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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68화 (168/1,108)

168화

깊은 밤 사냥감과 사냥꾼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지만 언제 두 사람의 입장이 번할지는 알 수 없었다. 소은은 반드시 도망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야 했다. 그리고 범한은 반드시 소은을 잡아 기회로 삼아야 했다.

소은의 흔적이 선명해질수록 검은 천 밖으로 드러난 범한의 눈이 번뜩였다. 흔적을 보니 연로한 탓인지 과거와 같은 대담함은 보이지 않았고 주사한 독약의 영향에 몸도 둔한 것 같았다.

호숫가 갈대밭을 지나 삼나무 숲에 이르자 범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눈이 예리했기에 짙은 어둠 속에서도 숲 입구에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을 볼 수 있었다. 위험을 직감한 그는 곧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린 뒤 숲의 측면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휙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무 밑 수풀 속에서 밧줄이 튀어 올라 범한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온 호위의 목을 옭아맸다. 공중에 뜬 호위는 재빨리 등에 차고 있는 장검을 빼서 밧줄을 잘랐다.

밧줄에서 벗어난 호위가 평탄한 땅 위로 착지하자 곧이어 화살이 날아왔다. 장검으로 화살을 막으며 반걸음 정도 뒤로 물러서던 그가 발밑에 있는 구덩이를 보고는 급히 걸음을 멈췄다. 구덩이는 날카로운 가지를 꽂아서 만든 함정이었다.

범한이 나무에 붙어 서서 자동으로 화살이 나가도록 설계된 쇠뇌를 해체했다. 호위가 무사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걸 본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바로 그때 숲속에서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뭇가지가 살며시 흔들거리자 갑자기 검의 그림자가 나타나 주변의 모든 공간을 가르기 시작했다.

곧이어 살을 파고드는 소리와 함께 나무들이 피를 뒤집어썼다. 칼을 휘두르는 소리가 잠잠해지자 호위의 수장인 고달이 횃불을 밝혀 죽은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죽은 사람은 소은이 아니었다.

호위들은 횃불을 끄고 반원형 진형을 갖춘 뒤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범한은 나무에 붙어서 조용히 이동하고 있었다. 소은이 마차 문을 열어 준 사람과 함께 이동하지 않은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하지만 소은의 몸속에 주입한 독약 냄새가 숲속에서 은은하게 나는 걸 봤을 때 그가 이곳에 있는 건 확실했다.

달이 구름 위로 떠오르면서 숲속에 달빛이 비쳤다. 나무를 잡은 손바닥에서 미세한 진동을 감지해 낸 그는 상대방을 죽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소은은 분명 숲속에 있었다.

2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몸에 회복하기 힘든 손상을 입은 소은은 멀리 도망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범한이 주입한 강력한 독약을 경락을 통해 몸으로 배출해 내는 데 힘을 많이 소모한 데다가 도망치면서는 추격해 오는 개들을 죽이는 데 체력을 소모해서 지쳐 있기도 했다.

나무 위로 숨은 그는 가슴이 벌렁거리면서 호흡이 가빠지자 속으로 늙으면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실감했다.

달빛이 숲속을 비추자 그의 눈에 등에 장검을 찬 일곱 명의 호위들이 보였다. 그들은 신중하게 주변을 살피며 그가 숨은 장소로 다가오고 있었다. 맨 처음 사신단에서 호위들을 봤을 때 그는 정말 놀랐었다. 경국에 감찰원 6처 말고도 이렇게 상당한 실력을 갖춘 조직이 있다는 게 무서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범한이라는 젊은 청년이었다. 소은은 범한이 자신을 죽일 명분을 세우려고 일부러 허점을 보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숲 옆에 있는 산만 넘으면 바로 무도하강이었다. 소은의 가장 비밀스러운 제자가 보낸 사람들이 국경선에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은은 주변을 침착하게 둘러보고는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사신단에서 도망친 지 두 시진이 지나 있었다. 그사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면서 해는 벌써 동쪽에서 떠오르고 있었고, 대호의 뽀얀 안개는 숲속까지 들어오기 시작했다.

숲속에 안개가 짙게 깔리는 때가 소은에게는 기회였다. 그는 소리 없이 나무 아래로 내려와 검은 진흙 위에 납작 엎드렸다. 그러고는 미꾸라지처럼 조심조심 수색하고 있는 호위들을 향해 기어갔다. 진흙 위를 기어가는 그의 마음속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이 용솟음쳤다. 바로 오래전 북위 밀정이었을 때 생사를 넘나들며 느꼈던 짜릿한 기분이었다.

