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꽃이 만개하고 새들이 지저귀는 화창한 봄날, 양만리를 비롯한 네 사람은 범한과 함께 봄바람을 즐기기 위해 백작가를 찾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범한은 집에 없었다. 더욱이 범한이 어떤 임무를 위해서 내일 북제로 떠난다는 소식을 접하자 더욱 머리가 아파 왔다.
이갑 진사는 한림에 들어갈 수 없었고 옛날 규정에 따라 지방 어느 곳의 관직을 맡아야 했다. 이부가 파견을 시작하자 사천립을 제외한 세 사람은 범한의 조언을 듣고 싶었다. 세 사람은 범한 덕분에 회시에 합격했으니 이번에도 조언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건 범한이 남긴 편지 두 통이 전부였다. 한 통은 곧 경도를 떠나야 하는 세 명의 신임 관리에게 쓴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향에 돌아가 다시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사천립에게 남긴 것이었다.
백작가 서재에 앉은 네 사람은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차를 홀짝이며 급히 편지를 뜯어 봤다.
후계상을 비롯한 세 명에게 남긴 편지에는 한 줄만 달랑 적혀 있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관리가 되시게.
그리고 편지지 끝에는 후계상에게 보내는 당부가 있었다.
-계상은 아내를 너무 무서워하지 마시게.
범한은 썰렁한 농담을 한 것이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세 사람은 첫 문장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관리가 되라고?’
세 사람은 문장을 곰곰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좋은 관리가 되려면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하지만 그들은 이 문장에 다른 뜻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첫 번째 편지를 보고 나자 양만리는 사천립에게 남긴 편지에는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지 궁금했다. 사실 네 사람 중에서 장래가 불투명한 사람은 사천립뿐이었다.
세 사람의 눈빛에 사천립이 떨리는 표정으로 편지를 열었다. 편지지를 바라본 그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거기에는 ‘기다리게.’라는 말만 적혀 있었다.
* * *
한편으로 범한은 자신의 근거지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허리끈을 쓰다듬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비개가 자신에게 준 환약이 만져지자 미간을 찌푸렸다. 당시 비개는 몸속 난폭한 정기에 문제가 생기면 이 환약을 먹고 목숨을 부지하라고 말했었다. 이후 경도에 오고 난 뒤 난폭한 정기가 줄곧 말을 잘 들었기 때문에 그는 이 환약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늘 낮에 장비를 정리하던 중 비로소 환약을 기억해 냈지만 몇 년이 지난 뒤에도 효과가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왕계년이 의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은 이미 찾았습니다. 닮기도 닮았지만 제사 대인께서 분장을 잘하시니 조금만 꾸민다면 일반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고요? 외모가 닮았다고 하지 않았나요? 한 달 동안 가꾸면 피부 색깔도 비슷해질 텐데 무슨 문제가 있단 말입니까?”
왕계년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멍청한 남자 중에서 가까스로 대인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사람을 찾기는 했는데, 인품과 문장력까지 겸비한 사람으로 꾸밀 자신은 없습니다.”
멍한 표정으로 있던 범한이 의미를 이해하고는 웃었다.
“갈수록 아첨하는 솜씨가 느는군요.”
저택에 돌아온 범한은 양만리를 비롯한 네 명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고도 신경 쓰지 않았다. 동복 객잔에서 말했듯이 그들이 백성을 위하는 좋은 관리가 돼서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만이었다. 그는 자신은 비록 국가와 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문하생 중에서 그런 인물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별이 다가오자 그는 누이인 범약약과 아무 말 없이 손을 맞잡고 인사한 뒤 사철에게 비자금 마련하는 문제에 대해 당부했다. 그런 뒤 사남 백작과 유씨 부인에게 인사한 뒤 침실로 돌아왔다.
옷을 벗고 침대에 오른 그가 불쌍한 자신의 아내를 위로하려는 순간 대보가 방 안에 있는 걸 발견했다.
웃으며 대보와 이야기하는 범안을 임완아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인내심을 가지고 대보와 대화를 나누는 게 신기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대보와 어깨동무를 한 범한이 헤벌쭉 웃으며 큰 소리로 종을 불렀다. 종이 대보를 데리고 가자 임완아가 물었다.
“오라버니랑 무슨 이야기를 나눴어요?”
