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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62화 (162/1,108)

162화

잠시 뒤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어쩐지 평상시와 달라 보였다.

사실 사리리의 몸에는 독약이 있었다.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범한은 일찌감치 그녀의 몸에 만성 독약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무래도 감찰원에서 사전에 수를 쓴 것 같았다.

이런 독약을 범한은 비개가 남긴 책에서 본 적 있었지만 실제 사례를 본 건 처음이었다. 이런 독약은 여성의 몸속에서 천천히 뿜어져 나와 함께 관계한 남자를 중독시켰다. 그러니 이대로라면 사리리는 아마 북제 황제를 감염시킬 것이다. 게다가 독약에 중독된 증상도 성병과 아주 비슷했다.

모든 일에 신중한 진평평답게 미인계는 사리리로 북제 황제를 유혹하는 게 아니라 독살하는 계획이었다.

해독제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감염자의 몸과 정신을 약하게 만드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니 북제 황제는 자신이 아끼는 사리리와 관계를 하다가 중병에 걸릴 운명인 셈이다. 만약 후당과 제당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젊은 황제가 중병에 걸린다면 북제 조정은 다시 한번 대혼란에 빠질 것이었다.

범한은 한숨을 쉬며 사리리가 자신의 몸에 독약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전염시킬 수 있다는 건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불쾌하게 생각한 것은 진평평이 이 일을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약 사리리와 가깝게 지내면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면 알지 못한 채 자신도 중독될 수 있었다. 물론 독약에 중독되더라도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치료하면 문제는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속였다는 생각에 불쾌했다.

“미인계는 무슨.”

범한이 자신의 마차에 돌아와 앉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건 미인계 임무가 아니라 독살 임무잖아.”

진평평, 비개, 심지어 뒤에 있는 마차에 타고 있는 소은과 비교했을 때 자신은 여전히 악랄한 방법을 사용하거나 냉혹한 마음을 가지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이번 임무에서 사리리는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장기판의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가 기꺼이 장기판의 말이 되도록 진평평이 무슨 말로 설득을 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범한을 정말 놀라게 한 건 따로 있었다. 이것이 바로 범한이 사리리와 같이 있으면서도 관계를 맺지 않은 진짜 이유였다.

그건 바로 사리리가 아직도 처녀라는 사실이었다.

* * *

이미 경국 북부에 도착한 사신단은 최북단인 창주를 앞두고 있었다. 멀리 성의 외곽이 보이자 범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흐린 하늘을 바라봤다. 강한 북풍에 봄기운은 모두 사라진 하늘에 먹구름까지 껴서 어두침침한 분위기였다.

경국에서의 마지막 호송을 책임진 주군(州軍)이 앞으로 와서 인사한 뒤 말고삐를 돌려 돌아갔다. 창주성 밖에 황량한 들판에 있으니 기나긴 사신단의 마차 행렬도 초래해 보였다.

“창주를 지나 국경선에 도착하면 이후에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에는 대호를 돌아서 가니 최소 20일은 걸릴 겁니다.”

왕계년의 대답을 들은 범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위험한 상황은 20일 안에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마차를 바라보며 물었다.

“소은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조용히 있는 게 대인께서 매일 주사하는 독약이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요 며칠 동안은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 같더군요.”

“조심하십시오.”

갈수록 강해지는 마차 안 피비린내를 맡은 듯 범한이 코를 비볐다.

“알겠습니다. 주군은 이미 돌아갔고 창주군은 믿을 수 없으니 걱정입니다. 대인께서도 지난번 사리리를 경도로 압송할 때 있었던 일을 아시겠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창주를 지나면 호송은 오히려 편해질 겁니다. 우리가 가장 걱정해야 할 건 사신단 내부에 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황량한 들판 멀리 있는 낮은 언덕에서 대략 5백 명 정도 되어 보이는 기마병 부대가 나타났다. 검은색 투구와 갑옷을 갖춘 기마병들은 흐릿한 햇빛 아래서 서늘한 살기를 뿜어냈다.

왕계년이 미소 지었다.

“흑기가 왔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요.”

강한 바람에 자갈들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왕계년과 범한은 마차에서 내려 창주성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발걸음을 떼던 범한이 멈칫하며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마차에서 내린 사리리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을 시켜 사 낭자에게 옷을 더 가져다주라고 하십시오. 북으로 갈수록 날씨가 추워질 테니.”

요 며칠 동안 사리리의 마차에 거의 가지 않았던 범한은 겉으로는 침착한 척했지만 마음은 떨렸다.

왕계년이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고는 부하에게 지시했다. 사신단에는 세 명의 여종이 있는 이유는 북제 황제의 여자가 될 사리리의 시중을 들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범한이 사리리의 마차에 머물러서 세 명의 여종은 사신단 마차 행렬 뒤편으로 밀려나 있었다. 잠시 뒤 여종들이 사리리 옆으로 다가와 진홍색 망토를 덮어 주고는 마차에 들어가 쉬라고 말했다.