그는 거친 호흡을 진정시킨 뒤 몸 안에 있는 순수한 정기로 약한 기력을 보완했다. 그러고는 안개를 엄폐물로 삼아 일곱 호위의 발밑을 스쳐 지나가려 했다. 비록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이 숲을 지나 북쪽으로 갈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휙! 휙! 휙! 세 발의 화살이 독사의 눈처럼 번쩍이며 소은을 향해 날아왔다. 낌새를 미리 알아챈 그가 왼쪽으로 살짝 몸을 움직여 화살을 피했다.

화살이 몸에 박히는 상황은 면했지만 호위들에게 위치가 노출된 건 어쩔 수 없었다. 서슬 퍼런 장검이 그물처럼 그가 있는 곳을 덮쳤다.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소은은 이미 자리를 벗어나 있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절대 강자의 모습이 마침내 드러난 것이다. 숲속에서 촤르륵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찰나의 순간에 그가 일곱 장검의 포위망 밖에 서서 두 손으로 장검을 밀어냈다.

장검이 힘없이 부러지면서 호위 두 명이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밖으로 날아갔다. 날아가는 힘이 어찌나 센지 나무에 몸이 부딪치자 충격에 나무가 부러져 쓰러졌다.

소은은 귀신처럼 백발을 늘어뜨리고 두 손에 장검을 쥐고 있었다. 이때 검 하나가 휙 소리를 내자 백발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이 번쩍이더니 두 손을 합장하고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검을 피해 안개 속으로 사라진 그의 손이 불쑥 나타나더니 피할 겨를도 없이 강한 장풍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네 명만 남게 된 호위들은 장검을 휘둘러 소은의 몸을 옭아매었다.

소은이 날카로운 고함을 질렀다. 그러고는 두 발을 굴러 아래 있는 진흙을 튀어 오르게 만들더니 호위들이 방심한 틈을 이용해 날카로운 나뭇가지를 사방으로 쏘았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들은 호위들은 장검을 휘둘러 몸을 보호하면서 눈이 찔리지 않도록 칼자루를 얼굴 앞에 붙였다. 그런데도 나뭇가지가 박혔는지 몸이 아팠고 손등에는 나무 파편이 묻어 있었다.

높은 곳에서 다시 날카로운 나뭇가지들이 쏟아져 내렸다. 두 손으로 검을 휘두르며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소은은 이미 연기처럼 사라진 뒤였다. 그는 이미 짙은 안개를 헤치며 숲 끝으로 가고 있었다.

촤르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최근에 자라나기 시작한 나뭇잎들이 강력한 힘에 떨었다. 검은색 천을 두른 범한은 하늘을 가로질러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와서는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잡으려 하는 소은을 바라봤다.

몸을 숨긴 범한은 먼저 쇠뇌 세 발을 그에게 쏘았다. 좀처럼 찾아오지 않을 좋은 기회였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화살은 빗나갔다. 그러자 그가 전광석화처럼 순식간에 소은에게 달려들어 검은 빛을 내뿜는 비수를 왼손으로 꺼내 목을 겨누었다.

그 순간 범한의 눈에 백발에 가려진 소은의 두 눈이 보였다. 목에 칼이 와 닿았는데도 너무나도 평온한 모습이었다.

사실 소은은 범한에게 모든 정신을 집중하며 지금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유에 목마른 소은이 마른 입술을 벌리고 날카로운 고함을 질렀다. 그가 칼을 쥔 범한의 왼쪽 손목을 잡고는 다른 손가락을 독사의 송곳니처럼 구부려 범한의 두 눈을 찌르려 했다.

두 사람이 나무 위에서 엄청난 기세로 힘을 겨루었다. 소은은 마치 이런 힘도 모두 계산해 둔 듯 힘의 반동을 이용해 더욱 빠른 속도로 범한의 눈을 찌르려 했다.

소은의 가는 손가락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범한의 눈을 향해 다가왔다.

짙은 안개 속에서 피부 색깔이 다른 두 손이 엉겨 붙었다. 그 순간 범한은 오른손을 꺼내 자신의 눈을 파고들려 하는 소은의 손을 잡았다. 순간 놀란 소은의 두 눈이 흔들렸다. 범한이 검은 옷 안에서 손을 꺼낼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한 것 같았다.

범한이 상대방의 행동을 순발력 있게 예측해 움직일 수 있는 건 바로 어린 시절 오죽에게 사정없이 맞으며 기른 실력 덕분이었다.

소은은 분명 무서운 상대였지만 오죽만큼은 아니었다. 범한이 깊이 심호흡하며 소은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잡자 난폭한 정기가 그의 몸을 파고들었다. 그때 풀린 반대쪽 손이 움직이면서 섬광이 안개를 찢었다.