이불을 덮은 채 입을 삐죽 내밀고 있는 게 자신의 오라버니를 질투하는 것 같았다. 이불 밖으로 삐죽 나온 하얀 발이 유달리 사랑스러워 보였다.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 앉아서는 아내의 발을 주물렀다.
“내가 경도에 없어 놀아 주지 못한다고 하니까 얌전히 있겠다고 하더라고요.”
발바닥 가운데를 꾹 누르자 임완아의 눈처럼 하얀 얼굴이 달아오르더니 귀까지 빨개졌다. 그녀가 발을 오므리며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일러요.”
그러자 범한이 장난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전혀 이르지 않아요. 게다가 내일은 떠나는 날이니까 이를수록 좋죠.”
“그러고 보니 낮에 아버님께 갔다 왔나요?”
밖에서는 점잖게 행동하면서 침실에만 들어오면 음란해지는 남편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하던 임완아가 화제를 바꿨다. 하지만 범한은 이미 이런 수법에 익숙해져 있었다.
“장인어른께 욕 한 바가지 먹고 왔어요. 회시 부정행위 때문에 야단맞고 또 북제 사신으로 가는 일에 대해 아버님과 장인어른의 계획에 따르지 않았다고 야단 먹었어요.”
낮에 재상가를 방문한 그는 장인어른이 걱정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유가 무엇인지는 몰랐다.
질문에 대답하면서 그녀의 발을 만지던 범한의 손이 점차 위로 올라가 부드러운 곳을 움켜잡자 임완아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 * *
부부가 나란히 누워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는 게 꼭 경묘에서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달콤한 시간을 보내던 범한은 순간 북제의 대종사 고하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신묘가 생각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의 기분이 가라앉는 걸 알아챈 임완아가 품에 안기며 물었다.
“내일 떠나는 분이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임완아의 머리카락이 가슴을 간지럽히자 범한은 미소를 지으면서 음흉한 눈빛으로 머리 너머 보들보들한 젖가슴을 바라봤다.
한편 임완아는 여자들보다도 아름다운 범한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음탕한 표정을 짓는 거야.’
그러고는 범한이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인 그녀는 입고 있던 침의가 이미 허리 부분까지 내려가 상반신이 드러나 있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부끄러워 소리를 지르면서 잽싸게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부부 사이에 부끄러울 게 뭐가 있다고 숨는 거예요.”
범한이 짐짓 화난 척 이야기하자 이불 안에 들어가 있던 임완아가 얼굴 절반을 내밀었다. 쭈뼛대며 남편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게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작은 목소리로 뭐라 말했다.
입술을 가리고 말해서 범한이 못 알아듣자 임완아는 하얀 발가락을 드러내며 발을 동동 구른 뒤 이불 밖으로 입술을 내놓았다. 마침 검은색 머리카락이 입술에 붙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쑥스러운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상공이 지난번에 그…… 신…… 신비감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관능적인 모습에 범한이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불을 확 젖히고는 아내의 가녀린 몸을 끌어안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임완아는 호수 같은 두 눈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돌아오세요.”
두 눈을 반쯤 감은 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임완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범한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요.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니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 * *
다음 날 범한이 이전에 만난 적 있는 간수가 감찰원 감옥 밖에 서 있었다. 과거 감찰원 수장 중 한 명이었던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철문 밖에서 범한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범한은 순간 그의 눈빛에 불안감이 깃들어 있음을 알아챘다.
주변에는 이미 감찰원 밀정과 6처 검사가 포진되어 있었고 몇 대의 마차가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범한은 마차에서 대략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는 감찰원 사람들을 바라봤다. 철판을 끼워 특수 제작한 마차에는 주변 상황에 겁을 먹지 않도록 훈련된 말들이 묶여 있었다.
감옥 밖 분위기가 이렇게 긴장된 것은 안에서 나올 사람 때문이었다.
북위 밀정의 수장이었던 소은은 과거 무수히 많은 근위병을 이끌고 천하를 종횡무진하며 적국 안에 밀정을 심어 넣은 사람이었다. 특히나 사람의 마음을 읽는 재주가 탁월했던 그는 악랄한 방법을 써서 수많은 나라를 무너뜨렸다. 그러니 그가 직간접적인 방법으로 죽인 사람을 쌓으면 시체가 산이 될 만큼 많을 것이었다.
당시 북위 황제는 문신으로는 장묵한, 무신으로는 전청풍을 가장 신뢰했지만 실제로 나라 기둥을 지탱한 사람은 어두운 곳에 숨어 활약하는 소은이었다.
