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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61화 (161/1,108)

161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의 외모나 정신 상태도 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마차 안으로 들어간 범한의 눈에 사리리는 초췌하면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반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음에도 유정강에서 보았던 아리따운 모습은 그대로였다.

범한이 들어오자 사리리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것 같았다.

사리리의 눈썹은 여전히 버들잎처럼 가늘고 길었고, 검은 두 눈동자는 강물처럼 반짝였다. 다만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입술은 약간 창백해 보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범한은 경도에 온 지 얼마 안 된 귀족 집안 서자였고, 사리리는 유정강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기생이었다.

하지만 사리리는 사실 북제에서 심어 놓은 첩자로 오백안과 결탁해 2 황자의 연회에 가는 범한을 암살하려 했었다. 가까스로 위험에서 벗어난 범한이 이후 감찰원에 들어와 사리리를 북제로 되돌려 보내는 일을 맡은 건 정말 기묘한 우연이었다.

가만히 사리리의 이목구비를 바라보던 범한은 이상하게 그날 밤 놀잇배에서 서로의 몸을 겹쳤던 때가 생각났다. 물론 그런 생각에 마음이 설레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그녀는 담주에서 함께 지낸 몇몇 여종을 제외하면 혼인 전에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여자다.

“며칠 전에 말을 타고 유정강 강변을 달렸는데 놀잇배가 보이더군요.”

범한이 어색한 침묵을 깨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을 이런 말로 시작할 줄 몰랐던 사리리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범한이 웃었다.

“낭자는 이미 허물어진 그곳이 그립지 않은 모양이군요.”

사리리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부평초처럼 떠도는 소첩을 놀리지 마세요.”

“나는 소첩이란 말을 듣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범한이 그녀의 촉촉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참 세상일이 기묘하지 않습니까. 낭자는 나를 죽여야 한다는 사명을 품고 있었고, 나는 비록 그런 낭자를 용서할 수 없지만 그것 때문에 낭자에 대한 편견 같은 건 없으니. 감찰원 감옥에서 주모자를 알려 주면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하긴 했으나 낭자가 북제로 돌아가는 일에 내가 한 건 없으니 굳이 고마워할 건 없습니다.”

사리리가 놀란 듯 고개를 들어 뭔가 말하려다가 멈췄다. 그녀는 때로는 다정하고 때로는 무서운 범한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낭자가 감옥을 떠난 그날부터 우리는 동료가 된 셈입니다.”

범한이 그녀 옆에 앉아 마차 벽에 몸을 기대자 은은한 향기가 났다. 사리리의 몸에서 나는 향기를 맡으며 그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낭자와 진평평 원장 사이에서 무슨 협의가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대인이 낭자를 믿는다면 나도 낭자를 믿을 것입니다. 그러니 낭자도 나를 믿고 미인계 임무를 잘 완수해 주십시오.”

연두색 소매를 움켜쥐고 있던 사리리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안마를 좀 해주시겠소? 앞 마차에 타고 있는 노인이 언제 폭주할 줄 몰라 마음을 졸였더니 피곤해 죽을 지경입니다.”

두 눈에 피로가 가득한 것이 범한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사리리가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부드러운 방석에 무릎을 꿇고는 조심히 범한의 머리를 안마했다. 두 눈을 감고 편안히 안마를 즐기던 범한은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다가 한숨을 쉬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프신가요?”

진평평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사리리는 감옥에서의 고집스러운 태도를 버리고 예전 기생이었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범한의 마음을 울렸다.

범한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내가 한 고문으로 낭자의 아름다운 손이 상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리리가 아무 말 없이 범한의 관자놀이를 안마하다 말했다.

“불운한 사람은 그렇게 쉽게 망가지지 않습니다.”

“원망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품고 있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좋을 게 없으니.”

범한이 두 눈을 감은 채 차분히 말했다.

“낭자가 나를 죽이려 해서 고문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낭자가 나에게 빚을 진 셈이지요.”

