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범한은 왕계년의 아첨에는 귀 기울이지 않은 채 깊이 생각에 잠겼다. 오늘 일은 단순해 보이겠지만 사실 범한으로서는 엄청 머리를 굴린 것이었다. 먼저 그가 자신을 본관이라고 칭한 것은 자신이 관리 신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춘약 때문에 화가 난 해당타타가 더 중요한 일들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오늘 읊은 시는 송대 여류 시인인 이청조가 지은 <여몽령>이란 작품으로 언약해을 통해 해당타타를 알게 된 이후 준비한 것이었다. 그는 심지어 ‘어젯밤 비가 내리더니 아침엔 한기가 느껴지는구나. 해당화는 피었는가? 옆으로 누워 발을 올려 살펴보네.’라는 구절이 있는 당나라 시인 한악이 지은 <나기(懶起)>란 시도 준비한 상태였다.
하지만 상황상 이청조의 시가 더 어울려서 한악의 시는 읊지 않았다. 더구나 ‘해당’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시를 골라 읊으며 그녀에게 여려 보인다고 말한 것도 계산된 행동이었다. 그는 춘약에 중독된 해당타타가 여려 보인다고 한 말에 기분 나빠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1대 종사의 제자로 자란 그녀는 아둔한 백성들에게 하늘의 자손이란 칭송을 받을 만큼 대단한 실력을 지닌 무공 고수였지만 어쨌거나 여자였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여자라면 다른 사람의 눈에 약하고 여려 보이기를 원하는 법이었다.
범한은 다른 이의 마음을 잘 간파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여자의 마음은 가장 잘 이해할 줄 아는 남자였다. 남존여비 사상이 강한 이 세계에서 남자들은 여자를 평등한 태도로 대하려고 하기는커녕 여자들이 뭘 원하는지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가 품 안에서 해당타타에게 줬던 것과 똑같은 해독제를 꺼내 꼴깍 삼켰다. 그 모습을 본 왕계년이 호기심에 물었다.
“무슨 약입니까?”
범한이 그에게도 한 알 건네주었다.
“진피로 만든 환약입니다. 몸속 열을 제거해 주는 효과가 있어 항상 지니고 다니며 먹습니다.”
범한이 만든 춘약은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면 곧 좋아졌기 때문에 해독약 같은 건 없었다. 해당타타가 호수에 몸을 반나절 동안 담그고 있어도 나아지지 않았던 것은 북해에 있는 갈대 때문이었다. 그곳에 있는 갈대는 매년 봄이 되면 원통형 모양의 줄기에서 하얀 털이 자란다. 그리고 그 하얀 털은 범한이 만든 춘약과 상호 작용을 하는 성질이 있었다. 특히 여성의 경우 몸이 가렵고 마비가 되는 데다 춘약의 효과를 제거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해당타타는 아마도 해독약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약속을 지킬 것이었다.
해당타타와의 만남을 곰곰이 떠올려 보던 범한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자신이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행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 * *
그날 사신단은 호숫가 산골짜기에서 정박했다. 다리가 부러진 채 무기력하게 마차 안에 있는 소은은 자신이 북제 황실의 감옥에 갇힐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전씨 일가들은 신묘의 행방을 찾기 위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었고, 고하 국사는 그런 일을 막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 할 것이다. 그리고 호아는…… 순간 권력 싸움에 진저리가 난 그는 차라리 새벽에 범한의 손에 죽었어도 나쁜 결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경을 넘은 사신단이 아직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북제 관리들과 술자리에서 이 문제를 따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경국은 무도하강 도시 밖에 있는 시체들을 수거해 북제 군대가 무단으로 영토를 침범해 죄인을 탈옥시키려 했다는 증거로 삼으려 할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 상황은 경국이 유리했기에 북제는 범한이 속해 있는 사신단이 화를 못 참고 소란을 일으키면 뭐라 따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북제 관리들은 오랜 시간 경국 사신단의 분노를 잠재우는 데 공을 들였다.
상황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비밀 협상과 공식 협상은 다음 단계로 이어졌다.
기나긴 사신단 마차 행렬이 북해 호숫가를 돌아 다른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마차에 앉아 드넓은 대호와 그 위를 떠다니는 안개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범한은 겉모습과 다르게 마음이 복잡했다.
