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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66화 (166/1,108)

166화

농축된 독액이 요강 안으로 흘러 들어가자 소은의 눈빛이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가 두 손을 합장해 어지럽게 움직이던 몸속의 정기를 안정시켰다. 감찰원 감옥에서 그를 감시하고 고문했던 7처 전임 수장은 그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방심할 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범한은 달랐다. 경도를 나온 뒤 범한은 소은을 통제하기 위해 7처 전임 수장보다 더 잔인한 방법을 사용했다. 직접 정맥에다가 독약을 주입한 것이다. 이 방법은 소은의 신체 기능에 상당한 손상을 입혔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과거 비개가 범한에게 말했듯이 독약을 사용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넣느냐’였다. 독약의 효능이 독하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건 아니었다.

범한은 소은과 같은 비범한 인물을 만난 경험이 적었기에 그가 20년 동안 겪은 고통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소은의 몸은 이미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독소에 중독되어 있었다. 이런 독소들은 그의 몸에서 어떤 균형을 형성해 독약 중독으로 죽지 않게 했을뿐더러 정기로 독소를 배출하지도 못하게 했다.

하지만 범한이 이번에 사용한 강력한 독약은 복잡하게 얽혀 있던 균형을 깨뜨렸다. 이에 소은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지만 수십 년 동안 시달려 온 독소들을 배출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백발을 늘어뜨린 그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을 번뜩이고는 몸을 비틀거리며 안색을 창백하게 바꿨다. 누가 봐도 힘없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한편 사신단은 호숫가에 마차를 세우고 야영하기 적당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멀리서 흑기들이 매서운 겨울바람처럼 사신단 우측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앞쪽을 살펴보고는 다시 돌아왔다. 마차에 다가온 왕계년이 열쇠를 찾아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소은에게 물과 음식을 먹이고 젖은 수건으로 세심하게 얼굴을 닦아 준 그가 물었다.

“오늘도 머리를 빗겨 드릴까요?”

소은이 고개를 저었다.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았지만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그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범한은 언제 방문하나?”

범한이 언제 주사를 놓으러 오냐고 묻자 왕계년이 웃으며 대답했다.

“국경에서 멀지 않으니 매일 독약을 맞을 필요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소은은 기뻐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그저 두 눈을 감았다.

“범한 대인이 내년에 황실 금고를 장악하게 될 거라고 하던데?”

범한이 알려 줬을 거라 짐작한 왕계년은 아무 의심 없이 말했다.

“맞습니다. 천하에서 가장 돈이 많은 곳을 장악하게 되시는 거죠.”

“설마 섭가보다 돈이 많겠는가?”

소은이 약간 멸시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낯선 이름에 당황한 왕계년은 웃으며 말했다.

“섭가는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뭐라고?”

무언가 생각난 듯 소은의 두 눈이 흔들렸다. 급히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계년은 조용히 요강을 들고 마차에서 나갔다.

왕계년이 인상을 구기며 요강을 들고는 가장 가운데에 있는 천막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늙은 사람이 하루에 똥을 이렇게나 많이 쌉니다.”

“20년 동안 갇혀 있었는데도 신체 기능 회복 속도가 이렇게 빠르다니 영감탱이가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럽군요.”

몸을 돌려 왕계년 옆으로 걸어간 범한은 요강 뚜껑을 열고는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냄새가 고약하군요.”

* * *

“정말 형편없군.”

신양성 화려한 이궁 안에 걸려 있는 하얀색 면사포가 봄바람에 하늘하늘 흔들거렸다. 경도 황궁에 있는 광신궁처럼 궁 안에는 겨울 매화만 심겨 있어 초봄인데도 분위기는 초겨울처럼 서늘했다. 하얀 면사포 뒤에 놓인 평상에 앉은 여인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허름한 차림의 남자를 바라봤다.

허름한 차림의 남자의 이름은 황의로 평범한 이름과는 다르게 상당한 실력을 가진 지략가였다. 장 공주의 말을 들은 그가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말했다.

“장 공주께서는 천하에서 손꼽히는 지략가시니 모든 사람이 형편없어 보일 수밖에요.”

“그렇지만도 않아.”

