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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75화 (175/1,108)

175화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자 범한은 고개를 돌려 소은이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두 다리가 부러져서 마차에서 내려오는 게 쉽지 않았다. 무릎 아래 바지 안에서 은은한 피비린내가 났다.

북제 금의위는 젊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소은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풍문으로 들어 본 적이 있었기에 그들도 북위의 기밀 기구가 이 볼품없는 노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백발이 성성한 이 노인은 자신들이 속한 금의위의 창시자라 할 수 있었다.

소은을 데리고 가는 북제 금위의의 분위기는 무겁고 어색했다. 그들은 소은을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 난감해했다. 국가의 영웅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이전 왕조의 잔여 세력으로 봐야 할까. 자신들의 선배로 대해야 할까, 아니면 중범죄자로 대해야 할까.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그들은 자신들의 핏속에서 용솟음치는 감정을 따르기로 했다. 도로에서 위풍당당하게 있던 금의위들이 일제히 말에서 내려 한쪽 무릎을 꿇더니 소은을 향해 머리를 숙이며 외쳤다.

“초 대인을 뵙니다!”

용맹스러운 인사에 백발을 바람에 휘날리며 금의위들을 찬찬히 살펴보던 소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러고는 아무런 말 없이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던 범한은 순간 섬뜩했다. 몸을 곧게 편 소은의 뒷모습은 천하를 무게를 다 짊어질 수 있을 것처럼 단단하고 용맹해 보였다.

* * *

한편 여종들은 사리리의 마차에 올라 있었다. 어떻게 몸 안에 그렇게 많은 장식품과 도구들을 지닐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마차에 오른 그들은 먼저 사리리를 씻겼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사리리가 수가 새겨진 카펫을 밟고 마차에서 내려왔다.

그 순간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범한도 순간 눈빛이 흔들리더니 금방 평상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가늘고 긴 손가락이 드러나는 연청색 소매에 풍만한 몸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화려하게 수 놓인 옷을 입고 있었다. 검은 머리는 흑단으로 고정해 말아 올렸고 얇은 입술은 붉게 칠해져 있었다. 마차에서 나온 그녀가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구슬처럼 빛나는 눈동자로 주변을 둘러봤다.

과연 경국의 가장 유명한 기생이자 북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절세 미녀답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왕계년이 곁눈질로 범한의 안색을 살폈다. 사리리가 북제 황궁으로 들어가면 두 사람은 다시 만나기 힘들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범한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고 두 눈도 맑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그가 미소 띤 얼굴로 다가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인사한 뒤 뭐라 말하려 할 때 옆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눈빛이 느껴졌다.

범한이 불쾌함에 고개를 돌리자 노파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노파는 거만한 표정으로 차갑게 쏘아붙였다.

“우리 영토에 들어와서도 사씨 아가씨께서 남쪽 관리의 말을 들어야겠습니까?”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뭐라 대답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노파가 혀를 차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를 빤히 바라보기나 하고 남쪽 관리들은 어쩜 저렇게 예의가 없는지, 쯧쯧.”

북제 황궁 사람으로 상당한 지위를 가진 노파는 사리리가 어렸을 때 보살핀 적이 있었다. 더구나 사리리는 북제 황제가 아끼는 여자로 경국에서 고생하며 관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기에 국경에서 만나면 잘 보살피리라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던 범한이 사리리가 서 있는 마차 쪽으로 걸어가 몸 안의 난폭한 정기를 서서히 배출했다. 막고 있던 여종들이 겁을 내며 슬쩍 옆으로 비켜 주자 마차 옆에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리리가 보였다.

“방자한 놈!”

노파가 버럭 화를 냈다.

“남쪽 오랑캐 주제에 뭘 하려는 거냐? 당장 이놈을 쫓아내지 않고 뭐 해!”

그 말에 달려온 금의위 중에서 눈치 없는 몇 명이 허리에 찬 곡도를 뽑으려 했다.

사신단을 접대하는 북제 관리들은 범한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에 그 모습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범한은 재상의 사위였고, 상서의 장남이었으며, 국경 황제가 아끼는 군주의 남편이었다. 더구나 북제 대가 장묵한이 피를 토하게 만든 시선으로 절대 평범한 관리가 아니었다.

