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더구나 소은은 재상이 이번 일로 자리에서 내려올 거라고도 말했었다. 하지만 그런 조짐은 전혀 없는 데다가 회시 부정행위에 재상은 연루되지 않았고, 재상과 원수가 된 장 공주는 멀리 신양에 있기에 범한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말대로 진행되었고 범한은 그가 명성대로 대단한 실력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범한이 한숨을 쉬며 소은을 바라보았다.
“정말 궁금한 게 있습니다. 감찰원은 왜 선생을 잡았을 때 바로 죽이지 않았을까요?”
“그건 내 머릿속에 유용한 것들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지.”
“그럼 최소한 사지를 자르는 등의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뭐라고? 어떤 일이든 용납할 수 있는 선이 존재하는 법이다. 만일 그 선을 넘었다면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거야. 그건 감찰원이 원한 결과가 아니지 않으냐.”
눈썹을 치켜세우며 고민하던 범한은 소은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인사하고 마차에서 나왔다.
마차 옆에 서서 멀리 호숫가 갈대밭을 바라보던 그는 황제 폐하의 진정한 뜻을 이해했다. 고인 물은 언젠가 썩듯이 조정에는 새로운 피가 필요했고, 재상은 이미 너무 오랫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경도에서 우뚝 서려면 먼저 재상이 자리를 비워 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임약보가 백관의 수장인 이상 황실은 범한이 감찰원을 장악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내년에 황제가 범한을 중용하려면 재상이 먼저 떠나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범한이 엄청난 압박을 받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왠지 황제가 자신이 압박받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항상 흐르며 맑음을 유지하는 강물처럼 조정도 항상 새로운 물결이 필요했다. 범한은 새로운 물결이었고 재상은 밀려나야 할 낡은 물결이었다. 그는 역사 무대에서 내려와 앞 세대를 위해 공간을 비워 줘야 했다.
이건 관료 사회의 정상적인 흐름인 만큼 재상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결과였다. 하지만 범한은 경도에 남아 있는 완아와 대보를 생각하니 걱정스러웠다.
“아버님과 진평평 원장이 남은 임씨 가문 사람들을 보살펴 주셨으면 좋겠는데.”
그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를 바라보았다.
“갈대는 왜 녹색이 아닐까?”
순간 가슴이 울렁대면서 이번 사건에서 감찰원이 맡았을 역할이 생각났다.
진평평 원장이 황제의 뜻을 몰랐을 리 없다. 재상의 일에 감찰원이 관련되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자 그의 마음이 분노로 일렁였다. 그때 사리리의 몸 안에 독약이 있다는 사실이 생각나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진평평은 범한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있었다. 설사 그것이 범한의 가족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매정하고 잔인한 방법을 쓰는 것이 당사자인 범한의 기분마저도 신경 쓰지 않은 것 같았다.
* * *
오랜 시간을 달린 사신단은 오후 무렵에 국경 가까이 있는 커다란 호수에 도착했다. 이름 없는 이 호수는 유달리 커서 그냥 대호라고 불렸다. 범한이 마차에 내려 드넓게 펼쳐진 호수를 바라봤다. 수면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모두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대호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호수를 돌아 북제의 국경에 들어가려면 며칠은 더 가야 했다. 범한은 소은이 정말 도망치려 한다면 이 며칠 동안 움직일 거라 생각했다.
멀리서 물새가 호수 수면에 바짝 붙어 날다가 긴 부리를 물속에 넣더니 순식간에 물고기를 잡아 날아갔다. 호숫가로 날아간 물새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팔딱이는 물고기를 단숨에 삼켜 버렸다. 무척이나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복잡한 표정을 짓던 사리리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편하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한동안 자신을 만나러 오지 않던 범한이 갑작스럽게 질문을 던지자 사리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잠시 멍하게 범한을 바라보던 그녀는 왠지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작은 미물도 편하게 살고 싶어 하듯이, 소첩도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있지요.”
이때 마차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가볍게 흔들리자 범한이 사리리 옆에 주저앉았다. 그와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 사리리가 슬쩍 옆으로 옮기자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본인의 몸에 독약이 있다는 걸 낭자는 모르는 것 같습니다.”
