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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57화 (157/1,108)

157화

3처 관리 중 한 명이 말했다.

“소신이 비록 제사 대인이 맡은 임무가 무엇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북제 황궁에 잠입해야 할 일이 생길 수 있으니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북제 황궁의 담장도 경국 황궁 못지않게 높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범한은 아무런 설명 없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 세계에서 자신만큼 벽을 잘 타는 사람도 없었다.

“비개 대인께서 제사가 3처 사람들보다 독약 제조를 잘한다고 해서 독약은 따로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범한의 장비를 꼼꼼히 점검하던 령 책임자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범한이 군침을 삼켰다.

“재료가 부족해서 독약 제조하기가 어렵습니다.”

“무슨 재료가 부족하십니까?”

“고양이 매듭과 비석, 마전자, 남해장이 부족합니다.”

“고양이 매듭은 쓴맛이 강해서 이번 임무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비석과 마전자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입니다.”

“사람들 이목을 끌 수 있는 처지다 보니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 가라방을 쓰심이 어떠합니까? 스승님께서 재작년에 시험하셨는데 마전자보다 마취 효과가 좋았습니다.”

령 책임자가 신난 목소리로 말하자 범한도 같이 신이 나서 말했다.

“하지만 비석은 꼭 필요합니다. 제가 담주에 있을 때 시험해 봤는데 비석이 화살촉에 바른 독약보다 효과가 빨랐거든요.”

관심 분야인 독약 이야기가 나오자 두 사람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옆에 있던 관리들도 똑같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함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토론 주제는 가장 느리게 사람을 죽이는 독약이 무엇인지, 가장 고통스럽게 사람을 죽이는 독약이 무엇인지부터 과부의 정조를 무너뜨릴 만큼 효과가 좋은 춘약은 무엇인지까지 다양했다.

과연 유명한 감찰원 3처답게 변태들만 모여 있었다.

3처를 나온 범한은 양 볼이 발그스름한 것이 평소와 다르게 흥분한 모습이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왕계년은 속으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범한이 행복에 겨운 얼굴로 헤벌쭉 웃었다.

“매일 인재 소리를 들으며 얌전하게 지내다 이렇게 실용적인 기술에 관한 대화를 나누니 정말 즐겁군요.”

그때 찻잔을 든 채 복도 끝에 서서 자신의 젊은 제자를 바라보던 비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럼 3처에서 머무는 게 어떠냐? 북제에도 가지 말고, 벼슬에도 오르지 말고, 황실 금고도 받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3처에서 지낼 생각은 없냐?”

범한은 비개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하고 싶은 게 분명하지 않았냐?”

비개가 혼탁한 갈색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경도에 와서 마음은 더 단단해진 것 같다만 권력을 맛보면 쉽게 길을 잃을 수 있단다. 지금도 어렸을 때처럼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느냐?”

범한이 한동안 머뭇거리다 공손히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비개가 껄껄 웃었다.

“정말 그 길을 가고 싶다면 아무런 가책 없이 사람을 죽일 줄 알아야 한다. 사람 죽이는 걸 즐길 줄 알아야 해.”

범한이 멋쩍은 표정으로 웃었다.

“저도 변태스럽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비개가 피곤해 보이는 두 눈을 가늘게 뜨더니 헛기침을 했다.

“네가 변태가 아니라면 어떻게 변태스러운 세상에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

비개 앞에 서 있으니 범한은 자침을 들고 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즐겁게 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스승님, 아까 원장 대인께서는 왜 저를 보고 한숨을 쉰 겁니까?”

“그건 네가 아가씨처럼…… 담력이 세지 않아 실망스러운 게지.”

대화가 끝나자 그는 스승 비개와 함께 거나하게 마실 생각에 일석거로 향했다. 이제 자신과 감찰원의 관계를 경도 사람 모두가 알았으니 비개와 함께 다녀도 문제가 없었다. 무거운 문서 더미를 들고 숨을 헐떡이며 따라가던 왕계년은 자신의 손에 극비 자료가 들려 있음을 알았기에 일석거에 같이 갈 수 없었다. 그는 수하의 밀정들을 불러 경계를 세운 뒤 마차를 타고 백작가로 향했다.

* * *

어두운 얼굴로 동궁 안에 앉아 있던 황태자는 손이 떨릴 정도로 세게 술잔을 움켜쥐었다. 한참을 씩씩대던 그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왜 동궁에 있는 여자들은 주제를 모르는 걸까?”