작년 전쟁에서 연패한 북제는 이번 평화 협상에서 불리한 처지에 있었기에 범한처럼 중요한 사람의 화를 돋울 수는 없었다. 이에 북제 관리들이 급히 손을 휘두르며 금의위를 물리쳤다.

그러자 노파가 더욱 화를 내며 북제 관리들을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우리 강토 안에서 남쪽 오랑캐 놈이 멋대로 구는 걸 허락한단 말이냐!”

노파는 황실 안에서만 지냈기에 세상의 흐름을 잘 알지 못했다. 그녀가 이를 갈더니 쪼글쪼글한 손바닥을 들어 있는 힘껏 범한의 얼굴을 향해 내리쳤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은은한 미소를 띤 범한이 노파의 손을 잡은 채 두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파는 약간 겁에 질린 눈빛을 하면서도 여전히 완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놔라, 늙은이 뺨이라도 때리려는 거냐!”

짝! 노파는 정말 뺨을 맞고는 다리에 힘을 풀려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그녀는 빨갛게 부은 뺨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놀란 눈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손찌검을 당해 본 적이 없는데 맞았으니 너무 놀라서 통증마저 잊은 듯했다.

범한은 노파의 얼굴에 닿은 손바닥을 옷에 닦으며 말했다.

“계속 남쪽 오랑캐라고 하시니 거칠게 대해 드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아연실색했다. 시선이라 불리는 범한 제사가 노파를 때리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노인을 말리던 북제 관리가 땀을 닦으며 범한에게 설명했다.

“이분은 황실 어르신으로 저희 관리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자 범한은 하늘을 향해 통곡하고 있는 노파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는 북제 관리가 아니니 저분의 체면을 신경 쓸 필요가 없지요. 황궁에 있는 노인들 체면 살려 주는 일에는 관심 없습니다.”

이것은 북제 황궁의 체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의미이므로 상당히 오만한 말이었다. 그 뜻을 알고 있는 북제 관리가 고개를 숙이고 이를 갈았다. 범한이 북제 황실 사람을 때리고 거만한 말을 했어도 자신보다 강대국인 경국 관리인 이상 뭐라 말할 수 없었다.

범한이 비켜선 길을 따라 마차 옆으로 걸어갔지만 누구도 그를 막지 않았다. 그가 미소 띤 얼굴로 다정하게 사리리를 바라보았다.

“황궁에 가시면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당황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던 사리리는 그 말에 재빨리 마음을 가다듬고는 얇은 입술을 오므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동안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인의 은덕에 보답할 방법이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범한이 웃었다.

“보답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마음 놓으십시오.”

간단한 몇 마디 대화로 사리리의 동생의 미래가 결정된 것이다. 이후 조용히 돌아간 범한은 사신단 마차 행렬 중간에 서서 멀리 소은과 사리리가 북제 마차에 타는 걸 지켜봤다.

눈을 가늘게 뜨고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상황이 녹록지 않다고 생각했다. 포로 교환은 기밀 협상임에도 북제 쪽은 이 일을 기밀로 다루지 않은 듯했다. 소은 같은 경우 은밀하게 수도로 이송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오늘 파견된 금의위는 너무 많았다. 사람이 많으면 기밀도 새어 나가는 법이었다.

젊은 황제가 소은을 빼내려 하는 상삼호와 소은을 죽이려 하는 해당타타 사이에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도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황실의 중요 인물인 이상 이들 사이에 낀 북제 황실의 고민도 상당할 터였다.

더욱이 이상한 점은 북제 사람들이 사리리를 대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범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렇게 신경 써서 대하는 걸 보면 북제 황제가 사리리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나 보군. 하지만 사리리가 경국 친왕의 자식이라도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 이용할 가치는 없을 텐데……. 설마 정말 사리리에게 마음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해도 황태후가 있는 이상 사리리를 황궁에 들이기 쉽지 않을 텐데…….’

그때 다리가 부러진 소은이 조용히 호송 마차에 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본 범한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호송 마차에 갇혀 자유롭지 못한 소은의 신세를 한탄했다.

* * *

사신단이 북제 영토로 들어가자 흑기들은 조용히 경국으로 돌아갔다. 사신단의 모든 안전을 북제 금의위가 책임지면서 오랜만에 쉴 수 있게 된 범한은 마음이 홀가분했다. 어쨌든 북제 영토에 있는 이상 누구도 사신단을 공격할 수 없을 것이었다.

