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만남이 끝난 뒤에도 자리에 남아 있던 언약해는 범한과 령 책임자가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독약과 암살 무기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범한이 비개의 마지막 제자라는 사실을 떠올린 그는 앞으로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관심사가 같은 두 사람이 멈출 줄 모르고 계속 대화를 나누자 비개는 미간을 찌푸렸다.
“소은이 어떤 인물인지 잊은 거냐. 그는 이미 모든 계획을 세워 둔 상태일 거야. 사신단이 북제에 들어서면 아마도 무도하강(江) 앞에서 한 달 동안 머무르려 할 것이다. 양국의 보호 아래서 자신의 몸 안에 여독이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인질 교환을 하려 하겠지. 그런 상황에 맞는 독약을 만들려면 그렇게 수다를 떨 여유가 없을 텐데?”
스승의 말에 두 사람은 아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진평평이 손뼉을 쳐서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북제에 가서 해야 할 임무는 총 네 가지네. 첫째는 언빙운을 무사히 데리고 와 1처 직무를 인계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포로 교환을 끝으로 양국의 협상이 완료된 걸 확인한 직후 소은을 죽이는 것이네.”
진평평의 목소리는 평범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셋째는 미인계 임무를 진행하는 것인데, 이 임무의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문서로 확인하도록 하게. 마지막으로 넷째는 앞에 세 가지 임무를 모두 끝낸 상황에서 북제의 첩보망을 새롭게 조정해 언빙운이 떠난 뒤에도 첩보가 차질 없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네.”
네 가지 임무 모두 쉽지 않았다. 범한은 겉으로는 침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긴장되고 불안했다. 진평평이 표정 없는 얼굴로 언약해를 향해 말했다.
“관련 자료는 자네가 준비해서 범한이 떠나기 전에 주도록 하게.”
언약해가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이제 방에는 범한, 진평평, 비개만 남아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릎 위 양털 담요의 주름을 매만지던 진평평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감찰원 밖에 있는 그 이름을 봤으니 이미 많은 일을 알고 있겠지.”
“오죽 아저씨가 말해 주었습니다.”
범한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그는 진평평 원장이 자신의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왜 그런지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는 일반인과 다르게 진평평에게 믿음이 갔다. 경국에서 상당한 권력을 가진 그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은 단순한 직감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오죽 대인이?”
진평평이 두 눈을 감고 인상을 쓰며 무언가를 생각하다 말했다.
“오죽 대인은 기억력이 좀 좋아졌나?”
범한이 대답했다.
“기억하고 싶은 건 모두 기억하고 잊고 싶은 건 모두 잊는 것 같습니다.”
진평평은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투박한 손가락을 만졌다.
“오죽 대인은 지금 경도에 있나?”
비개가 혼인날 밤에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저번과 똑같이 답했다.
“섭류운을 찾아 남쪽으로 간다고 했으니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자 방구석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예상치 못한 소리에 잔뜩 긴장한 범한이 소매에 손을 넣어 암살 쇠뇌를 쥐었다. 지금의 대화는 다른 사람이 듣게 해서는 안 됐다. 범한과 진평평 모두 내용이 새어 나간 뒤 벌어질 파장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긴장할 것 없다.”
진평평은 그의 소매 안 상황이 보이는 듯 침착하게 말했다.
“계속 6처 책임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길 바랐는데.”
그 순간 방구석에서 검은 그림자가 어렴풋하게 보였다. 검은 그림자가 진평평의 뒤로 다가오더니 점차 사람의 형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온몸에 검은 천을 휘감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봐도 고수가 틀림없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범한은 온몸이 긴장되었다. 가만히 상대를 바라보던 범한은 그가 16년 전 그날에 진평평의 마차 옆에 서 있다가 매처럼 돌진해 신비한 법사를 죽인 사람이라는 걸 알아냈다.
“외부 사람은 볼 수 없는 감찰원 6처 책임자 그림자이다.”
비개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경국 자객들의 우두머리인 그는 범한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지 진평평의 뒤에 가만히 서 있었다. 진평평이 쉰 목소리로 이어서 설명했다.
“오죽 대인 다음으로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자객이자 호위 무사다. 내가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이 사람 덕분이니까.”
진평평의 칭찬에 감사 인사를 하려는 듯 뒤에 있던 그림자가 허리를 숙였다.
진평평이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림자는 오죽 대인을 숭배하고 추종하는 사람이란다. 심지어 그가 사용하는 기술 중에는 어린 시절 오죽 대인의 기술을 보고 모방한 것들이 많이 있어. 그래서 네가 오죽 대인이 경도에 없다고 말했을 때 실망해서 한숨을 쉰 거야.”
혼자서 오죽의 기술을 모방해 고수가 되었다는 말에 범한은 놀란 눈으로 그림자 자객을 바라봤다.