장 공주 이운예가 수려한 얼굴을 가진 청년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도 상당히 영리해. 그 애가 지금의 명성을 얻은 이유를 황제 오라버니와 가까운 사이인 범건이 도와줘서라고 생각해서는 안 돼. 하지만 진평평이 그 아이를 아끼는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야.”

황의가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리더니 말했다.

“속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굳이 추측해 보자면 황제 폐하가 범한을 아끼시니 진평평도 그런 걸 수 있지요.”

“황제 오라버니야 신아를 예뻐하는 마음에 범한을 아끼실 수 있겠지. 게다가 범한은 문예면 문예, 무예면 무예 빠지는 게 없잖아. 황제 오라버니의 마음에 들 수밖에 없어.”

장 공주가 앳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영리한 애가 바보 같은 결정을 한 게 안타깝군. 제후국들을 피해 돌아가는 게 나아서 그렇게 한 것이겠지만 대호가 있는 황량한 초원은 탈출하기 딱 좋은 장소잖아.”

“보고에 의하면 흑기들도 같이 있다고 합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장 공주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해서 소은이 도망가지 못할 것 같아?”

“소은이 왜 도망치겠습니까?”

황의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장 공주께서 상삼호와 맺은 계약에 따르면 소은은 북제로 돌아가 과거 힘을 회복한 뒤 안으로는 조정과 연합하고 밖으로는 두 제자와 힘을 합쳐 북제 황실을 전복해야 하지 않습니까.”

“소은은 진평평처럼……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야. 그런 사람을 북제 황실에서 내버려 둘 것 같아? 이대로 북제로 간다면 그는 완전히 북제 황실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고, 어쩌면 다시 감옥에 갇혀 늙어 죽을 수 있어. 그럼 나와 상삼호가 세운 계획도 실패하는 것이지. 내가 명성을 버리고 불쌍한 언빙운을 팔아넘기면서까지 소은에게 자유를 준 건 그렇게 해야 상삼호가 약속을 이행할 것이지 때문이야. 그러니 나는 이 일을 망치는 꼴은 볼 수없어.”

“만약 상삼호가 마음을 바꾸면 어찌합니까? 그는 어쨌든 북제의 장군입니다.”

“소은이 북제에게 헌신하고 싶어 할 거라 생각하나? 두고 봐. 상삼호가 굳이 반역을 저지르고 싶어 하지 않아도 멍청한 전씨 집안이 알아서 그렇게 만들 거니까.”

황의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세심한 부분까지 생각해 두셨군요. 이렇게 주도면밀하시니 누가 장 공주마마의 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부 떨지 마.”

부끄러운 장 공주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래도 나는 황제 오라버니보다는 부족하지.”

그녀가 한숨을 쉬며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봤다. 걸려 있는 하얀색 면사포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한 모습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옆에 있는 황의도 그녀의 미모에 반한 듯 정신을 잃고 바라봤다.

“지난번 글 종이 사건 때문에 공주마마의 명성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황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배후가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아 안타깝지만, 경도 수비사가 보내온 소식에 따르면 광신궁에 자객이 잠입했던 일은 감찰원과 관계가 있을 거라 합니다.”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턱을 괴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장 공주가 잠시 뒤 중얼거렸다.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마. 지금은 상삼호를 완전히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집중해야 하니까.”

그 말에 입을 다문 황의가 잠시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소신이 봤을 때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공주께서 밤낮으로 조정을 위해 헌신하시지 않습니까. 작년 외양간 거리 사건만 해도 멍청한 관리와 백성들은 그저 장 공주께서 황실 금고 관리권을 되찾고자 범한을 죽이려 한 일이라고만 생각할 뿐, 폐하께서 북쪽으로 병사를 보낼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조정은 이 일로 많은 영토를 얻었으면서도 이 일이 공주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말을 듣던 장 공주 이윤예가 조금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만해.”

황의가 아랑곳하지 않고 장 공주의 청초한 얼굴을 보며 계속 말했다.

“언빙운의 일도 그렇습니다. 공주께서 몰래 계획을 세우시던 와중에 생각지도 못하게 그의 신분이 드러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경국 백성들은 공주께서 다른 나라와 내통했다고만 생각합니다. 공주처럼 존귀하신 분이 다른 나라와 내통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입니까. 아둔한 사람들은 사건의 겉만 보지 공주께서 세운 교묘한 계획으로 조정이 얻을 이득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장 공주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대뜸 말했다.