비수의 칼끝이 빠르게 움직이며 만들어 낸 섬광이었다.

다급해진 소은은 범한의 손목을 움켜쥔 채 무릎으로 그의 아랫배를 찼다. 그러고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움직였다. 순간 엄지손톱 안에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검은 빛이 희미하게 나오더니 범한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소은이 다시 엄지손가락을 움직이려 하자 범한이 몸을 비튼 뒤 몸속 정기를 이용해 가까스로 상대방의 발길질을 피했다. 범한은 자신의 왼쪽 어깨가 축축해지는 걸 느끼면서 방금 소은의 엄지손톱 안에서 나온 칼날에 베여 피를 흘리는 것이라 짐작했다.

범한은 왼손에 들고 있는 비수로 소은의 목덜미를 노리면서 오른손으로는 끊임없이 소은과 내공을 겨뤘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당량의 체력이 소모돼 어깨가 아파 왔다. 고민하던 범한은 한숨을 쉬며 비수를 아래로 내려 순식간에 소은의 손가락을 잘랐다.

소은이 굉장히 강한 사람인 건 분명했지만 어쨌거나 노인이었다. 손가락이 잘린 통증에 그의 오른손에 힘이 약간 풀리자 범한은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얇고 긴 비수가 검은 빛을 번뜩이며 다가오더니…… 소은의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이때 두 사람은 여전히 추락하고 있었다. 칼날이 몸을 파고들자 소은은 고통에 겨운지 입을 벌렸다. 이때 그의 입 속에서 가는 바늘이 튀어나와 범한의 얼굴로 향했다.

범한이 왼발을 들어 소은의 무릎을 밟자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범한이 몸을 일부러 반 자 정도 올려 가는 바늘이 자신의 가슴에 박히도록 했다. 가슴에 통증이 전해지자 왼손을 돌려 검은색 비수를 두 개로 나누어 풍차처럼 휘두르며 소은의 오른손 손목을 벴다.

그러자 퍽 소리와 함께 범한의 눈을 파고들려 하던 소은의 왼손이 뒤로 물러났다. 순수한 정기를 가진 그는 범한의 오른손을 이길 힘이 있었다.

범한이 왼손을 힘없이 거둬들이는 듯하더니 머리칼 언저리에서…… 번개처럼 빠르게 튀어나오면서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작은 바늘을 소은의 목에 꽂았다.

소은의 몸이 경직되었고 범한도 가슴이 답답했다. 두 사람이 마침내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에 쌓인 썩은 나뭇잎에서 악취가 났다.

장검이 가로지르자 살에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짙은 안개 속에서 검을 쥔 고달은 피범벅이 된 범한을 발견했지만 소은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범한은 소은과 아주 오래 격전을 벌인 것 같았지만 사실은 나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목숨을 내건 싸움을 벌였다. 손목과 무릎으로 싸우는 두 사람의 모습은 투박해 보였다. 하지만 실은 이 싸움에는 과거 북위가 가지고 있던 가장 정교한 살인 기술과 범한이 어려서부터 갈고닦은 무예가 응축되어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실용적인 기술이었다. 만약 어떤 강자든 소은이나 범한과 안개 짙은 밤에 대결했다면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9등급 암살자들이 서로 싸우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소은은 끝났어.”

범한이 마른기침을 하며 얇은 장갑을 낀 손으로 감찰원에서 특수 제작한 옷에 박힌 바늘을 뽑았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바늘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어깨 상처에 독약이 심하게 묻지 않은 걸 확인하고는 고개를 돌려 가만히 소은이 도망간 방향을 바라봤다.

소은은 자신이 이미 끝났다는 걸 알았다. 땅에 떨어지는 순간 그는 수십 년간의 경험으로 본능적으로 썩은 나뭇잎을 몸에 문질러 냄새를 숨긴 뒤 숲 밖으로 도망쳤다.

범한과 호위들이 행적을 따라서 갈대밭을 지나 숲으로 왔다는 것은 자신의 몸에 상대방이 알아챌 수 있는 냄새가 난다는 증거였다. 소은은 기침이 나려 하자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참았다. 20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그의 심장은 이미 손상되어 있었다. 나무 위에서 떨어질 때 그는 머리보다 반응이 느린 몸 때문에 비참하면서도 슬픈 기분이 들었다.

만약 20년 전이었다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쉽게 범한을 죽였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북해무 동료들이 있었다면 일곱 명의 호위들도 손쉽게 처치하고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늙은 몸뚱이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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