천하가 어지럽던 시기 소은은 주변국들을 제거해 영토를 넓혔는데 이게 도리어 경국이 기반을 다지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경국이 점차 성장하자 소은의 검은 손은 남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당시 경국은 개국 황제가 서거할 무렵 두 친왕이 대립해 조정이 어지러웠다. 이것은 모두 소은이 배후에서 조종한 결과였다. 더구나 북위 기마병들은 두 친왕 중 누군가가 황위를 차지하면 경국을 공격할 생각으로 남쪽을 주시하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생겼다. 섭경미란 여자가 검은 상자를 멘 장님 종을 데리고 경도로 온 것이다.
이후 두 친왕이 갑자기 사망하고 지금 황제의 부친인 성왕 폐하가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로써 경국은 별다른 국력 손실 없이 서서히 안정을 찾았고 북위는 공격할 절호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바로 이때 진평평이란 사람이 역사 무대에 등장했다. 그는 성왕가의 종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성왕 세자에게 신임을 받으면서 평생을 충성하며 따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기구인 감찰원이 설립되자 진평평은 줄곧 원장 자리를 맡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감찰원이 뭐 하는 곳인지도 몰랐고 감찰원 뒤에 섭가의 여주인이 있는지도 몰랐다. 사람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진평평이 날이 갈수록 악랄한 수단을 사용하는 데 천부적인 자질을 드러낸다는 것뿐이었다.
두 첩보 기관으로 인해 사이가 경직된 북위와 경국은 상대국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해에 경국이 첫 번째 북벌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행동이었고 경국은 북위에게 처참하게 패배하고 만다.
당시 황태자였던 지금의 황제는 전청풍의 정예 기병과 소은의 기밀한 첩보망에 밀려 연거푸 패배하면서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진평평은 흑기들과 함께 가까스로 혈로를 뚫어 황태자를 구했다. 동시에 그는 북위 수도에 잠복해 있는 밀정에게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고관들을 매수해 전청풍을 모함하라고 명령한다.
그렇게 황태자를 가까스로 구하기는 했지만 돌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물과 식량마저 부족한 지경에 처하게 되자 당시 젊고 건강했던 진평평은 황태자에게 물과 식량을 모두 넘긴 뒤 자신은 말의 오줌과 풀뿌리를 먹으며 버텼다. 마침내 경도에 돌아왔을 때 진평평의 흑기들은 기존의 10분의 1 정도만 남아 있었다.
더구나 당시 중상을 입은 황태자는 동이성 여자 포로의 간호 덕분에 회복할 수 있었는데, 바로 그녀가 1 황자의 생모인 영 재인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사람들은 진평평이 무슨 음모를 꾸며 정청풍이 북위 황제의 신임을 잃게 했는지 궁금했지만 아무도 진실을 알아내지 못했다. 심지어 경국의 황태후도 진실은 알지 못했다. 다만 몇몇 사람들만이 북위 황후의 사적인 일과 관련 있다고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날부터 진평평은 황제 폐하와 황태자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되었고 동시에 천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퍼지기 시작했다.
북쪽에는 소은이 있고, 남쪽에는 진평평이 있다.
얼마 뒤 기름을 바른 육중한 철문이 소리 없이 열리기 시작했다. 순간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으면서 문밖을 지키고 있던 감찰원 관리들이 뻣뻣하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약간 숙인 범한의 왼쪽 눈꺼풀이 두어 번 가늘게 떨렸다. 그는 감옥 안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20여 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칠팔십 노인이 되었음에도 소은은 여전히 밀정 수장다운 호흡을 유지하고 있었다.
쇠사슬이 바닥에 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점점 커졌다. 안에 있는 사람이 철문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무표정한 얼굴로 철문을 바라봤다. 2차 북벌이 있던 무렵 흑기들을 이끌고 고향에 내려간 소은을 잡은 진평평도 강자였지만, 그의 두 다리를 잃게 만든 소은도 만만치 않은 강자였다.
소은이 포로로 잡힌 뒤 경국은 두 차례 북벌을 단행했고 마지막 3차 북벌에서 위태롭던 북위를 결국 분열시켰다. 이후 북위 절도사였던 전씨 집안은 북위의 힘과 남아 있던 영토를 넘겨받아 지금의 북제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