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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63화 (163/1,108)

163화

북쪽보다 따뜻한 경도에는 이미 완연한 봄기운이 가지에 맺힌 꽃봉오리에게 빨리 피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매일 밤이면 집마다 등불이 켜졌고 십 리 강변에도 화려한 붉은 등이 켜져 봄 경치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낮의 경도는 조용했다. 백성들과 관리들 모두 춘곤증인 것처럼 기운이 없었고 길거리에 행인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정오 무렵 음침한 안색을 한 서생이 여인을 부축하며 경도성 동문 안으로 들어왔다. 모자 사이처럼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은 객잔으로 가지 않고 곧장 경도 서쪽에 있는 볼품없는 저택으로 걸어갔다. 이 저택의 실제 주인은 도찰원 어사 대인으로 극소수의 사람들만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춘곤증을 해소할 순 없지만 잠시나마 사라지게 만들 만한 일이 3월 중순 어느 날에 벌어졌다. 회시 이후 그날처럼 난데없이 벼락이 치면서 억수 같은 봄비가 내리기 시작한 날이었다. 세찬 비는 경도의 모든 건물과 골목을 적셨다.

감찰원 4처에서 맡은 회시 부정행위에 대한 심리와 재판은 시랑 한 명을 유배하고 나머지 열일곱 명의 탐관들은 사형하는 것으로 끝났다. 감찰원의 결정 뒤에 황제 폐하의 뜻이 있거니와 증거까지 명확해서 어느 세력도 이견을 말하지 못했고 문신들도 입을 꾹 다물고 숨을 죽일 뿐이었다.

예부 상서 곽유지도 참수형에 처할 운명이었다. 경국 개국 이래 처음으로 사형을 받는 고관이 생겨나자 조정과 재야 모두 발칵 뒤집혔다. 이후 황태후가 황제를 직접 찾아가 관용을 베풀라고 호소하자 이에 마음이 약해진 황제가 눈물을 닦으며 옥중 교수형으로 바꾸고 곽 상서의 시신도 보존하라고 명했다. 그러자 황태후도 슬퍼할 뿐 더는 황제를 설득하지 않았다.

더구나 곽유지 말고도 참수형에 처할 죄수는 열여섯 명이나 있었다.

평일 시끌벅적한 소금 시장 입구에 억수 같은 빗물이 떨어졌지만 관람하고 싶어 하는 백성들은 비를 맞으면서도 자리를 지켰다.

백색 죄수복을 입은 열여섯 명의 죄수가 형벌대 위에 무릎을 꿇었다. 옷에 핏자국이 있는 걸 보니 이미 상당한 고문을 받은 것 같았다. 과거 부귀영화를 누리던 관리들이 죄수가 되어 산발한 채 모든 걸 포기한 얼굴로 있는 것이 비참해 보였다. 더구나 감찰원이 무슨 방법을 쓴 것인지 평소 정신이 멀쩡했던 관리들의 눈은 초점 없이 흐리멍덩했고, 구경하는 사람들 틈에서 자신의 가족을 찾으며 뭐라 말했지만,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조정의 3사 관리들과 감찰원 1처 대리 수장인 목철이 장막 안에 앉아서 광경을 바라봤다. 무표정한 목철과 다르게 다른 관리들은 불편한 모습이었다. 형벌대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과거 그들의 동료였다. 같이 놀잇배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놀던 사람들의 처참한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비는 소금 시장 옆에 있는 술집 처마에도 내렸다. 처마 옆 수로를 따라 모인 빗물이 작은 폭포가 되어 흘러내렸다. 여러 층에서 만들어진 작은 폭포 수십 개가 땅에 떨어지면서 소리를 냈다.

한 고관이 일어나 큰 목소리로 조서를 말했지만 작은 폭포 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고관의 입 모양을 자세히 바라봤지만 뭐라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고관이 엄숙한 표정을 짓더니 아주 큰 목소리로 외쳤다.

“시행하라!”

그 말에 흥분한 구경꾼들이 환호성을 지르더니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을 더 자세히 구경하기 위해 형벌대 앞으로 몰려들었다.

형벌대에 서 있던 망나니가 침을 뱉고는 얼굴에 묻은 빗물을 닦았다. 그러고는 큰 칼을 뒤에 찬 채 앞으로 걸어가 첫 번째 죄수의 목덜미를 왼손으로 만졌다. 곧이어 뼈마디의 위치를 확인한 그가 고함을 지르며 큰 칼을 뽑아 휘둘렀다.

칼이 떨어지자 돼지고기가 썰릴 때 나는 소리가 들렸다.