사신단 사람 중 대부분은 과거 북제에 와본 적 있는 노인들이었고 왕계년도 과거 양국을 오가며 장사를 해본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사신단 중 해외에 나와 흥분되는 사람은 범한과 일곱 명의 호위들뿐이었다.

고달을 수장으로 한 호위들은 무예 고수답게 침착함을 유지하면서도 외국 풍경이 궁금한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연신 창밖을 바라봤다.

범한이 웃었다.

“처음 방문해서 보니 나무 종류들은 다르지만 전체적인 풍경은 북제나 경국이나 거의 비슷하군요. 날씨도 춥지 않은 것이 대호 서남쪽에 있는 황량한 초원보다는 따뜻하고.”

그러자 왕계년이 설명했다.

“북제는 동북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좋은 편입니다.”

그러자 고달이 갑자기 목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워낙에 말이 없는 사람이라 범한도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하며 귀를 기울였다.

“북제의 풍경이 정말 좋습니다. 소신이 이번 생에 가장 바라는 일이 있다면 폐하가 네 번째 북벌을 단행하실 때 소신도 천하 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마차들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도로를 질주했고, 창밖 낙엽 교목에 걸린 크고 작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렸다.

풍경을 감상하던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봄 경치가 이처럼 아름다우니 잔인한 일은 말하지 맙시다.”

말은 비록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북제 수도에서 조심해야 할 부분을 조용히 일러줬다. 추가로 협상을 진행할 필요는 없었지만 신경 써서 조심해야 할 부분은 있었다. 범한이 탄 마차에는 왕계년과 고달 말고도 홍려사 출신 임정이 사신단 부사로 타고 있었다. 네 사람은 밖에 있는 북제 사람들이 엿들을세라 조심하면서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눴다.

무도하강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이었기에 마차는 매일같이 동쪽을 향해 나아갔다. 무심하게 창밖의 무미건조한 풍경을 바라보던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소은과 사리리 낭자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녀가 황궁에 들어가기 전에 젊은 황제는 그녀에게 어떤 신분을 주려고 할까? 내가 진평평 원장의 암살 계획을 수포로 돌리면서 계획한 미인계는 성공할 수 있을까?’

범 제사의 기분이 안 좋아 보이자 옆에 있던 부사 임정이 공손하게 말했다.

“대인, 길이 멀고 힘드니 지치지 않도록 마음을 다독이셔야 합니다.”

임정은 범한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며칠 전 노파의 뺨을 때린 것이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 곽보곤의 호위 무사와 수비대장 섭중의 외동딸의 코를 부러뜨린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또 이번 사신단의 모든 일이 범 제사의 지시에 따라 진행되며 자신은 그저 자질구레한 일만 처리할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범한의 기분이 좋지 않아 중요한 일을 그르칠까 봐 걱정되었기에 조심히 말했다.

“북제 수도에는 세상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 있습니다. 그곳 여자들도 유정강 못지않게 예쁘다고 하니 도착하면 한번 가보시지요.”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들어 적적하지 않다는 표시를 해 보였다. 그는 자신이 매일 사리리 마차에 머무르는 바람에 사람들이 자신을 호색한으로 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갑자기 말했다.

“며칠을 빠른 속도로 달렸는데도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네요. 경도라면 이미 국경에서 경도까지 도착하고도 남을 거리가 아닙니까. 북제 영토가 넓긴 넓군요.”

마차 안에 순간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임정이 웃었다.

“그렇습니다. 비록 작년에 북제의 영토를 많이 가져오긴 했지만 그래도 영토와 사람 숫자로 말하면 북제가 천하에서 가장 큰 나라입니다. 내란이 끊이질 않고 민심이 분열되어 저희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뿐이지요.”

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북제가 뭉쳐서 일어난다면 경국에 큰 위협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던 중 고달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가져올 영토가 그만큼 많은 것이기도 합니다.”

고달은 말수가 아주 적은 사람이긴 했지만 최근 압송 임무에서 해방되면서 조금씩 대화에 끼어들었다. 북제의 영토를 경국이 당연히 가져와야 한다는 듯이 말하는 고달을 보고 범한이 실소를 터뜨렸다. 십여 년 동안 승리만 해온 경국 관리들은 무조건 이길 거라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왕계년이 쓴웃음을 지었다.

“고달 대인께서 웃기기까지 하시면 저는 뭐가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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