사리리가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소첩…… 아니, 제가 대인에게 빚을 졌으니 언제든 받아 가셔도 좋습니다.”

“어떻게 받아 가란 말이오? 그날 밤처럼 받아 가도 되겠소?”

범한이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리리가 고집스럽게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준수한 얼굴의 젊은 관리를 바라보던 그녀는 놀잇배에서 있었던 부끄러운 일을 떠오르자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녀가 계속 머리를 안마하면서 담담히 말했다.

“불운한 운명을 타고난 저는 대인이 어떻게 받아 가고 싶으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사리리가 정색하고 바라본 것은 범한이 그날 놀잇배에서 마취 약을 사용한 걸 알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감옥에서 범한이 자신에게 모진 고문을 한 것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도 약간은 있었다.

범한은 오른쪽 어깨로 사리리의 부드러운 가슴이 느껴지자 상대방이 자신을 유혹하려 한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깊이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이후 사리리의 그윽한 체취를 맡자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바꿔 물었다.

“사능은 어디로 갔습니까?”

“여전히 경도에 잡혀 있습니다.”

사리리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능도 그녀의 진정한 혈육은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본 범한은 진평평이 무슨 수를 써서 사리리를 설득한 것이지 더욱 궁금해졌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다시 말했다.

“북제의 어린 황제가 낭자를 계속 그리워하고 있다고 위안이 되겠습니다.”

사리리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숨 쉬었다.

“여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내가 궁금했던 부분입니다. 낭자가 북제 황제와 만났던 일들을 자세히 말해 준다면 임무를 진행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오.”

범한이 보기에 이번 미인계 임무는 이전 세계에서 월나라가 서시를 오나라 왕에게 보내 나랏일을 게을리하게 만들어 망하게 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번 비밀 협정의 내용만 봐도 북제 황제가 사리리에게 애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그녀를 콕 집어서 포로 교환을 요구하지도 않았을 터.

그러나 북제 조정 관리들이 신분이 낮은 사리리를 존중하는 것은 순전히 그녀가 나라를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황제가 원한다고 하더라도 북제는 경국보다 더 혈통을 더 중요시했기에 기생 출신인 그녀가 궁에 들어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 일을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범한 대인께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를 수도로 데려다주시면 뒷일들은 자연스럽게 될 것입니다.”

마차 안에는 또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사리리의 향기를 맡으며 옆에 앉아 있던 범한은 그녀의 손길이 떠난 게 아쉬웠다. 조용히 앉아 있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낭자도 쉬십시오.”

그때 사리리가 급히 입을 열었다.

“대인, 안마를 더 해드릴까요?”

“괜찮아요.”

범한이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대답하자 사리리가 약간 실망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화가 끝난 뒤 두 사람은 마차 안 분위기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마치 어렴풋하게 무언가 느낀 것 같았다. 애매한 분위기가 점차 달아올라 공기가 따뜻해졌다.

아랫입술을 깨문 사리리는 두 손으로 범한의 양어깨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혼자 마차에 남겨지는 게 싫어서…… 원수의 시중을 들고 싶어진 거야.’

한편 등 뒤로 사리리의 부드러운 몸을 느낀 범한은 그녀가 자신을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환심을 사려 한다고 생각했다.

‘왜 환심을 사려는 거지? 설마…… 나를 좋아하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자 범한은 마음속으로 뺨을 갈기며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내가 잘생겼다고 해서 여자를 홀릴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인 건 아니야.’

자신은 왜 사리리의 마차를 찾아온 걸까?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설득할 답을 찾았다. 어쩌면 북제로 가는 게 불안해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소은은 너무 못생겨서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다른 이유가 아니라 자신이 평범한 남자여서일 수도 있었다. 사리리는 과거 자신과 함께 밤을 보낸 여자니 함께 있고 싶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호색가이긴 해도 여색에 빠져 물불 안 가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유혹을 뿌리치고 마차에서 내리니 왕계년이 곧장 다가와 마차 뒤편으로 안내했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던 그가 조용히 말했다.

