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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56화 (156/1,108)

156화

진평평이 작은 분홍색 꽃을 꺾어 조심히 자신의 머리에 꽂았다. 꽃이 머리 위에서 흔들리다 떨어지자 범한이 진평평의 머리를 다듬은 뒤 다시 꽂아 주었다. 그러자 진평평이 즐거운 표정으로 범한의 손을 토닥였다.

“네가 경도에 와서 이렇게 성장했으니 네 어머니를 볼 면목이 서는구나.”

당시 이야기가 궁금했는지 범한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몇 분이셨나요?”

이 질문은 당연히 자신의 어머니를 따르며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한 사람이 몇 명이냐는 질문이었다.

“네가 직접 세어 보아라.”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어 본 범한이 대답했다.

“여섯 명입니다.”

“그래. 너도 총명하긴 하다만 네 어머니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어.”

진평평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어렸을 때 비개 대인께서도 같은 말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네 어머니를 무척 그리워한다는 건 이야기하지 않았겠지. 어떻게 보면 그녀는 우리의 지도자였어.”

“상상이 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짐작이 가기는 합니다.”

“그래. 항상 너를 지키기 위해 사남 백작과 백작가가 헌신했다는 걸 잊지 말고 감사하도록 해라.”

진평평이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자 범한은 두 눈을 감고 생각했다. 위험천만했던 그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는 분명 많은 것을 내주어야 했을 것이다. 만일 당시 황실 사람들이 자신이 죽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자신은 살 수 없었을지 모른다.

“장 공주는 불쌍한 여자일 뿐이야. 그녀는 평생 아가씨의 광채에 가려져 살아야 했어. 경국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항상 네 어머니에게 가려져 폐하에게 관심을 받지 못했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그렇게 무시당했으니 질투에 눈이 멀어 미쳐 버린 것도 이상할 게 없지. 진짜 적은…… 아니다. 진짜 적 같은 건 없어. 그런 건…….”

담담히 말하던 진평평이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다 고개를 저었다. 마치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것 같았다. 한참을 혼자 중얼거리던 진평평이 다시 고개를 들고 말했다.

“먼저 감찰원을 장악한 뒤 황실 금고를 차지하면 누군가는 심상치 않음을 눈치챌 거야.”

“제가 뭘 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진평평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권력을 가진 신하가 되고 싶지 않으냐?”

범한이 침착한 눈빛으로 진평평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대인께서 저를 통해서 하려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러자 진평평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든 네가 계속 모르는 척해 주기를 바란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비록 그들과 친분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는 건 원치 않습니다.”

“성급한 생각이구나. 피는 다른 사람의 목덜미를 노리면서 정작 자신의 목덜미는 조심하지 않는 멍청한 사람들이나 흘리는 것이다. 본인이 조심하지 않는 걸 네가 어쩌겠다는 거냐?”

그 말에 범한이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는 눈앞에 있는 노인을 존경하고 신뢰했지만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 개척해 나가고 싶었다. 경도에서 감찰원 원장이 몰래 자신의 일을 도와줬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앞으로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는 먼저 자신의 의견에 따라 행동할 생각이었다.

진평평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손을 흔들었다.

“이제는 한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높은 곳에 서는 법도 배워야 해.”

“설마 천하를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보다 더 높은 곳을 봐야 할 거야.”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범한이 멍하니 서 있자 진평평이 말했다.

“이만 가보도록 해라. 북제에 가서는 조심하도록 하고.”

그러고는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다가 머리에 꽂은 분홍색 꽃을 뽑아 손으로 짓이겼다.

“소은을 죽이기 전에 먼저 너의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거라. 그리고 다른 세 가지 임무는 요령껏 알아서 하도록 해. 만약 상황이 허락한다면 신묘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신묘와 접촉한 적이 있는 사람으로는 북제 고하 국사가 유일하니까.”

“신묘까지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해보겠습니다.”

진평평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도 모험을 즐기셨지. 나는 네가 북제에 가서 죽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단다. 오죽이 몇 년간 너를 가르쳤는데도 북제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무척 실망스러울 거야.”

그의 메마른 손가락 사이로 분홍색 꽃잎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은은한 미소를 띤 그가 범한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 이렇게 어린데 진정한 적과 대적할 수 있을까?’

