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그녀가 두 눈을 살짝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맑은 기운이 그녀의 몸 주변에서 생겨났다. 기운이 어찌나 강한지 풀잎에 맺혀 있던 이슬들도 춤을 추는 것처럼 날아오르더니 옅은 안개로 변하기 시작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범한은 속으로 자신이 가슴을 때리려 해서 정말 화가 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불면서 햇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새벽 봄바람에 초원의 풀잎들이 가볍게 흔들리자 해당타타의 단검도 바람에 따라 움직이면서 부드럽게 범한을 향해 다가왔다. 저번보다도 부드러운 모습이었지만 그만큼 훨씬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밤새도록 격전을 펼친 탓에 범한은 양손이 저리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9등급 절대 강자의 공격을 맞받아칠 정도의 실력도 없었다.
범한이 비수를 내려놓고는 양손을 거둬들였다. 공격하지 않고 몸에 근육과 공기 접촉을 이용해 단검의 공격을 피할 생각이었다. 이건 오래전에 오죽의 방망이를 피하려 사용했던 방법이다. 오늘 그는 이 방법을 사용해 상대방의 단검을 피할 생각이었다.
오죽에게는 실패한 방법이었지만 해당타타는 오죽이 아니었다. 9등급 절대 고수라 할지라도 오죽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해당타타의 손에 있는 단검이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범한의 몸을 휘감았다. 범한은 펄쩍 뛰거나 털썩 주저앉거나 벌러덩 눕거나 하는 등 각양각색의 익살스러운 자세로 공격을 피했다. 몸을 통제하는 능력이 뛰어난 덕분에 자세를 정확하고 빠르게 바꿀 수 있었다.
칼날은 그의 왼쪽 귀를 스쳐 진흙에 박히거나 오른손 새끼손가락 아래 풀잎에 박히거나 목 옆 이슬에 꽂힐 뿐 몸을 맞히지는 못했다.
공격이 계속될수록 해당타타의 눈에 당황하는 기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출중한 재능을 보이며 무예를 익힌 그녀는 손에 단검만 쥐고 있으면 무서운 상대가 없었다. 그래서 천하 4대 종사를 제외하고 어떤 고수도 두렵지 않았고 지금 싸우고 있는 범한도 자신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녀는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 공격하는데도 자신의 검이 계속 빗나가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매번 그녀가 공격할 때마다 상대방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가장 위험한 순간에 살짝 몸을 움직여 칼날을 피했다.
범한은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흘러내렸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닦을 수가 없었다. 매서운 공격을 피하면서 자칫하면 칼에 찔릴 뻔한 위험한 상황도 몇 번이나 있었다. 상대방의 검은 오죽만큼 빠르고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이에 범한은 피하지 않고 차라리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정으로 달려들어 상대를 압박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은 없었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에 범한은 젖은 풀잎을 밟고 넘어졌다. 상황이 너무나도 위태로워서 오죽의 교육 방법을 원망하거나 제대로 배우지 못한 자신의 능력을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검은색 화살이 공중을 가르며 해당타타의 얼굴까지 날아왔다. 그를 죽이려고 몸을 살짝 돌리는 찰나 날아온 화살이 그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두 발의 화살이 더 날아오더니 이어서 세 발의 화살이 연달아 날아왔다.
화살들은 강아지처럼 바닥을 구르고 있는 범한을 정교하게 피해 해당타타를 향해 날아왔다.
비처럼 내리는 화살을 정신없이 막던 해당타타은 손목이 저리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병풍처럼 서 있던 흑기들이 휴대용 화살로 이처럼 정확하고 매섭게 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이어서 장검이 엄청난 기세로 날아왔다. 바로 호위 수장인 고달이 휘두른 검이었다. 예리한 검 끝이 바로 앞 진흙에 박히자 놀란 해당타타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 * *
천둥소리처럼 거센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흑기들이 초원 안으로 들어왔다. 백여 필의 말이 내는 말발굽 소리에 초원의 공기는 차갑게 가라앉았고 말 위에 타고 있는 기병들은 절대 고수 해당타타를 향해 활을 겨누었다.
