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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72화 (172/1,108)

172화

쓴 냄새가 코로 들어오자 소은은 천천히 깨어났다. 그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진평평은 분명 자네에게 실망했을 거네. 죽이려면 죽이고, 놓아주려면 놓아주는 거지 이렇게 우유부단하게 행동해서야 앞으로 어떻게 큰일을 할 수 있겠나!”

범한은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점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우유부단한 소인도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상대방이 자신의 호기심을 이용했다는 것도 알았고 상대방에게 북제 황실과 1대 종사 모두 관심을 가지는 비밀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죽일 수는 없었다.

소은을 죽이려 세웠던 계획은 베일에 싸인 비밀과 난데없이 나타난 시골 처녀 때문에 망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계획에서 생기는 변수를 참고 받아들이는 방법은 배웠기 때문에 조금도 울적하지 않았다.

잠시 뒤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장묵한을 잡아 선생을 위협한다면 비밀을 털어놓으시겠습니까?”

소은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총기를 잃어 흐리멍덩한 두 눈이 약간 흔들렸다. 자신과 장묵한이 형제인 걸 범한이 알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물론 선생은 독사 같은 분이니 자신의 생사만을 고려할 뿐 장묵한이 선생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는 신경 쓰지 않으시겠지요.”

계속해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대방을 압박하며 범한이 차갑게 말했다.

“그러니 나중에 기회가 될 때 저에게 비밀을 털어놓으시기 바랍니다. 만일 제가 스스로…… 신묘에 대한 비밀을 알아낸다면 제 손으로 직접 장묵한을 죽일 테니까요.”

“신묘? 신묘라니!”

범한의 말에 소은이 쉰 소리를 내며 앙상한 팔뚝을 들어 범한을 가리켰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게 자신이 아는 비밀이 신묘와 관련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이 어떻게 아는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진평평 원장을 바탕으로 추측한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원장이 자신이 가진 비밀을 전혀 모른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천하에서 원장이 모르는 건 신묘밖에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니 대인께서 아시는 비밀은 신묘와 관련 있는 것이겠지요. 선생께서 대단한 비밀을 가지고 계신 만큼 저도 해당타타가 선생을 죽이지 못하도록 지켜 드리겠습니다.”

약간 조롱하는 말투로 말하던 범한이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장님 오죽을 떠올렸다.

‘오죽 아저씨의 기억만 회복된다면 소은의 비밀을 알지 않아도 신묘에 쉽게 갈 수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소은을 죽일 수 없었다. 첫 번째는 해당타타가 진영 근처에 있는 상황에서 소은을 죽이려 했다가는 오히려 기습을 당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어머니 때문에라도 신묘가 어디 있는지 정말 알고 싶었지만 오죽이 그날의 기억을 찾을 확률은 거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는 반드시 소은이 가진 신묘에 대한 비밀을 알아내야 했다.

마차에서 나온 범한은 피곤한 표정으로 의원에게 소은을 치료하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피로한 눈을 잠시 감고 있다가 고달을 불러 손짓으로 뭐라 지시를 하려 했다. 그 순간 마차 안에서 섬뜩한 비명 소리와 함께 옅은 피비린내가 났다.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간 범한은 독기 오른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소은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

“도망친 선생을 죽일 수는 없으니 다리라도 부러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평평 원장은 선생이 가진 비밀을 몰라도 그만이었겠지만 저는 반드시 알아야겠습니다. 자살로 저를 위협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하지만 이제 보니 선생께는 자살할 용기도 없는 것 같군요.”

말을 마친 그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마차에서 내려갔다.

소은은 무릎 아래로 부러진 다리에서 배어나는 피를 보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범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감찰원을 이끈다면 미래 남쪽에서 가장 잔혹한 존재로 성장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정오 햇살이 비치는 영지를 바라보던 그는 예상치 못한 결과에 자신의 계획이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은의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마취 약의 도움을 받아 그가 가진 비밀이 신묘와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절대 고수 해당타타와 풀기 힘든 원한을 맺게 된 이상 이번 계획으로 이득을 봤다고 할 수는 없었다.

멀리서 흑기들이 주둔한 곳에서 말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찌푸리고 그곳을 바라보던 범한은 초원에서 맡은 독약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호위 한 명을 손으로 불러 흑기들에게 전할 말을 알려 줬다.