마차가 초원을 지나가자 땅이 바퀴에 파이면서 풀에 가려져 있던 진흙이 드러났다. 사륜마차는 바퀴가 돌아가는 힘이 상당했기에 질척한 진흙 길에서도 바퀴가 빠지지 않았다.
도시에 들어가기 전 범한은 마지막으로 사리리가 탄 마차를 찾았다.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범한이 입을 열었다.
“북제에 들어간 후에는 낭자를 보기 힘들 겁니다.”
사리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평온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그동안 대인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과 풍만하고 부드러운 몸을 바라보던 범한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는 조용히 마차에서 내려왔다.
무도하강 도시 밖 초원에는 여전히 어제 잔혹했던 싸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특히 흙 언덕 아래 있는 풀숲에는 잘린 사지와 주인 없는 무기들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마차에 기대 차창 밖 초원의 흔적들을 바라보던 범한은 어제 흑기들의 두려운 모습을 떠올리고는 속으로 진저리를 쳤다. 시체는 이미 북제로 돌려보냈으니 배상이니 지급 문제 같은 건 범한이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도시에 들어선 마차 행렬은 무심한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청색 돌길을 따라 동북동 방향으로 갔다. 범한이 탄 마차 가림막은 항상 열려 있었다. 그는 마차에 앉아 사람과 주변 풍경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검은 천으로 자신의 두 눈을 가리고 싶지 않았다.
무도하강은 경국과 북제의 국경이 맞닿은 곳에 위치한 작은 도시였다. 이렇듯 위치상으로는 국경 지대였지만 군사적 요충지는 아니었기에 지금까지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적은 없었다. 다만 양국이 배치한 병사들 사이에 작은 충돌이 종종 발생했었다. 나중에 양국의 무역과 전쟁의 중심이 무도하강에서 남쪽에 위치한 제후국으로 이동하면서 무도하강은 관심 밖으로 멀어졌다.
범한은 20년 전에 북위 영토였던 이곳이 나중에 경국 영토로 병합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시 주민들은 사신단에게 친밀한 감정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통치자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도시의 유리 기와가 반사하는 빛이 강렬하지는 않은데도 마차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범한은 눈이 부신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 그는 북제 영토로 들어간 뒤에 일어날 일들을 고민하느라 눈이 부신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소은에게서 반드시 비밀을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에게 이것은 경국 조정의 임무나 이익보다도 중요했다. 왜냐하면 오죽이 신묘에 접근한 적도 있었고, 어머니가 남긴 편지에 그녀가 몰래 신묘로 들어가 어떤 물건을 훔쳐 왔다는 걸 암시하는 문구도 있었기 때문이다.
범한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나타났다. 그는 한 번도 어머니를 본 적이 없었음에도 이상하게 섭경미란 여자에게 애정이 갔다. 오래전에 여자 혼자서 세상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신묘를 찾아 몰래 들어갔다는 사실이 감탄스러웠고, 자신의 어머니가 가진 용기와 담력, 지혜가 존경스러웠다.
그는 자신이 어머니보다 못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은 그를 주눅 들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아름다우면서도 위험한 두 번째 인생을 더욱 적극적으로 살게 했다. 그래서 그는 신묘에 찾아가 당시 어머니가 섰던 곳에 서서 그녀가 남긴 숨결을 느끼고 싶었다.
* * *
무도하강 도시 외곽에 있는 작은 강은 지금 북제와 경국의 경계선이 되는 곳이었다. 강에는 마차 한 대 정도가 지나갈 수 있는 임시 다리가 놓여 있었다.
북제 관리와 사신단으로 온 경국 홍려사 관리들은 다리 건너편에서 범한의 사신단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맞은편에는 얼굴이 누렇게 뜬 수척한 모습에 허름한 갑옷을 입은 현지 주둔군이 서 있었다. 북제의 위엄을 보이려는 것인지 아니면 창에 기대 졸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형편없는 모습이었다.