“운이 좋군요.”
해당타타가 가볍게 날아올라 위풍당당한 기세를 뽐내는 흑기들과 거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산발이 된 머리를 다듬으며 힘겹게 일어나는 범한을 바라보고 말했다.
범한은 씁쓸한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멀리 서 있는 해당타타를 바라보던 그가 손을 흔들어 작별의 인사를 했다.
초원이 조용해지자 흑기들이 명령에 따라 일제히 말에서 내려 외쳤다.
“제사 대인을 뵙니다!”
몸을 돌려 음산한 기운을 뿜는 흑기들을 바라본 범한은 안도감이 들었다. 그가 피곤함에 전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 퍼져 있는 독을 조금만 마셔도 말들이 불안해할 거네. 그러니 조심하도록 하게.”
* * *
진영으로 돌아가자 사신단과 동행하던 의원이 범한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이후 막사로 들어간 범한은 부하들에게 오늘은 쉬고 내일 무도하강에 들어갈 거니 준비하라고 지시하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왕계년을 바라보았다.
“누구 짓인지 알아내셨습니까?”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범한의 눈치를 보며 왕계년은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대답했다.
“마차 문을 열어 준 건 신양 측 사람입니다. 감찰원 안에 있던 첩자도 신양 측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도하강에서 소은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군대들은 위장하기는 했지만 조사해 보니 북제 대장군 여정의 사병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여정은 10년 전 상삼호 밑에서 일한 뒤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급한 사람입니다.”
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에 입은 상처가 아파져 오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소은과 상삼호의 관계를 생각하면 여정이 마중을 나오는 게 이상할 게 없지요. 소은의 탈옥은 분명 신양에서 계획한 일일 겁니다. 다만 북제 수도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는데도 소은이 굳이 탈옥하려 한 이유를 모르겠군요.”
그는 통증 때문에 장 공주가 북제와 어떤 협의를 맺은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왕계년이 상황을 분석해 설명했다.
“분명 장 공주와 상삼호 모두 소은이 북제 황실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걸 원치 않을 겁니다. 더구나 제가 봤을 때 북제 황실은 소은이 가진 비밀을 알고 싶어 하나 소은은 북제 황실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소은의 입장에서는 이대로 북제로 가면 과거의 권력을 찾지 못한 채 평생 감옥에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북제의 젊은 황제도 바보는 아니니 상삼호와 소은의 관계를 알고 있겠지요.”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하듯 낮게 중얼거리며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비밀을 가지고 있길래 북제 황실에서 그를 감시하려는 걸까. 고하 국사는 왜 해당타타를 보내 그를 죽이려 한 걸까. 설마 입을 막게 하려고? 그럼 진평평 원장은 어째서 소은을 죽이지 않고 그냥 놓아준 거지?’
* * *
“제가 멍청했던 것 같습니다.”
턱을 괴고 중상을 입은 소은을 바라보던 범한이 말했다. 맞붙기 전에는 용맹한 호랑이라 생각했던 소은이 사실은 종이호랑이인 걸 보면 적은 모두 종이호랑이라고 말한 어머니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가 잠시 생각하다 다시 말했다.
“선생을 죽이기 위해 오랜 시간 힘겹게 노력했는데 최후의 순간에는 보호하게 되는군요.”
지난 일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황당한 결과였다. 그때 소은의 쉰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 사는 일이 그런 것 아니겠나. 마음대로 되면 세상일이 아닌 게지.”
그러자 범한이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대인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있습니다.”
“해당타타는 고하의 제자고 북제에서 그 대머리 놈의 말을 무시할 사람은 없지. 내가 살아 있는 걸 해당타타가 알고 있으니 초원에서 죽어 간 군대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도 없게 된 거 아닌가. 만약 이런 상황에서 나를 죽인다면 언 공자가 무사히 경국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나?”
“도대체 어떤 비밀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범한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고하 국사가 선생을 죽이려는 이유가 뭡니까?”