오늘 황태자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태상사 신 소경은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요 며칠간 발생한 일로 동궁 사람들은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항상 온화하던 태부 대인까지도 불같이 화를 낼 정도였다.

그래도 동궁의 손해가 크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부정행위에 연루된 관리 중에서 동궁과 관련된 사람은 극소수였다. 비록 예부 상서 곽유지가 감옥에 갇히긴 했지만 어차피 황태자 사람은 아니므로 손해를 입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황태자는 지난번 연회에서 곽보곤이 다른 사람 편에 서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고 이후 곽씨 일가가 장 공주 편에 서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범한이 곽유지를 실각시킨 데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고소했다.

“범한이 감찰원 제사일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신기물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는 범한과 여러 차례 술을 마시면서도 한 번도 감찰원 고위직에 있을 거란 의심을 하지 않았다. 온화한 미소를 짓는 젊은 청년이 감찰원 제사일 거란 상상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황태자 이승건이 고개를 저으며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범한은 세상 물정을 아는 사람이오. 자신의 소임을 다 하기 위해 부정행위를 폭로한 것이니 미리 동궁에 알리지 않은 것도 일리가 있소. 더구나 동궁의 체면을 많이 생각해 이번 일을 처리하였고, 일이 터지고 난 뒤에는 완아를 입궁시켜 직접 쓴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소. 그러니 나는 그가 동궁을 공격하려 일을 꾸몄다고 보지는 않소.”

신 소경은 범한과 친분이 두터웠으므로 내심 동궁이 그를 도와주길 바라고 있었다. 이에 황태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맞습니다. 범 제사가 비록 사전에 알리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충분한 해명을 하였습니다. 다만…… 범 제사가 곧 북제로 떠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소신이 시간을 봐서 저하와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보겠습니다.”

황태자가 콧방귀를 뀌며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만남을 주선한들 형부에서 있었던 일로 말이 많은 상황에서 범한이 나를 믿어 주겠소? 재상과 사남 백작이 아직은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나와 한지유의 관계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오. 솔직히 나는 백작가의 분노가 동궁에까지 미칠까 두렵소.”

황태자가 화를 내자 신 소경이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황태자가 이번 일을 신중하게 처리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동궁의 주인이 두 명이라는 데 있었다.

두 사람이 답답한 표정으로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태감의 고성이 들렸다.

“황후께서 오셨다!”

놀란 신 소경이 재빨리 황태자를 바라보며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는 당부를 하고는 한쪽에 엎드려 황후에게 예를 취한 뒤 동궁전을 뒤로했다.

황후가 아무 말 없이 아들을 바라봤다. 황태자도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 황후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실망과 슬픔이 뒤섞인 눈빛을 짓더니 한쪽 손을 들어 내리쳤다.

황후의 손찌검을 피한 황태자는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는 차갑게 노려봤다. 겁이 많은 황태자에게 이런 날카로운 눈빛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황후는 놀라 몸을 떨었다. 그녀가 아들의 손을 뿌리쳤다.

“이 어미가 잘못한 거라 말하고 싶은 겁니까?”

황태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소자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그러자 황후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범한이 2 황자와 유정강 놀잇배에서 만난 걸 모르십니까?”

황태자가 고개를 들어 황후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황후마마께서는 이 일을 제게 맡기실 생각은 없으셨습니까? 시로 명성을 떨친 범한이 둘째 형님을 만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황후는 씩씩대면서도 겁을 먹은 황태자에게 뭐라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황태자가 그런 황후를 바라보았다.

“황후마마께서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러시면 제 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모두 형님들에게 가버릴 것입니다.”

황후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나는 여전히 한 나라의 국모입니다. 이런 내가 말직 관리를 좀 혼냈다고 원망하는 것입니까?”

황태자가 비꼬는 말투로 쏘아붙였다.

“황후마마께서는 그날 한지유 상서를 움직여 범한을 건드려서는 안 됐습니다. 범한을 죽이지도 못할 거면서 뭣 하러 백작가와 재상가에 미움을 산 것입니까? 며칠 뒤에 한 상서를 조정에서 내쫓을 생각입니다. 가뜩이나 동궁 편에 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없는 상황인데, 마마의 경솔한 행동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편까지 쳐내게 된 것입니다.”