“대인, 주변의 눈과 귀를 신경 쓰셔야 합니다. 사리리는 북제 황제에 보낼 사람이 아닙니까. 오늘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중에 대인이 사리리의 마차에 오래 머무는 걸 본 누군가가 소문을 낸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습니다.”

범한은 왕계년의 엉큼한 오해를 풀어 주지 않고 조용히 관자놀이만 눌렀다.

경도 길을 벗어나자 사신단은 더욱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감찰원을 비롯한 사신단은 경도 수비사 장군들의 경멸 어린 시선에서 벗어나자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더욱이 각 지방에 도착할 때마다 현지 관아의 관리들이 나와 사신단을 극진히 접대했다. 북제로 가는 사신단에 경국에서 가장 유명한 범한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아는 지방 관리들은 더욱 신경 써서 대접하려 했다. 그들은 사신단의 일정이 지체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도 성대한 연회를 열어 범한의 옆에 미녀들을 앉히고는 온갖 아첨을 해댔다.

경국에서 자신의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한 범한은 우쭐한 마음에 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연회가 열리니 지루한 데다가 매번 시를 쓰지 않기로 했다는 말을 반복해야 해서 피곤했다.

반면 왕계년은 연회에 가는 걸 무척 좋아했다. 이유는 연회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기녀들을 보는 게 즐거운 데다가 또 지방 관리들이 경도에 있는 아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기생을 붙여 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신단에는 북제 황제가 그리워하는 경도에서 가장 유명한 기생 사리리가 있는 만큼 범한은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범한은 점차 연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는 그저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운 고관들에게 방문하는 걸 제외하면 대부분은 사신단 야영지에 머무르며 소은을 감시하고 사리리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경도를 떠난 지도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범한은 시간 대부분을 사리리의 마차 안에서 보냈다.

사리리가 껍질 벗긴 귤을 범한의 입에 넣어 줬다.

사신단이나 감찰원 밀정들은 그를 따르는 신분이었고, 호위는 그에게 깊은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무도 그가 뭘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귤을 먹는 범한의 머릿속에 경도에 있을 때 자신에게 과일을 먹여 주던 누이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서 집에서 홀로 외롭게 있을 아내 완아의 얼굴도 떠올랐다. 순간 그가 불안한 마음에 눈을 살며시 뜨고 정성껏 귤껍질을 벗기고 있는 사리리를 바라봤다.

사실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과일을 먹으며 무료한 시간을 함께 보낸 것뿐이었다. 심지어 북제 수도에서 할 임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도 않았다. 물론 가끔 피곤한 몸을 안마받거나 껴안고 바깥 풍경을 감상한 적은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범한을 본 사리리가 웃었다. 그동안 같이 있으면서 범한의 온화한 모습만 본 그녀는 감옥에서의 무지막지했던 모습을 서서히 잊고 있었다. 게다가 마차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게 좋아서 자꾸만 여정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요즘 몸을 잘 추스르고 있는지 예전의 풍만했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범한이 웃으며 농담했다.

“경도에서 막 나왔을 때는 몸을 만지면…… 머리부터 손끝까지 안 아픈 곳이 없었습니다.”

빙그레 웃으며 말하던 사리리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운 표정을 짓더니 타이르듯 말했다.

“만지지 마세요.”

범한이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는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가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만지며 물었다.

“싫습니까?”

“줄곧 대인께 속기만 했으니 그러는 거지요. 놀잇배에서는 제게 마취 약을 사용하시고, 감옥에서는 고문하시더니 오늘 마차 안에서는 음흉한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

사리리는 그렇게 말했지만 몸은 이미 범한의 품에 안겨 있었다. 범한의 품속에서 따뜻한 온기를 느끼던 그녀는 범한의 손이 자신의 엉덩이 부분으로 옮겨 가자 흠칫 놀라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가 범한의 귓가에 한숨을 쉬었다.

범한은 귀가 가렵고 뜨거웠지만 손을 멈추지 않았다.

한숨을 쉰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저를 가지세요. 어차피 북제 수도에 가도 좋은 결과는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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