이후 새빨간 피가 뿜어져 멀리까지 튀었다. 형벌대로 떨어진 죄인의 머리는 마치 큰 칼이 두려워 도망가는 것처럼 소리를 내며 굴러가더니 결국 빗물과 함께 형벌대 아래로 떨어졌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광경을 지켜보던 관중들은 피범벅이 된 머리가 자신의 발밑으로 떨어지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머리가 굴러간 자리에 남아 있던 핏자국은 빗물이 씻겨 금세 사라졌다.

몇몇 사람들만이 손뼉 치며 환호할 뿐 대부분은 놀란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그 모습이 못마땅한지 형 집행을 바라보던 목철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비쳤다.

망나니가 다시 칼을 휘두르자 머리가 땅에 떨어지면서 사방이 핏빛이 되었다. 세 명의 망나니들이 번갈아 가며 칼을 휘두르며 남은 죄인들의 머리를 차례대로 잘랐다. 어느새 피로 물든 형벌대 위에는 시체만 남았다.

참수가 진행될수록 구경꾼들도 점차 대담해져서는 박수와 환호성이 갈수록 커졌다. 마지막에 예부 봉정의 목이 떨어질 때는 땅이 울릴 정도로 큰 함성이 들렸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내리던 빗줄기도 놀라 흩어질 정도였다.

한편 형벌대에서 떨어진 머리를 찾기 위해서 경도부 관리 몇 명이 구경꾼들을 해치며 돌아다녔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잠시 뒤 검은 개가 입에 머리를 물고 구경꾼들 속에서 뛰쳐나왔다. 검은 개는 날카로운 이빨로 머리의 귀 부분을 물고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개의 눈빛은 한기가 느껴질 만큼 서늘하고 무서웠다.

“깨갱!”

경도부 관리가 휘두른 칼집에 궁둥이를 맞은 개가 물고 있는 머리를 떨어뜨리고는 울면서 빗속으로 뛰어갔다.

* * *

며칠 뒤 이어서 사건이 터졌다. 형부 상서 한지유가 뇌물을 받아 법을 어긴 사실이 적발된 것이다. 감찰원이 그의 첩들이 지내는 별저에서 금은과 금지 품목을 찾아내 조정에 보고하자, 대리사에서 그의 관직을 1품에서 7품으로 내리고 이주(夷州)로 내려가 주판직을 수행하게 했다.

이주는 남쪽 멀리 있는 지방으로 날씨가 덥고 습해서 풍토병이 성행하는 곳이었다. 그러니 한지유가 다시 경도로 돌아오는 날은 없을 터였다.

한편 아무런 꼬투리도 보이지 않았던 도찰원 곽쟁은 조정에서 직접 이유를 찾아 강남으로 보내 버렸다. 물 좋고 미인들도 많은 강남은 감찰원 4처에서 배치한 밀정들도 많은 곳이었다. 그래서 곽쟁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감찰원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조정의 문관들은 이 일에 재상이 손을 썼거나 감찰원에서 확실한 증거를 쥐고 움직인 거라 생각했다. 다만 한지유과 곽쟁에게 잔인한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았기에 재상과 감찰원이 결탁해서 일을 꾸몄다고는 볼 수 없었다.

잔인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보복은 보복이었다. 이것은 범한이 형부에서 겪은 일에 대한 감찰원의 적나라한 보복이었다.

이처럼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보복이 끝나면 항상 평화가 찾아왔다. 이건 경국 관료 사회에서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온 묵인된 약속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곧이어 장 공주와 황후 측에서 반격이 들어왔다.

앞에서 언급했던 음침한 안색을 한 서생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회시에 응시하지 못한 하종위였다. 대학사 증문상의 제자로 곽씨 집안과 가까운 사이였던 그는 고향에서 뜻밖의 소식을 듣고는 화들짝 놀랐다. 곽유지는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고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으며, 자신의 친우인 곽보곤은 어디를 떠돌아다니는지 행적을 알 수 없었다. 더구나 가장 그를 분노하게 한 사실은 동궁에 있는 황태자가 이번 일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종위와 함께 경도에 들어온 부인은 오백안의 아내였다. 오백안은 장 공주가 재상가에 침투시킨 모사로 작년에 재상의 둘째 아들을 끌어들여 범한을 암살하려 했다가 포도나무 울타리에서 죽임을 당한 인물이었다.

재상 임약보는 유일하게 멀쩡한 아들을 죽게 만든 오백안에게 뼈에 사무칠 정도로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오백안은 이미 죽었지만 산동에 있는 그의 집안은 적지 않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재상의 제자 출신이자 산동 관리인 팽정생은 오백안의 집안을 괴롭혀 6개월 만에 상당히 많은 재산을 수탈했으며, 오백안의 친아들을 이유 없이 감옥에 가두고 고문해 죽게 했다.

오백안의 아내 오씨는 글을 알기는커녕 재상의 세력이 어떤지도 몰랐으며 저항할 힘도 없었다. 하지만 아들을 잃은 슬픔에 홀로 경도에 가서 재상을 고발할 결심을 했다.