“한지유는 명을 받들어 법률에 따라 일을 진행한 것뿐인데 재상가와 백작가가 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동궁에서 그를 보호한다면 폐하께서도 황태자의 체면을 봐서라도 함부로 내치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부황께서 감찰원 제사인 범한을 마음에 들어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황태자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한지유는 이번에 너무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회시 부정행위를 밝히라는 건 부황의 뜻이었지 않습니까. 그런 부황의 뜻을 거스른 사람을 동궁에서 어찌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황후가 냉소를 지었다.

“이번 일로 대신들이 범한을 원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게다가 그 일에는 도찰원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전하의 고모가 현재 신양에 계시기는 하지만 고모를 따르는 세력은 여전히 조정에 남아 있습니다.”

“고모를 끌어들이지 마세요.”

황태자가 역겹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 2년 동안 고모께서는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지르셨어요. 게다가 북제와 결탁해 경국의 체면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았습니까. 도찰원에 있는 곽정 어사는 고모가 잠시 데리고 놀던 사람일 뿐입니다. 그가 감찰원에게 암살을 당해도 고모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실걸요.”

비록 몇 년 동안 장 공주와 동궁의 사이가 가까웠으나 범한의 글 종이가 눈송이처럼 경도 전체에 뿌려진 이후 황태자는 장 공주를 멀리하게 되었다. 물론 그가 장 공주를 멀리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황후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의지할 사람은 장 공주뿐입니다.”

“동궁은 부황에게 의지할 것입니다.”

황태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야 그는 유약한 모습을 버리고 황실 자제로서 정치적 판단 능력을 갖춘 것 같았다.

그러자 황후가 두 눈을 감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범한이 싫습니다. 반드시 그를 죽일 방법을 찾아낼 생각입니다.”

더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황태자가 힘껏 탁자를 내리치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죽인다고요? 범한이 신아의 남편인 걸 잊은 겁니까! 제발 고모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 마세요. 고모는 미쳤습니다. 미쳤다고요. 고모처럼 미쳐서 황궁에서 쫓겨나고 싶으신 겁니까?”

그 말에 발끈한 황후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손가락으로 황태자의 코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네가 뭘 안다고, 어?! 네가…… 네가 뭘 아는데!”

아마도 황태자의 말이 황후의 마음속에 있는 오래된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았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태감과 궁녀들은 일찌감치 멀리 숨어 버렸기에 동궁 안에는 황후와 황태자만이 남아 있었다. 오랜 침묵이 흐른 뒤 황후가 몸을 일으켰다. 쇠약한 그녀의 몸이 휘청거리자 황태자가 급히 일어나 부축했다.

황후가 슬픈 눈빛으로 자기 아들을 바라봤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 주름이 지더니 가녀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역대 왕조를 보면 황태자는 힘든 자리입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야 해요. 어미의 집안에는 지켜 줄 사람이 없습니다. 전하는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12년 전에 일어난 동란을 어미는 똑똑히 기억합니다. 저하가 자신의 것을 쟁취하지 못한다면 누군가가 저하의 것을 모두 뺏어가 버릴 거예요.”

안타까운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던 황태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소자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황후마마께서는 궁에 돌아가 쉬세요.”

황후가 고개를 저었다.

“저하는 모릅니다. 아무것도 몰라요. 요 며칠 동안 계속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들었어요. 과거 그녀가 경도에 왔을 때처럼…….”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황태자가 궁금증에 물었다.

바로 그때 동궁의 육중한 문이 활짝 열렸다.

“누구냐?”

놀란 황태자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등이 굽은 늙은 태감이 안으로 들어와 공손히 말했다.

“소신 홍사상, 명을 받아 왔습니다. 황태후께서 황후마마와 함께 함광전에서 담소를 나누길 바라십니다.”

그 말에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던 황후가 돌연 표정을 바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궁녀의 부축을 받으며 홍 태감을 따라 황궁의 진정한 여주인이 있는 궁으로 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황태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홍 태감의 무례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황태후의 측근인 그를 함부로 건들 수는 없었다.

황궁 안이 점차 어두워졌다. 황태자 이승건은 형부에서 있었던 황당한 일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기분이 울적해졌다. 정말이지 황후가 장 공주의 말에 휘둘리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순간 고모의 아름다운 얼굴을 생각한 그는 부끄러우면서도 강렬한 욕정에 사로잡혔다.

그가 동궁 안쪽으로 들어가고 얼마 뒤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궁녀의 옷을 목덜미까지 올려 얼굴을 가리자 풍만한 가슴이 드러났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쾌락에 휩싸이면서도 아름다운 여인을 떠올리며 자신의 멍청한 수단을 굳이 왜 뽐내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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