첫 번째 마차가 울퉁불퉁한 나무다리에 오르자 끼익끼익 소리가 들리면서 다리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이미 마차에서 내려 다리 건너편으로 건너간 범한은 북제 관리들과 인사를 한 뒤 고개를 돌려 마차들이 차례대로 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바라봤다. 한 대 한 대 마차가 지날수록 다리에서 나는 소리도 요란했다.
범한이 걱정되는 눈빛으로 다리를 바라보자 성이 후씨인 북제 관리가 급히 말했다.
“시험해 봤는데 문제없었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열정이 넘치는 하급 관리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해당타타가 소은을 죽이려 한다면 마차가 다리를 건널 때가 가장 좋은 기회였다.
고하 국사의 제자인 그녀는 스승의 명성을 더럽히거나 북제 백성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므로 북제 영토 안에서는 소은을 공격할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중 범한은 순간 마음이 서늘해졌다. 그는 급히 몸을 돌려 동남쪽 강기슭에 있는 백양나무 숲을 바라봤다. 길쭉한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곧게 뻗어 있는 게 창을 쥐고 서 있는 군대처럼 엄중한 모습이었다.
그곳에서 꽃무늬 옷을 입은 시골 처녀가 바구니를 허리춤에 들고 다리를 건너는 마차 행렬을 보고 있었다. 강가에 청량한 바람이 불자 머리에 쓴 꽃무늬 두건이 펄럭이면서 수수한 얼굴과 맑은 눈이 보였다.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해당타타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북제 수도에 도착하면 그녀와 다시 인사하기는 힘들 것이다. 더구나 진평평의 지시대로 고하 국사와 접촉해야 했기에 관계를 더는 악화시킬 수 없었다.
비록 소은을 암살하려 했고 자신도 죽이려 했지만 범한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실력이 감탄스러웠고, 또 초원에서 시골 처녀처럼 허리에 손을 얹고 자신에게 삿대질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잠시 뒤 마차가 옆에 멈추자 곧장 안으로 들어간 그는 더는 강기슭을 바라보지 않았다.
* * *
강을 건너고 숲을 지난 사신단은 북제의 호위를 받으며 국도에 진입했다. 코를 벌름거리며 공기의 냄새를 맡던 범한은 푸릇푸릇해진 국도 옆 나무를 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 다른 나라에 왔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더구나 국도에서 호위하는 북제 군사들의 모습도 희한했다. 도로 양쪽을 호위하는 두 진영은 한쪽은 모두 여자였고 다른 한쪽은 모두 남자였다. 여자인 쪽은 어린 여종과 민첩해 보이는 젊은 여종 그리고 연로한 노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자 쪽은 모두 비단옷을 입고 허리에는 낫 모양으로 칼날이 휘어진 곡도를 차고 있어 여자 쪽보다는 삼엄한 분위기였다.
더구나 사신단 중 최소한 절반은 경국 감찰원 관리들이었다. 마차 대열 주변으로 적대적인 감정이 피어오르면서 모든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곧게 뻗은 칼자루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양국의 기밀 기구인 경국 감찰원과 북제 금의위는 지난 십여 년 동안 여러 차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첩보전에서 이기기 위해서 두 기구는 그동안 서로의 손에 서로의 피를 묻히며 잔혹하고 무정한 싸움을 해왔다.
그러던 양측이 오늘 북제 국도에서 마주쳤으니 자연스레 사람들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북제 관리들이 재빨리 범한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아랫사람들에게 경계를 늦추라고 지시했다. 어쨌든 오늘은 양국의 화친을 위해 온 것이지 칼날을 부딪치며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뒤에 있는 일곱 명의 호위들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습이었다.
범한이 북제 영토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포로를 넘기려 하자 왕계년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상경까지는 저희가 소은을 압송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는 길에 심문할 수 있을 텐데요.”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북제 밀정들과 함께 가는 이상 심문할 기회는 없을 겁니다. 차라리 상대방에게 소은을 넘기는 게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럼 도중에 소은에게 문제가 생겨도 북제의 책임이 되니 언빙운 공자를 데려오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은 답답했다. 일단 수도로 들어가면 고하 국사의 손아귀에서 소은의 목숨을 지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고, 상삼호의 도움을 받아 소은이 다시 권력을 쥐게 된다면 그의 입을 열게 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