* * *

어머니의 가장 가까운 동료였던 진평평을 만나 대화를 나눈 범한은 이후 언약해를 만나 임무와 관련된 자료를 건네받았다. 자료 안에 담긴 북제의 상황은 상당히 복잡했다. 진평평은 이번 임무에 성공해 범한이 감찰원을 장악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만일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에게 목숨을 걸고 낯선 타국에 가라고 등 떠밀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정말 가고 싶었다.

이전 세계에서 병약한 몸에 갇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고 이번 세계에서는 남들과 다른 처지 때문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북제에 가서 자유롭게 다니고 싶었다. 그는 언약해가 알려 주는 북제에 가서 주의해야 할 부분과 조심해야 할 사람들을 머릿속에 깊이 넣어 두었다.

진지하게 자신의 말을 듣는 범한의 모습에 언약해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범한이 왜 이렇게 열정적으로 나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북제는 항상 정세가 불안정합니다. 황태후는 너무 젊고 황제는 너무 어린 탓이지요. 하지만 작년 전쟁 이후 북제 수도는 많이 안정되었다고 하더군요. 제사 대인이 조심해야 할 사람은 세 명입니다. 하도인, 삼호 그리고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고하 국사입니다.”

“무슨 도인이요?”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이 세계에는 도교가 없는데 어떻게 도인이 있을 수 있지?’

범한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언약해가 계속 말했다.

“하도인은 후당 쪽에 있는 무공 고수로 범 제사께서 작년에 죽인 정거수의 제자입니다. 그리고 상삼호는 북제에서 보기 드문 용맹한 장수로 북쪽 설원에서 오랑캐들을 막고 있습니다. 작년에 북제가 전쟁에서 패배한 뒤 젊은 황제가 그를 수도로 불러들였다고 하니 이번에 북제에 가시면 모쪼록 조심하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고하 국사는 4대 종사 중 한 명으로 속세 일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설명하던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히 말했다.

“고하의 마지막 제자가 올해 정식으로 수련을 끝내고 세상에 나왔다고 합니다. 제사 대인께서는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니 괜히 그와 얽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멍한 표정을 짓던 범한은 자신도 모르게 이전 세계 소설에서 여자 무예 고수가 실력을 숨기고 기녀로 살아가는 내용을 떠올리고는 씁쓸히 웃으며 물었다.

“설마 여자는 아니겠죠?”

언약해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릅니다. 아는 건 대종사의 마지막 제자가 최근 3개월 동안 북제 전역을 돌면서 무수히 많은 고수를 쓰러뜨렸다는 겁니다. 심지어 그가 전설에 나오는 하늘의 자손이란 말까지 돌고 있습니다.”

그가 범한을 힐끗 보고는 물었다.

“제사 대인께서는 하늘의 자손에 대해 아십니까?”

그 말을 들은 범한의 머릿속에 순간 어린 시절 비개가 자신에게 ‘하늘의 자손’에 대해 말해 주던 게 생각났다. 더구나 광신궁에 잠입해 장 공주와 장묵한의 대화를 엿들었을 때도 들었었다.

언약해의 설명을 모두 들은 범한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5백 년 만에 한 번씩 세상에 내려오는 하늘의 자손이라…… 저는 그런 말은 믿지 않습니다.”

언약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찰원에서도 연이어 전쟁에서 패배한 북제가 백성들의 믿음을 단결시키기 위해 절대 강자가 자국에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더 가능성 있네요. 감찰원에서도 제가 제사인 걸 이용해 민심을 움직이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 마지막 제자는 이름이 뭔가요?”

“해당타타입니다.”

“다소 여자 이름 같지만 남자였으면 좋겠군요.”

범한을 바라보는 언약해의 눈가 주름이 힘없이 처져 있었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제 아들 때문에 범 제사께서 고생이시군요.”

“형부에서 나갈 때 말하지 않았습니까. 반드시 언 공자를 무사히 데려오겠다고요.”

* * *

감찰원 4처 방에서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왕계년이 급히 뛰어와 범한의 손에 들려 있던 문서를 받아 들었다. 멀리 앞을 바라보던 범한이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북제에 갈 때 대인을 데려갈 생각입니다.”

“범 제사에게 신임을 받은 것 같아 저도 기쁩니다.”

왕계년이 빙그레 웃었다. 그는 사신을 공격하는 나라는 없으니 다른 계획만 없다면 편안하게 북제에 다녀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아는지 범한이 웃었다.

