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북제에서 사신단이 머문 역참 가운데 도시에 있는 건 극히 드물었다. 경국 사신단은 이 점이 불만스러웠지만 북제 관리들이 정성스럽게 대접했기에 불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더구나 북제의 체면을 깎는 협상인 만큼 백성들에게 경국 사신단이 위풍당당하게 도시를 통과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는 곤란할 것이었다.
하지만 길가에서는 평범한 백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느 날 범한이 오랫동안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북제 사람들은 왜 우리를 미워하기보다는 멸시하거나 동정하는 눈빛으로 보는 것입니까?”
“그건 북제 사람들이 저희를 야만적인 남쪽 오랑캐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임정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설명했다.
“두 나라가 전쟁한 것을 북제 황제가 감추었기 때문에 북제 백성들은 경국이 강성하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깔보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한탄했다.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자신이 검은 줄 모르는 법이지요.”
“북제는 북위의 명맥을 이은 나라인 만큼 자신들이 천하의 정통이라 자부하며 상대국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실이었다. 북위는 이미 20년 전에 멸망했지만 주변 나라가 모두 오랑캐라는 생각은 여전히 북제 백성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줄곧 북제가 과거의 영광을 유지하고 있으며, 자신들은 여전히 천하에서 가장 강한 나라의 백성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나라 사람을 볼 때는 습관적으로 턱을 치켜들고 눈을 내리깔며 거만하거나 동정하는 표정으로 바라봤던 것이다.
그들은 과거에 머무르고 싶어 했다. 물론 북제 관리들은 세계가 이미 변했다는 걸 알았기에 경국 사신단을 정성껏 대접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임정이 계속해서 북제의 상황을 설명했다.
“북제는 과거 북위가 가진 영토와 관리들을 대부분 이어받았습니다. 그래서 천하의 서생들도 북제를 정통으로 치켜세우고 문학의 뿌리도 북제에 있다고 하는데 이 점은 맞는 말입니다. 매년 춘시 때마다 북제의 과거 시험장은 경국보다 훨씬 왁자지껄합니다. 북제의 인재들뿐만 아니라 동이성의 서생들도 모두 천 리 길을 마다치 않고 몰려드니까요.”
왕계년이 입술을 샐쭉였다.
“맞는 말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경국 서생들이 북제 상경까지 달려가서 과거 시험을 봤으니까요.”
범한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기가 막히는군요. 경국 사람이 북제에서 관리가 될 수 있습니까?”
임정이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당연히 불가능하지요. 다만 북제 춘시에서 삼갑에 든 인재는 어느 나라에서든 관리가 될 자격이 있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건 경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대인께서도 태학 봉정이셨으니 서무 대학사를 알고 계시겠지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임정이 탄식하며 말했다.
“서무 대학사도 북제에서 과거를 본 사람입니다. 그때 시험관이 장묵한이라서 그가 자신을 장묵한의 제자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서무 대학사가 북제에서 과거를 본 뒤 돌아와 경국에서 관직을 하는 것만 봐도 북제의 학문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 알 수 있지요.”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오랜 시간 문치에 공을 들이셨는데도 상황이 이러니 화가 나시겠습니다.”
“그렇지요. 무예는 천하 어느 나라도 우리를 능가할 수 없지만 문예에서는 아직 진정한 인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문학은 하찮은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범한의 말에 임정이 무언가 생각난 듯 활짝 웃었다.
“북제 대가 장묵한이 피를 토하게 만든 범 제사가 경국에 계시니 아무도 우리가 뒤떨어진다고 말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자 왕계년도 재빨리 그렇다고 호응했고 무뚝뚝한 고달도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의 명성을 경도 세력이 모두 좋게 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전쟁 이외의 분야에서 북제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인재가 나오기를 모두가 원했다.
* * *
범한은 미녀도 없는 무미건조한 여정이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기나긴 도로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차들이 달리면서 뿜어내는 흙먼지가 길 양쪽 빽빽한 나무 사이에 갇히면서 도로를 빠져나가지 못해 발악하는 황룡처럼 일렁거렸다.