“말들이 진정이 안 된다면 맑은 물로 충분히 씻겨 주라고 하게. 암말에게 특히 효과가 있을 거야.”

호위가 말을 전달하러 가자 범한은 웃으며 사리리의 마차로 갔다. 마차에 오른 그는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이 마주 보고 있는 여자는 작년에 자신을 죽이려 한 주모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사람과 있는데 마음이 이렇게 편안해진다는 게 이상했다. 마차 안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사리리는 범한의 피 묻은 옷을 뜨거운 물에 담가 빨고는 수건으로 범한의 단단한 몸을 닦아 줬다.

“해당타타를 만난 적 있습니까?”

범한이 두 눈을 감고 있다가 갑자기 질문했다.

북제 황실에서 생활하던 때가 기억난 듯 사리리가 미간을 찌푸리자 범한이 계속 말했다.

“고하 국사의 여제자 말입니다.”

그러자 사리리가 화들짝 놀랐다.

“타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범한이 근심 어린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러고는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신선 같은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시골 처녀 같더군요. 말하는 모습이나 움직임 모두 절대 고수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타타는 예사롭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리리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설명했다.

“어려서부터 무예만 좋아할 뿐 책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고하 국사 밑에서 무예를 수련할 때도 남은 시간에는 항상 채소를 심고 밭을 갈면서 지냈으니 시골 처녀처럼 보였겠지요.”

그 말을 들은 범한은 순간 해당타타가 정왕과 비슷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천인합일을 추구하며 자연과 가깝게 지내는 걸 중요시하는 고하 국사의 제자인 만큼 시골 처녀의 모습인 게 이해가 됐다.

“위험한 사람이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사리리가 마른 수건으로 몸에 있는 물기를 닦아 주었다.

“하마터면 오늘 돌아오지 못하실 뻔하셨습니다.”

당시 상황을 비춰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하다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저의 무예 실력이 해당타타보다 부족하긴 하더군요. 하지만 지금쯤이면 해당타타가 더 괴로워하고 있을 겁니다.”

사리리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북제 영토로 들어가면 만약 해당타타가 대인을 죽이러 온다고 해도 저는 대인을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범한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북제 영토에 들어가서 그녀가 저를 죽이려 한다면 깨끗하게 죽일 수 있게 옷을 벗어 줄 겁니다. 이로 인해 양국에 전쟁이 초래되는 걸 신경 쓰지 않는다면 저를 죽이겠지요.”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사리리의 풍만한 몸을 보던 그는 그날 밤 놀잇배에서 자신이 마취 약을 사용했던 게 떠올랐다. 이어서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해당타타와 그녀의 단검이 떠오르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그가 진저리를 치자 추워한다고 생각한 사리리는 서둘러 옷을 입혀 줬다.

범한이 아는 건 자신이 두려워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해당타타란 여자가 든 단검이 무서웠다. 오늘 호위와 흑기들이 제때 개입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상대방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역시나 자신에게는 9등급 절대 강자를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 없었다. 연소을의 공격을 받고 성벽 꼭대기에서 떨어졌을 때보다 실력이 향상됐음에도 해당타타와는 차이가 크게 났다.

사실 범한이 밤과 새벽 사이에 일어난 두 번의 싸움에서 보인 용기는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섰다. 그는 어둠 속에서 암살하는 방법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방법보다 더 좋았다.

한참 뒤 하늘을 올려다본 그가 한숨을 쉬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오죽 아저씨는 여기 없으니까 내 말을 들을 수 없겠죠? 검은색 가죽 상자가 필요해요. 상자를 줘요.’

* * *

멀리 국경선과 맞닿은 갈대밭 옆 호수에서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1대 종사의 제자이자 북제 사람들에게 하늘의 자손이라 칭송받는 해당타타가 상반신을 드러낸 채 살기 가득한 눈빛을 띠었다. 물이 연신 떨어지는 젖은 머리카락에 허공을 노려보는 눈빛이 섬뜩했다.

그녀는 한 시간 동안 독을 몰아내려 애썼지만 여전히 몸 안은 불이 난 것처럼 뜨거웠다. 차가운 호숫물도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열기를 식히지 못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생각하던 그녀가 무언가 깨달은 듯 두 눈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범한, 이 후안무치한 놈!”