사리리가 아름다운 두 눈으로 범한을 가만히 바라봤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정말입니까?”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감옥에서 살다 나온 제가 놀랄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자조하는 목소리로 탄식하듯 말하는 사리리는 상당히 유혹적이었다.
“독약에 정통하신 범한 대인께서 제 몸에 독약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사실이겠지요. 감찰원에서 저를 통제하기 위해 무슨 수를 썼을 거라고는 예상하였습니다.”
범한은 말없이 아름다운 사리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실 경도에서 지금까지 본 여자들 중에서 사시리만큼 요염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본 적 없었다.
“낭자를 통제하려는 게 아닙니다.”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북제 황제를 다루기 위해 그리한 것입니다.”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던 사리리가 화들짝 놀라 자신의 입을 막고는 범한을 바라봤다. 잠시 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의미인가요?”
그녀의 모습에 범한은 까닭 없이 마음이 불편해졌다. 상대방의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실제로 그녀의 마음속에 젊은 황제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감정을 가라앉히고는 말했다.
“그 독약은 낭자의 몸을 거쳐 북제 황제를 중독시킬 겁니다.”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사리리가 입술을 깨물며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실을 왜 알려 주시는 겁니까?”
“왜냐하면 낭자가 이 일을 바꾸길 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더구나 아직은 임무를 시작되지 않았으니 바꿀 수 있습니다.”
그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진평평 원장이 무슨 방법으로 낭자를 설득했는지 알려 줬으면 좋겠군요.”
잠시 고민하던 사리리는 범한이 원하는 대답은 하지 않은 채 오히려 활짝 웃었다.
“됐습니다. 소첩에게 사실을 말해 주셨으니 나중에 북제 수도에 도착하면 해독할 방법을 찾아야겠습니다.”
그러자 범한이 약간 비웃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낭자의 몸속에 있는 독약의 해독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나를 제외하고 천하에 그 방법을 아는 사람은 황궁의 어의 정도지요. 설마 북제 황제에게 감찰원에서 독약을 넣었다고 말할 건 아니겠지요? 그러면 북제 황제가 낭자에게 애정이 있은들 황궁에 들어갈 수는 없을 겁니다.”
사리리가 고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궁에 들어가지 않으면 어떠합니까? 감찰원의 미인계 임무가 실패한들 소첩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범한이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소첩이란 말을 듣기 싫어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연유에서인지 사리리가 이를 갈며 붉게 충혈된 눈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제가 대인의 마음속에 노비만도 못한 사람이란 말입니까?”
사리리의 발그스름한 볼을 바라보던 범한이 더욱 인상을 썼다.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고민하던 그는 잠시 뒤 침착하게 말했다.
“낭자도 지금 상황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저는 낭자가 아주…… 터무니없는 일을 할 거라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터무니없는 일이라니요?”
사리리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죠. 확실히 터무니없는 일이긴 하죠. 인생의 길에서 우연히 만난 대인과 저는 그저 서로를 이용하는 사이니까요.”
“낭자도 그 점을 알고 있다니 기쁘군요.”
범한이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
“저와 진평평 원장 사이의 약속을 궁금해하신 이유가 뭔가요?”
사리리는 살며시 몸을 돌려 소매로 눈가를 슬쩍 닦고는 막 피어난 꽃과 같은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대인은 감찰원 제사시니 미인계 임무를 자세히 알고 계시잖아요.”
“미인계 임무야 잘 알고 있지만 진평평 원장께서 낭자를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모르겠군요.”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하던 범한이 잠시 생각하다 다시 말했다.
“낭자는 자신이 진평평 원장의 독을 전달하는 장기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나에게 자초지종을 알려 주지 않는 거요?”
“대인에게 말해서 제게 좋은 점이 있나요?”
사리리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잘생긴 범한을 바라보려니 마음이 쓰라렸다. 사실 그녀는 짧은 여정 동안 이따금 보이는 범한의 순진한 미소에 점차 빠져들고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그가 감옥에서 매몰차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원망 섞인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진평평 원장이 줄 수 있는 것을 대인도 줄 수 있습니까?”
“그는 늙었고 나는 젊소.”
범한과 사리리 모두 이 말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익을 엄격히 따지는 협상이 순간 유치한 애정 싸움처럼 비쳤기 때문이다.