사리리는 마차에는 돌아가지 않고 범한을 계속 바라봤다. 범한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어 내려는 것 같았다.

멀리서 검은색 기마병들이 진홍색 망토를 걸친 연약한 여자 옆으로 다가왔다. 하늘에 비스듬히 걸쳐 있는 옅은 태양처럼 아름다우면서도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창주를 나간 뒤 사신단은 멀리서 따라오는 흑기의 보호를 받으며 느리지만 꾸준히 북쪽으로 향했다. 북제는 경국에서 정북 방향에 있지 않기에 빨리 가려면 여러 제후국을 거쳐야 했다. 그중에는 가장 동쪽 해안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번화한 항구 도시인 동의성도 있었다.

이번 사신단은 제후국을 거치지 않을 예정이었다. 왜냐하면 거치는 도시가 많을수록 경비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밀 협정을 하러 가는 마당에 동이성을 지날 수는 없었다. 만일 그랬다가 사고검이 갑자기 미쳐서 날뛰기라도 한다면 세 나라 사이에서 다시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사신단은 황야를 따라서 북상한 뒤 대호를 돌아 동쪽으로 갈 생각이었다. 비록 시간이 더 오래 걸리기는 하겠지만 마적을 제외하면 위험이 될 만한 세력은 없었다.

사신단이 가는 길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소은도 침묵했고 사리리도 침묵했으며 사신단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범한도 침묵했다. 이들은 모두 자신만의 이유로 침묵하고 있었다.

범한은 소은의 팔에서 바늘을 뽑은 뒤 날이 갈수록 초췌해지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때 소은이 갑자기 눈을 뜨더니 당장이라도 범한의 얼굴을 때리고 싶다는 눈빛으로 노려보고는 다시 두 눈을 감았다.

“궁금한 게 있네. 왜 그 끈을 내 팔에 묶는 건가? 내가 보기에 혈관을 더욱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인 것 같은데 그렇게 고생해서 내 혈관에 독약을 주입할 필요가 있는가?”

“그럼요.”

범한이 미소 지었다. 정맥 주사가 복용하는 것보다 효과가 빠르다는 걸 이 세계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더구나 소은의 경우 상당한 정기를 가지고 있어 정맥 주사가 아닌 평범한 방법으로는 효과를 볼 수가 없었다.

소은이 미간을 찌푸리고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그 방법이 효과적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군. 게다가 왠지 모르게 익숙하단 말이야. 안타깝게도 늙어서 그 방법을 쓴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아.”

범한은 속으로는 흠칫 놀랐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웃었다.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

“멀리 있는 기마병은 진평평의 수하인 흑기겠지?”

소은이 갑자기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순간 범한이 놀라 멍한 표정을 지었다. 창문도 없고 벽에는 철판이 끼워져 있는데도 소은은 흑기가 멀리서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범한은 재빨리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습니다. 과거 천 리를 돌진해 용맹을 떨쳤던 분들의 후배들이지요.”

진평평이 흑기들을 이끌고 소은을 생포해 왔던 때를 언급한 것이었다.

그 일은 소은의 삶에서 가장 큰 굴욕을 안겨 줬을 뿐 아니라 씻을 수 없는 상처도 주었다.

“자네는 언제 나를 죽일 생각인가?”

소은이 일상생활을 이야기하듯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

사실 이건 상대방을 도발하려는 질문이었다. 일반 사람이었다면 무의식적으로 넘어갔겠지만 범한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미소 짓는 소은의 두 눈이 점차 붉어졌다.

“진평평은 순순히 나를 북에 돌려보내지 않을 거야.”

범한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제가 맡은 일만 완수하면 그만입니다.”

“자네는 괜찮은 젊은이야.”

소은은 그를 바라보며 손목을 들어 무거운 쇠사슬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소 선생님,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함께 길을 나선 지도 오래되지 않았나. 자네는 저기 아가씨가 타고 있는 마차에 자주 머물면서도 여색에 빠져 직무를 잊어버리는 짓은 하지 않더군. 더구나 가장 놀라운 건 매일 어두울 때마다 수련한다는 거야. 나도 그 정도의 의지력은 없었네.”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둔한 새가 먼저 나는 법이지요. 실력이 보잘것없고 재능도 부족하다는 걸 알기에 수련을 더 열심히 하는 것뿐입니다.”

동의할 수 없는지 소은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실력도 좋고 재능도 출중하네만, 강자와 맞서며 자신의 몸에 있는 정기를 자극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네.”

범한이 소은의 늙은 얼굴과 메마른 두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혼자서 절대 강자와 대적해야 한다는 건가?’