사실 범한이 사용한 건 독약이 아니라 춘약이었다. 사람의 몸에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는 품질 좋은 춘약. 그런데 해당타타가 정기를 운용해 독을 빼내려 한 게 문제였다. 정기를 운용하면서 체내에 약물을 더 빨리 순환시켰고 이에 초봄 차가운 호숫물 안에 있어도 가슴이 벌렁거리고 온몸이 불난 것처럼 뜨거웠다.

이를 갈던 해당타타는 한 나라의 관리이자 무예를 수련한 9등급 고수가 이런 저질스러운 방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탄식하며 욕을 퍼부었다. 더구나 그녀는 연기가 퍼졌을 때 숨을 참았는데도 증상이 나타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설마…… 싸우면서 무의식적으로 숨을 살짝 들이켜서 이렇게 된 건가?’

생각하던 그녀가 갑자기 오른손을 들어 자세히 살펴봤다. 그제야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에 살짝 그을린 자국이 있는 게 보였다. 전혀 통증이 없는 게 아마도 독침을 손으로 잡을 때 독이 묻어서 그렇게 된 것 같았다.

해당타타는 자신의 무예 실력에 자부심이 있었기에 그동안 독약에 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범한이 쏜 독침도 서슴없이 손가락으로 잡았다. 그녀는 범한이 독을 사용하는 수법이 이처럼 복잡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먼저 독침을 쏴서 손가락에 작은 화상을 입힌 다음 연기를 피워 작은 상처에 독약이 침투하게 만든 것이다.

사실을 깨달은 해당타타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범한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먼저 독침으로 화상을 입히고 춘약으로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들다니, 이런 더러운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고!’

해당타타는 고통스러운 듯 작게 신음하고는 다시 차가운 호수 깊숙이 잠수했다. 자신의 몸 안을 불태우는 화염을 잠재우기 위해 물속에서 몸을 뒹굴기도 하고 가만히 있기도 하고 헤엄치기도 하는 게 흰 물고기가 물속에서 노는 것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멀리 있던 물고기들도 다가와 수영하는 그녀의 주변을 따라 움직였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호수에 하얀 물보라가 폭발했다. 해당타타가 물을 뚝뚝 흘리며 나오더니 호숫가로 걸어갔다. 이후 시원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자 풀숲 사이로 사라진 그녀가 무명옷을 입고 다시 나왔다.

그녀는 매력 있는 얼굴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눈매가 시골 처녀처럼 정다워서 친근감이 느껴지는 외모였다. 그녀의 맑은 두 눈에 강가 모래섬에서 노는 새들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가 분노에 가득한 눈빛으로 무언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범한,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아직도 남아 있는 약 기운에 괴로움이 섞인 외침이었다.

* * *

명상하고 있던 범한이 눈을 뜨더니 발길 닿는 대로 영지를 걸었다. 초원에 널브러져 있는 북제 군인들의 시체는 먼저 무도하강을 건너간 사신단이 북제에게 강력하게 항의할 수 있는 증거가 되어 주었다.

“안타깝습니다.”

왕계년이 그의 뒤를 따라가다 한숨을 쉬었다.

“상대측이 움직일 지점을 정확하게 예측해서 소은의 사망을 저쪽에 뒤집어씌울 증거를 확실하게 마련해 두었는데, 갑자기 해당타타가 나타나 대인의 계획을 망치지 않았습니까.”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그는 멀리 산골짜기에 유유히 다가오는 안개를 보았다.

“아마 저도 그녀의 계획을 망쳤을 겁니다. 게다가 소은을 알맞은 장소, 알맞은 시기에 죽이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그가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지는 알지 않았습니까.”

“고문을 해서 비밀을 털어놓게 하는 건 어떠신가요?”

왕계년이 틀에 박힌 방법을 제안하자 범한은 그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진평평 원장이 20년간 고문해도 입을 열지 않았는데 저희가 이틀 고문한들 입을 열겠습니까?”

“그럼 어떡합니까? 정말 이대로 소은을 북제에 넘겨주실 생각입니까?”

왕계년은 소은이 무슨 비밀을 가졌는지는 몰랐지만 감찰원 관리로서 중요한 비밀을 가진 사람을 적국에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소은을 죽이고 싶어 하는 세력도 강대하고, 그를 지키려는 세력도 강대하니 일단은 북제에 넘겨주도록 하죠.”

말을 마친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그 상자를 이용해야 할까? 하지만 상자가 나한테 없잖아. 이럴 때 오죽 아저씨는 어디 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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