성 밖에서 잠시 휴식하고 있을 때 오씨는 마침 경도로 돌아온 하종위를 만나게 되었다.

하종위는 총명한 사람이었기에 단박에 오씨의 사연이 이용할 가치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이에 오씨에게 억울함을 풀 방법을 찾아 주겠다고 설득해 같이 경도로 들어온 것이다.

경도로 들어온 뒤 하종위는 스승과의 관계를 이용해 오씨를 어사 대인의 저택에 머물게 했다. 머무는 동안 종종 평범해 보이지 않는 인물이 저택에 출입해서 오씨에게 집안에서 벌어진 비극을 자세히 물어봤다.

하종위는 이 모든 과정을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가끔 오씨가 불안감을 못 이겨 찾아오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정의로운 관리분이 손을 쓰고 있으니 재상 대인은 곧 벌을 받게 될 거라고 말해 주었다.

어사의 저택 화원에 있는 가짜 산 뒤에서 하종위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신양에서 온 밀서를 찢었다. 그는 재상이 실각하면 경도 조정이 어떻게 변하게 될까를 생각하다가 문득 사남 백작의 하나밖에 없는 딸을 떠올리고는 두 눈을 번뜩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며칠 뒤 도찰원 어사가 상소를 올려 재상 임약보를 파면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해 죄 없는 백성을 죽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일로 한바탕 뒤집혔지만 오백안은 이미 북제 첩자로 낙인이 찍혔기에 여론은 재상에게 더 기울어 있었다.

그러던 중 오씨가 대리사에 진술하러 가는 길에 자객을 만나게 되고 이걸 또 우연히 2 황자와 정왕 세자가 보고 구출한다. 오씨의 명이 길어서 화를 면한 건지 아니면 재상의 운이 나빠서 암살에 실패한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 일로 상황은 역전되었다.

소식을 들은 황제는 황태자와 2 황자를 불러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냐고 질문했다. 이에 황태자는 한동안 고민하다 증거가 부족하고 재상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니 함부로 내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반면 엉겁결에 거리에서 오씨를 구한 2 황자는 난처한 마음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재상이 관리들의 수장인 이상 어떤 식으로 처리하든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한편 정왕 세자를 통해 이 일을 들은 정왕은 불같이 화를 내며 좀처럼 가지 않던 황궁에 입궁해 황제와 밤새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이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을 이야기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황제는 그날 밤 십몇 년 동안의 상소를 뒤적거리면서 재상 대인이 고생스럽게 일군 치적들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한숨을 쉬었다.

* * *

“산동로 자사 팽정생은…… 11년 전에 향시에 급제한 사람입니다. 내가 처음 재상이 된 해였는데 순박하고 말 잘 드는 사람이라 생각했었지요.”

재상 임약보는 이제 마흔 대였지만 얼굴은 수척해서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내 말을 들어줄 줄은 몰랐습니다. 원 형도 아시겠지만 나는 팽정생에게 이런 일을 시키지 않았어요. 죽은 오백안의 가족에게 화풀이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될 일인가요.”

“아마도 팽 대인께서 재상의 마음을 짐작하고 어리석은 짓을 벌인 것 같습니다.”

임약보의 심복이자 친구인 원굉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가요?”

임약보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원굉도를 바라보았다.

“팽정생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데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명성을 걸면서까지 이런 무모한 일을 벌인 이유가 궁금하군요. 게다가 며칠 전에 경도 거리에서 벌어졌던 암살 사건을 계획한 사람은 누구이며, 왜 재상부를 조사하려 하는지도 의문입니다.”

원굉도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자신의 긴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하종위는 동궁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을 혼자 벌일 정도로 배짱 있는 사람은 아니지요. 분명 뒤에서 봐주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게 황후인지 장 공주인지 모르겠군요.”

“운예입니다.”

재상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조정에서 그녀의 세력은 대부분 도찰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건 그녀가 저에게 복수하는 겁니다.”

“복수할 게 뭐가 있습니까?”

“복수할 거야…… 많지요.”

재상이 한숨을 쉬었다.

“신아의 일도 그렇고, 사위 일도 그렇고, 나와 그녀 사이의 일도 그렇지요.”

“그럼…….”

원굉도가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자 재상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말해 보십시오.”

원굉도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폐하의 의견을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폐하께서 이 일을 믿지 않으신다면 재상의 지위도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이런 졸렬한 방법을 쓰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성상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재상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문제는 폐하께서 무얼 원하시느냐에 달려 있지요.”

“무슨 말씀입니까?”

“최근에 문관 여럿이 참형당했습니다. 문관의 수장인 제가 책임을 져야겠지요.”

재상이 체념한 표정으로 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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