 감사를 표하자 상당히 놀랐다. 별것 아니라 생각했던 해당타타가 실은 북제에서 상당히 존경받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해당타타의 견해가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눈빛에 조롱기가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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