“원굉도가 도착하면 나에게 알려 줘.”

말을 잘린 황의가 입을 다물자 잠시 뒤 장 공주가 키득키득 웃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미쳤다고 비웃고 나는 세상 사람들이 식견이 없다고 비웃지. 황제 오라버니가 잘 지내고 경국이 번성한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 황의는 더는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진평평은 자신만의 계획이 있을 거야.”

장 공주는 그런 황의의 모습에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범한도 자신만의 계획이 있겠지. 사실 모두의 계획은 내용상 차이가 있을 뿐 방향은 거의 비슷해. 만약 소은이 이번에 도망간다면 북제 수도에 도착한 사신단에게 연락해 범한이 우리와 함께 행동하게 할 거야.”

황의가 화들짝 놀랐다.

‘설마 적과 손을 잡겠단 말인가?’

그의 속마음을 읽은 장 공주가 빙그레 웃었다.

“별일 아닌 걸로 장광설을 늘어놓는 건 나를 감동하게 하려는 속셈인 거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너희 같은 보잘것없는 것들이 그렇게 아부하는 거야.”

“소신이 어찌 그러겠습니까.”

황의는 비지땀을 흘리며 장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럼 연소을이 추진하고 있는 계획을 잠시 중단시킬까요?”

“왜 중단하려는 거지?”

장 공주가 웃으며 바라보자 한기를 느낀 황의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범한이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아서 마음에 들어. 그래서 그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게 너무 아쉬워. 생사를 막론하고 아름다운 청년인 건 사실이잖아.”

경국에서 가장 속을 알 수 없는 여인인 장 공주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라고 천하의 무대에 서지 말란 법은 없잖아. 이전에 그 여자처럼 나도 세상에 사라지지 않을 흔적을 남기고 말겠어.’

과거 범한은 진짜 마음을 두고 사리리를 대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항상 마음속에 누군가의 얼굴을 두고 있었기에 사리리의 빼어난 외모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경도를 나온 뒤 오랜 시간 함께 이동하면서 사리리는 범한의 마음속에 옅은 흔적을 남겼다.

그녀가 불쌍해서일 수도 있고 감찰원에서 사용한 방법이 너무 잔인해서이거나, 아니면 감찰원 감옥을 처음 찾아갔을 때 7처 전임 수장이 했던 말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마음을 단호하게 먹으려는 것과는 다르게 범한은 사리리가 가엽게 느껴졌다. 사리리에게서 느껴지는 가련함은 인생의 시련에서 생긴 자연스러운 모습이기에 장 공주에게서 느껴지던 것과는 달랐다.

요 며칠 동안 범한은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약물과 호숫가에서 찾은 식물을 배합해 해독약을 만들었다. 사리리가 알려 준 진평평의 생각이 진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약속인 만큼 해독약을 만든 것이다.

범한의 머릿속에는 이미 진평평 원장이 계획한 미인계 임무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더욱 간단하고 확실한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해독하면서 사리리는 표면적으로는 달라진 건 없어 보였지만 볼일을 보는 횟수가 늘었다. 그때마다 범한이 옆에서 조용히 지키고 있어서 사리리는 부끄러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신단 마차 행렬은 점차 동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틀 정도 대호를 돌아가면 북위 군사들에게 호위 업무를 넘길 장소인 무도하강에 도착할 터였다.

“북제에서는 이 호수를 북해라고 부릅니다.”

사리리가 호숫가에 서서 손가락으로 갈대를 쓸며 말했다. 그러자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범한이 물었다.

“언제 경국을 떠났습니까?”

“어렸을 때입니다. 부모님께서 저와 남동생을 데리고 도망을 다니셨는데 감찰원의 추격이 거세서 심복들도 모두 죽고 우리를 받아 주려는 사람도 없었지요.”

사리리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사실 저는 아버님의 모습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황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가장 컸던 친왕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사리리의 말을 들은 범한은 속으로 시기를 계산해 보았다. 경국에서 친왕 암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오래전의 일이었다. 바람에 날리는 사리리의 치맛자락을 보며 범한은 속으로 그녀의 아버지를 자신의 어머니가 죽였다는 사실을 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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