흙먼지를 가로막는 가로수 나뭇잎들은 크기가 일정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경국보다는 잎이 크고 줄기도 굵고 단단했다.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바람을 맞으며 지나가는 나무들을 보던 범한은 갑작스럽게 한동안 잊고 살았던 이전 세계가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에 허베이를 거쳐 베이징으로 가는 기차를 탔을 때도 똑같은 풍경을 봤었다.
범한은 사신단 대표로 첫 번째 마차를 탔기에 창문 열고 머리를 내밀어도 먼지가 날리지 않았다. 불쌍하게 먼지를 맞고 있는 건 뒤에 있는 부하들과 북제 관리들이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길 끝에서부터 서서히 검은색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울창한 나무들 위로 검게 변한 하늘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먹구름을 올려다보던 범한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다만 어린 시절 담주에서처럼 지붕에 올라가 사람들에게 빨래를 걷고 비옷을 입으라고 소리치지는 않았다.
마차는 점차 어두운 그림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주변이 어둑어둑해졌을 무렵 갑자기 구름이 흩어지면서 주변이 환해지더니 멀리서 온 손님을 맞이하려는 듯이 따뜻한 봄 햇살이 비쳤다. 그리고 눈앞에는 거대한 도시가 보였다.
경도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도시였다. 청색 벽돌을 세 장 높이로 쌓아 올린 성벽은 약간 기울어져 있었지만 멀리서 온 사람들에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위압감을 주었다. 성벽은 언제든지 자신들을 향해 쓰러질 것 같았다. 높이 있는 누각이나 각루에는 성벽을 순찰하는 병사들이 보였다.
보는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장엄한 성벽이었다.
성문 앞은 일찌감치 정돈되어 관계없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북제 관리들만 사신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로를 달리던 마차의 속도가 점차 느려지자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던 범한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북제의 수도 상경이 아무런 징조 없이 갑작스럽게 등장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상경에 도착했다.
* * *
예절에 따라 양측이 서로 인사를 나눴다. 화려한 옷과 장신구로 꾸민 북제 관리들과 다르게 경국 사신단은 오랜 시간 마차로 이동해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침착하게 장황한 절차를 바라보던 범한은 자신을 소개하자 고개를 약간 끄덕여 보였다. 그는 북제 사람들의 눈에 건방져 보이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온통 북제 상경의 건축물에 있었다. 상경은 오랜 시간 갖은 풍파를 견디면서도 무너지지 않은 거대 도시였다. 커다란 청색 돌 가장자리는 이미 오랜 세월에 풍화되었지만 여전히 굳건해 보였다.
범한은 왠지 감격스러웠다. 그가 느끼는 감격은 여행자들이 일반적으로 느끼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이 세계에 온 뒤 처음으로 이곳 역사의 흔적을 만난 듯했다. 경국의 경도도 물론 거대한 도시지만 자신의 어머니가 남긴 것이란 생각 때문인지 오래되었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건축물들은 오랜 역사의 흔적이 느껴졌다.
“제사 대인을 뵙니다.”
생각에 잠긴 범한을 향해 임문 대인이 말했다. 임문은 북제에 설치한 경국 회관의 동사로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범한이 알록달록한 성벽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이곳에서는 범 정사라 불러 주십시오.”
임문이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멀리 외국에서 머무르고 있어 경도 상황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범 제사가 조정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처음 보는 자리에서 면박을 주자 사남 백작의 힘을 등에 업고 거만하게 군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임문의 생각을 읽었는지 사신단 부사 임정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해명했다.
“범한 대인의 뜻은 양국의 우의를 다지러 온 만큼 괜히 감찰원 신분을 사용해 북제 관리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제야 범한의 뜻을 이해한 임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군요. 범한 대인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북제에 상주해 있는 임문을 바라봤다. 외모가 단정한 것이 왠지 눈에 익은 듯했다. 그러자 임정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임문 대인은 제 사촌 형입니다.”
범한이 화들짝 놀라 웃었다.
“그랬군요. 어쩐지 눈에 익다 싶었습니다. 부자가 함께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승리하고 형제가 뭉치면 호랑이도 때려잡는다는 말이 있는데 두 분이 함께하시니 일이 순조롭게 풀리겠군요.”