“대인을 데려가는 이유는 종추 대인 다음으로 감찰원에서 발이 가장 빨라 미행을 잘하기 때문입니다.”

왕계년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전에 종추를 만났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가 종추를 찾아가 한나절 정도 대화를 나눴을 때 종추는 과거 감찰원에서 추격자로 이름을 나란히 했던 왕계년이 문서 업무를 하며 별 볼 일 없이 지내는 것에 우울해했다. 그러던 중 왕계년이 범한의 심복이 되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자 오랜 벗이 이전의 영광을 되찾았다고 뛸 듯이 기뻐했던 것이다.

한편 3처의 령 수령은 밀실 앞에서 범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범한이 다가오자 그가 아무 말 없이 밀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 갑작스럽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난데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놀란 범한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공기가 흐르는 걸 보았다. 그러고는 독약을 제조하는 곳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령 수령이 범한을 힐끗 쳐다보고는 헤벌쭉 웃었다.

“몸매가 좋군요.”

그 말에 범한은 왠지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령 수령의 기쁨에 겨운 외침이 들렸다.

“딱 맞겠어!”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범한의 눈에 탁자를 밀고 있는 대여섯 명의 사람이 보였다. 탁자 위에는 상자 몇 개와 이상한 재질로 만든 옷이 놓여 있었다.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범한을 바라봤다. 한결같이 무표정한 표정인 게 아무래도 3처에서 오랜 시간 근무하면서 웃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범한의 몸을 자세히 살펴보던 그들이 감격한 눈빛으로 말했다.

“몸매가 정말 좋으시군요.”

감찰원 3처 사람들이 몸매가 좋다고 칭찬한 것은 자신들이 연구 제작한 옷을 시험하기에 딱 적합한 몸매였기 때문이었다.

옷을 입은 범한은 속으로 과거 비개가 자신의 침실에 들어왔을 때 이런 재질의 옷을 입고 있던 걸 떠올렸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령 책임자가 말했다.

“불을 막고 예리한 무기의 공격력을 감소시킬 수 있는 옷입니다. 하지만 만약 상대방이 개산부와 같이 산을 가를 정도의 위협을 가진 무기를 들고 있다면 위험하니 피해야 합니다.”

범한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양팔을 폈다. 경도에서 가장 유행하는 양식에 따라 만든 옷으로 뒤에는 모자도 숨겨져 있었다.

“암살 쇠뇌는 이리 내놓으십시오.”

령 책임자가 그의 왼손 팔뚝에 감추어진 암살 쇠뇌를 보고는 말했다.

그 말에 범한은 한숨을 쉬며 4, 5년 동안 가지고 다니던 암살 쇠뇌를 마지못해 탁자에 올려놓았다.

령 책임자가 그의 팔뚝을 보더니 탁자에 놓인 작은 상자를 열어 전체가 검게 칠해진 작은 모양의 암살 쇠뇌를 꺼냈다. 그러고는 그의 소매 안에 넣어 맞는지 확인하고는 물었다.

“7년 전에나 사용하던 낡은 물건을 아직도 가지고 다녔습니까?”

범한이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직 쓸 만해서 괜찮았습니다.”

령 책임자가 새로운 암살 쇠뇌의 구조와 발사 원리를 설명했다.

“연속으로 발사할 수 있지만 크기가 작아서 세 발밖에는 장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화살의 표면에는 갑 4호 독약이 발라져 있습니다. 갑 4호 독약이 뭔지는 아시겠지요?”

갑 4호 독약은 노란 박에서 추출한 치명적인 독약이었다. 새끼손가락으로 방아쇠의 민감도를 확인하던 범한이 물었다.

“세 장 정도 거리에서 쏠 수 있어야 하는데 가능할까요?”

“한 장 정도 거리에서는 가능한데 세 장 거리에서는 눈이나 목, 음낭 같은 부위를 조준해 맞힐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대인께서 사용하시는 비수는 비개 대인께서 무척이나 아끼시는 무기입니다. 칼날이 무척이나 예리해서 다른 것으로 바꿀 필요가 없겠군요. 저희가 이것 말고도 다른 무기와 도구들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보시고 이번 임무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골라 보십시오.”

범한은 탁자에 놓인 물건들을 신중하게 살펴보다가 몇 가지 물건을 골랐다. 다만 벽을 쉽게 오르게 해주는 쇠갈고리 장갑은 선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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