“오래된 이야기일 뿐이네.”
“초원에서 선생의 비밀에 관해 이야기하자 잠복해 있던 해당타타가 살기를 드러냈습니다.”
범한은 그를 바라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다는 건 그 비밀이 9등급 절대 강자의 마음도 조급하게 만들 만큼 대단하다는 것이지요.”
소은이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해당타타가 자네를 죽이려 했다는 걸 모르는 건가?”
“아무 원한도 없는 저를 왜 죽이려 합니까?”
범한이 소은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살기가 빠진 그의 두 눈에서 오래된 비밀을 찾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네. 해당타타는 자네를 정말 죽이려 했어.”
소은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감찰원 감옥을 나온 뒤로 계속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음습한 기운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제가 봤을 때 고하 국사는 선생이 살아서 북제로 돌아가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습니다.”
“맞네.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도망친 이유는 북제 황실뿐만 아니라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장 공주도 내가 쉽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란 걸 알았기 때문이네. 자네가 말한 장 공주는 아마도 나의 생사를 이용해 호아와 어떤 협의를 성사시키려 하는 거겠지. 그녀는 너무 어려서 당시의 비밀을 알지는 못할 거야.”
소은이 계속 말했다.
“중요한 건 고하가 내 입을 다물게 만들고 싶어 한다는 거네. 그래서 사신단이 북제 국경에 들어오기 전에 나를 죽이려 한 거지. 게다가 자네는 호기심이 많은 젊은이라서 어떤 비밀인지 알아내고 싶어 할 테니, 그런 점도 고하가 나를 죽이려 한 이유라 할 수 있지. 그러니 이제 자네는 나를 죽이려는 사람들에게서 나를 보호할 수밖에 없네.”
범한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침묵했다.
“자네가 만든 함정을 깨뜨리지는 못했지만 내가 가진 마지막 패로 자네의 마음을 바꿀 수는 있었지. 내일 북제에 들어가면 자네에게 더는 기회가 없네. 그러니 이번에는…… 자네가 진 셈이야.”
소은이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히 말했다. 늙어서 예전만큼의 무예 실력은 없었지만 머리는 여전히 영리했다. 마치 백 년 묵은 여우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선생이 가진 마지막 패에는 흥미가 생기는군요. 다른 누구보다도 구미가 당깁니다. 선생이 잠시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범한은 의기소침하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운 듯 웃었다.
“하지만 무사히 상경에 도착한다 해도 상삼호가 선생을 구해 내지 못한다면 북제 황실의 감옥에 갇혀 늙어 죽거나 비밀을 말할 때까지 고문을 당하시겠지요.”
그 말에 소은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늘의 대결에서 중상을 입어 마음이 많이 약해졌다.
“무슨 비밀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범한이 초원에서 했던 질문을 다시 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도대체 뭐가 무서워서 말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저는 죽음보다 더 두려운 일이 있어서 선생이 말하지 못하는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은은 범한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어두운 부분을 발견한 듯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범한은 눈을 감고 고민하더니 손을 부드럽게 뻗어 소은의 목에 꽂혀 있는 바늘을 잡았다. 숲에서 벌어진 결투에서 소은의 경혈에 꽂은 바늘이 지금까지 그대로 있었다. 작은 바늘을 움직이자 소은은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동시에 몸에 난 크고 작은 상처들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피의 순환을 느리게 하는 효과가 있으니 지혈을 돕는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바늘을 뽑은 뒤 대략 20시간 정도 뒤에 죽게 되실 겁니다.”
범한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하고는 천천히 바늘 끝을 움직였다.
“이건 저 혼자서 수련해 얻은 무기입니다. 제가 공들여 만든 필살기지요.”
분출된 피가 입고 있는 옷과 의자를 적혔다.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고 몸도 축 처지면서 소은에게서 점차 죽음의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꾹 다문 입술을 열지 않았다.
뚝뚝 피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바늘을 다른 혈에 꽂아 지혈시켰다. 그러고는 반 혼수상태에 있는 소은의 코밑에 조심히 마취 약을 발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