북제 관리 한 명이 걸어오자 세 사람은 재빨리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돌려 성벽에 새겨진 흔적과 개미들이 기어가는 노선을 구경하는 척했다. 북제 관리가 세 사람 뒤로 가까이 오자 임문이 몰랐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위화 대인께서도 오늘 오셨습니까?”
범한도 몸을 돌려 위화란 이름의 북제 관리를 바라봤다.
두 손을 모아 정중히 인사한 위화는 임문과 잘 아는 사이인지 웃으며 타박하듯 말했다.
“자네 사신단을 맞이하는 일만 아니었으면 지금 여향원에서 즐겁게 놀고 있었을 거네.”
그의 말을 들은 범한은 그가 이홍성과 비슷한 사람인 것 같아 흥미가 생겼다.
임문이 서둘러 범한에게 소개했다.
“여기는 북제 홍려사 소경, 위화 대인이십니다. 그리고 이분은…….”
임문이 범한을 소개하려 하자 위화는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범한 대인은 천하에 명성이 자자하신 분인데 소개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범한이 멍한 표정을 짓더니 서둘러 인사를 하며 말했다.
“보잘것없는 명성일 뿐입니다.”
“겸손하신 분이시군요.”
위화란 사람은 이목구비가 또렷한 미남이었지만 눈동자가 산만한 것이 관리라기보다는 방탕한 사람 같았다.
“시선이라 불릴 만큼 시 짓는 솜씨도 뛰어나시고 감찰원 제사도 맡고 계시면서 내년에는 경국 황실의 금고도 관리하게 되실 분이 아닙니까. 더구나 최근에는 춘시 부정행위를 들춰 부패한 관리 일곱 명의 목을 날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분이 오셨으니 모를 수가 없지요.”
그러고는 호탕하게 웃더니 다시 말했다.
“경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범한 대인처럼 재능이 많은 인재를 경도에서 잘 성장하게 두지 않으시고 어째서 이곳으로 보내신 것입니까? 만일 도중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시는 건지…….”
위화가 약간은 겁을 주는 듯한 어조로 말했지만 범한은 상관없는 듯 태연하게 웃었다.
“온실 속에서 약하게 성장해서 되겠습니까.”
그러자 위화는 젊은 관리인 범한이 상경의 성벽에 관심을 보이던 걸 생각하고는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성은 지어진 지 3백 년이나 됐는데 한 번도 적군의 공격에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범한 대인이 보시기에도 웅장하지 않습니까? 경국의 성벽도 이러한지 모르겠군요.”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웅장하기는 한데 낡아서 수리가 필요해 보입니다.”
두 사람이 기 싸움을 하자 다른 사람들은 잠자코 보고만 있었다. 잠시 뒤 위화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본관의 접대가 부족하더라도 범한 대인께서 모쪼록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범한이 그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더구나 악의적인 적의라기보다는 경쟁자를 보는 듯한 적의였다.
‘오늘 처음 만났으니 미움을 살 일도 없는데 왜 나를 싫어하는 거지?’
이때 분위기를 살피던 임문이 두 사람 옆으로 다가와 하하 웃었다.
“위화 대인은 작년 경국에 사신으로 방문했던 장영후의 맏아들이십니다. 당시 장영후께서 범 정사와 함께 주량을 겨루다가 쓰러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귀국한 뒤에도 당시 일을 잊지 못하고 경국에 시도 잘 쓰고 술도 잘 마시는 젊은 인재가 있다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래서 위화 대인께서 대인과 겨뤄 보고 싶어 그러는 모양입니다.”
“그랬군요.”
범한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위화 대인을 바라봤다. 이제 보니 이목구비가 장영후와 비슷한 듯했다. 작년에 부사로 북제 사신단을 대접하면서 장영후와 여러 차례 만나 연회에서는 주량을 겨루기도 했다. 그렇다고 술친구가 됐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에 그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는 공손하게 말했다.
“위화 대인께서 부친의 복수를 하고 싶으시다면야 날을 봐서 응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다만 제가 인사불성으로 취해 양국의 일을 망칠까 걱정되는군요.”
모두가 호탕하게 웃으며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언급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