옅은 치자꽃 향기가 마차 안에 가득 퍼졌다. 범한이 난처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자 사리리의 얼굴이 점차 붉어졌다. 두 사람의 마음속에 꺼림칙한 게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대화 두 마디에 두 사람 모두 이렇게 난처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듯 눈을 굴리던 사리리는 난처해하는 범한을 바라보고는 저도 모르게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범한이 헛기침을 하며 설명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임무인데 진평평 원장은 나이가 많이 드셔서 2년 안에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젊은 나와 거래를 해야 원하는 걸 얻을 확률이 더 커진다는 것이지요.”
사리리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애써 억누르고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그렇게 해서 저에게 무슨 이득이 있는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낭자의 몸에 있는 독을 해독할 수 있어요. 게다가 일단 내가 감찰원을 쥐게 되면 힘을 동원해서 낭자가 북제 황실에서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줄 거요.”
사리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경국이 강하고 감찰원 밀정의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북제 황궁에까지 손을 뻗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북제 황실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한다고 누가 말하던가요?”
순간 말문이 막힌 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리리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애완동물 부르듯 범한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대인, 가까이 오십시오. 이 일은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범한은 씁쓸한 표정으로 웃으며 사리리가 며칠 동안 자신이 찾아오지 않은 것에 관한 분풀이를 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귀를 가져다 대자 사리리는 아무 말 없이 따뜻한 숨결을 그의 귓불에 내뱉었다. 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희미한 살 냄새가 코끝에 스치자 범한은 의미를 이해한 듯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참 뒤 젊은 남녀가 헤어지려 할 때 사리리가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으로 가볍게 말했다.
“제가 위험을 무릅쓰고 범한 대인에게 협상의 내용을 알려 드렸으니 저를 도와주시겠지요?”
아직도 놀란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범한은 심각한 표정으로 인상을 썼다.
“나는 진평평 원장을 믿지 않습니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낭자에게 순순히 알려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리리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대인께서도 믿지 않으시는군요. 아마 진평평 원장은 내가 말하는 걸 걱정하지 않으실 겁니다. 천하에서 그분의 생각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생각도 할 수 있겠지요.”
잠시 고민한 범한은 이 일의 자초지종을 이해하고는 웃었다.
“그랬던 거군요.”
그가 사리리를 가만히 바라보다 대뜸 말했다.
“몇 해 전 경도에서 낭자가 개국 초기 어느 황족의 자손이란 소문이 퍼졌었죠. 당시 백성들은 낭자가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그런 말을 꾸며 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정말인가 보군요.”
사리리가 두 눈을 천천히 감고는 한참 뒤에 말했다.
“제 이름은 이리사입니다.”
그녀의 매끈한 턱을 바라보니 당장이라도 쓰다듬고 싶었다. 범한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북제 황제가 낭자의 신분에 관여치 않는 것이나 낭자가 기꺼이 진평평에게 이용당하려 하는 이유를 알 것 같군요. 그래도 낭자는 그 백 년 묶은 독사보다는 실력이 부족하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북제 황궁에서 상황이 안정되면 조용히 진평평 원장의 계획을 실행하고 그와 맞서려 하지는 마세요.”
그의 두 눈을 바라보던 사리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협상 내용을 알려 드렸으니 대인께서는 언제 저의 몸 안에 있는 독을 해독해 주실 건가요?”
“내일 시작하죠. 재료를 준비할 시간도 필요하고 또…… 이번 사신단 일을 마무리 짓고 감찰원을 넘겨받을 방법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낭자의 남동생, 그러니까 세자의 안전 문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담당하는 한 세자가 경국으로 몰래 빠져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사리리가 아무 말 없이 범한을 바라보더니 좁은 마차 안에서 일어서 힘들게 절을 했다.
한편 소은은 조용히 앉아 연꽃이 활짝 핀 것처럼 두 손을 펴고는 왼손 새끼손가락을 냄새나는 요강 가장자리에 붙였다. 그러고는 몸 안에 있는 정기를 천천히 움직였다. 마차에 옅은 피비린내가 풍기기 시작할 때쯤 그의 경락 안에 있던 검은색 걸쭉한 액체가 서서히 새끼손톱으로 모이더니 요강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