* * *

창주성에서 나온 사신단은 북군 관할 구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곳 초원에서 군영은 백 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범한은 9등급 강자인 연소을과 만나고 싶지 않았기에 길을 돌아서 갔다. 물론 흑기들이 따라오며 보호해 주고 있으므로 사신단을 공격할 간 큰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사실 며칠 전에 산에서 내려온 산적들이 정탐하다가 사신단을 호위하는 흑기들을 보고는 겁을 먹고 산으로 다시 돌아간 일도 있었다.

한편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소은과 사리리는 날이 갈수록 초췌해져 갔다.

범한이 무슨 생각에 잠긴 듯 압송되는 두 사람을 냉담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요 며칠 동안 함께 있으면서 그는 자꾸만 사리리에게 연민의 정이 생겼다. 그는 사리리의 신분과 또 그녀가 앞으로 겪을 상황이 안쓰러웠지만, 목적이 분명했기에 작은 정에 이끌려 계획을 망치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만약 사리리에게 어떤 감정이 싹튼다면 감찰원이 세운 북제 계획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사리리가 아직도 처녀인 걸 북제의 젊은 황제가 어떻게 아는지 모르지만, 만약 나중에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면 미인계 임무는 성공할 수가 없었다.

범한이 최근 사리리의 마차에 가지 않는 게 그녀의 실의에 빠진 얼굴이 보기 싫어서인지 아니면 자신이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소은의 마차에 더 오래 머무르며 그에게서 과거 스캔들이나 비밀 정보들을 얻어 내려 했다. 이것은 천하를 호령했던 그에게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것이자 그가 뒤에서 꿍꿍이를 벌일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마차 밖에는 서늘한 기운이 풍겼다. 이야기는 과거 북위에서 시작해 지금의 세상으로까지 이어졌다.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네.”

소은이 그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점차 대화를 나누는 데 익숙해진 소은은 범한이 대화하기 좋은 상대라고 생각했다.

“저희 황제 폐하께서는 이미 두 차례 통일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3차 북벌 이후로, 경국은 마음만 먹었다면 막강한 군사력으로 한 번에 북제를 없애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소은이 고개를 저었다.

“그때 나는 감옥에 갇혀 있어서 아는 게 없지만, 자네가 말하는 걸 들어 보니 당시 경국 황제가 공격을 멈춘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네. 하나는 조정 내부의 문제였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강력한 저항을 만난 것이지. 그래서 북상하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한 거야.”

소은의 말을 들은 범한은 곰곰이 생각했다.

‘아직 섭가가 무너지기 전이었으니 황제와 그의 모친이 선발한 사람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을 거야. 그런 조정 안에서 문제가 있었을 리 없어. 하지만 외부의 적이라면…… 이 세계에 경국을 두렵게 할 만한 힘을 가진 곳이 어디 있을까?’

“신묘.”

범한의 생각을 읽은 듯 소은이 짧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곳에서 어떻게 인간의 야심이나 권력의 욕망을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천하 통일은 황제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입니다.”

소은이 그의 말에 공감하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남경이 북위를 무너뜨리는 데만 오랜 시간이 걸렸네. 만약 남은 세력까지 완전히 제거하고 통일하려 했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 같나? 최소 수십 년은 걸렸을 거네. 게다가 동이성의 존재도 잊어서는 안 되지. 동이성은 비록 국가를 지킬 병력은 부족하지만 계속 땅을 개간해 영토를 확장해 왔고, 9등급 고수들도 많이 포진되어 있네. 만약 전쟁이 계속되는 어지러운 국면 속에서 사고검이 미쳐 날뛰기라도 한다면 그 후환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나?”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각형이 가장 안정적이듯 세 나라가 서로 대치해 있는 게 가장 안정적이긴 하지요. 세 나라의 국력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먼저 균형을 깨뜨리는 나라가 두 나라의 반격을 받게 될 테니까요. 그러니 평화가 유지되기도 더 쉽겠군요.”

“지금 경국의 조정도 마찬가지일세.”

소은이 그를 바라보며 웃는 듯 아닌 듯 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 신하 그리고 자네가 미쳤다고 말하는 장 공주까지 삼각형을 구성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먼저 균형을 깬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될 거야.”

그동안 범한은 경국 조정의 상황을 소은에게 숨김없이 말해 주었다. 만일 자신이 소은을 죽이지 못한다면 어차피 이런 정보는 손쉽게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은에게 이 정도 정보는 기밀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관자놀이가 다시 아파지자 범한은 사리리의 부드러운 손이 그리워졌다.

“모두 지금의 균형을 일단 유지하려 하겠군요.”

“그건 불가능하네. 왜냐하면 자네가 이미 움직여서 상대방도 반응을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아마도 지금 경도는 아수라장이 되었을 거야. 하필 이때 북방으로 돌아가 그 상황을 지켜보지 못하게 된 게 아쉬워.”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진 범한의 귓가에 경도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소은의 말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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