* * *
잠시 뒤 비개가 진평평 원장이 타고 있는 바퀴 달린 의자를 밀고 감찰원 후원으로 나왔다. 뒤를 따르던 그림자는 이미 햇살을 피해 어딘가로 숨어 버린 뒤였다. 바퀴 달린 의자를 따라 걸어가던 범한은 오죽과 흡사한 그림자 자객의 행동에 마음이 심란해지면서, 곧 있을 임무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인 오죽이 그리워졌다.
경비가 삼엄한 후원은 생각보다 넓었고 담장 주변에는 높은 건물이 없어서 후원 안의 상황을 밖에서는 볼 수 없었다. 음침하기만 할 거라는 세상 사람들의 상상과 다르게 감찰원 후원은 상당히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푸릇푸릇한 잔디 위에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자란 나무들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주변에는 드문드문 야생화가 피어 있었다.
멀리서 검은색 바퀴 달린 의자를 본 감찰원 관리들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가던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름다운 가짜 산 아래 있는 수풀에 숨어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황궁보다 경비가 더욱 삼엄한 것 같았다.
“앞으로 네 것이 될 거니 익숙해져야 한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진평평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마치 평범한 물건을 건네주는 것처럼 평온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말에 범한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진작부터 진평평이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는 건 눈치챘지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그 모습을 본 진평평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 쉬었다. 그가 한숨 쉬는 이유를 모르는 범한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몇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그래, 말해 봐라.”
바퀴 달린 의자가 얕은 연못가에 멈춰 섰다. 연못 물이 투명해서 안에서 헤엄치는 금빛 물고기의 모습이 보였다. 진평평은 연못을 가만히 바라보며 범한의 질문을 기다렸다.
“제가 부정행위를 폭로해 많은 사람에게 미움을 산 건 알고 있지만 곽 어사와 한 상서가 저를 건든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들이 아버님과 재상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황후가 저를 건들려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질문에 진평평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비개가 범한의 어깨를 두드려 용기를 북돋아 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범한이 바퀴가 달린 의자를 살며시 밀며 걸어가자 침묵하던 진평평이 입을 열었다.
“내가 가진 패를 알고 싶은 것이냐?”
“최소한 그들이 저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말해 주셨으면 합니다.”
진평평이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냈다.
“역시 신중한 아이야. 너는 네가 짐작하고 있는 일들을 황후도 알고 있을까 봐 걱정하는 거지?”
“네, 맞습니다. 제가 짐작하는 일들을 황후가 알고 있다면 저를 해치려는 것도 이해됩니다. 문제는 제가 지금 가진 힘으로는 동궁과 맞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적들은 모두 종이호랑이일 뿐이야.”
진평평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오자 범한은 흠칫 놀라며 그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것은 네 어머니가 했던 말이다. 그러면서 상황을 파악할 때는 적을 얕잡아 보고 계획을 세우고 행동할 때는 적을 중시해야 한다고 말했지. 지금 네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이걸 반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황을 파악할 때 적을 지나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두려워해서 과감하게 행동하지 못하지 않느냐? 형부 법정에서 네가 무력을 써서 도망친들 누가 뭘 어쩔 수 있었겠느냐? 반대로 계획을 세워 행동할 때는 적을 너무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어. 그동안 감찰원에서 지켜 주었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경도에서 벌써 수백 번은 죽었을 거야.”
진평평이 양손을 허벅지에 편안히 올린 채 담담히 말했다.
“동궁을 너무 두려워할 것 없다. 재상 대인과 사남 백작을 포함해 경국 안에서 진정으로 강한 세력은 없어.”
범한은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이었다.
“무력을 가진 군부와 감찰원만이 진정으로 강한 세력이란 말입니까?”
그러자 진평평이 창백한 집게손가락을 가로로 흔들었다.
“아니. 경국에서 진정한 강자는 단 한 명밖에 없단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 폐하 말입니까?”
그의 대답에 진평평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천하의 군권을 장악한 폐하는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고도 백관들과 후궁들을 휘어잡을 수 있단다.”
범한이 약간은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황제께서는 참 태평하시겠습니다.”
그러자 진평평이 자신의 마른 양손을 비볐다.
“감찰원은 폐하의 것이다. 나는 그저 대신 관리하는 것뿐이지. 너도 이점을 잊지 말거라.”
범한은 담담한 표정으로 감찰원 원장을 바라봤다. 그는 황제에 대한 진평평의 충심을 믿을 수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검은 바퀴 달린 의자가 여러 차례 얕은 연못가를 맴돌자 헤엄치던 금색 물고기는 어지러운지 더욱 깊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한편 감찰원 관리들은 진평평과 범 제사의 친밀한 모습에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잠시 뒤 진평평이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참 빨라. 그녀의 아들이 이렇게 순식간에 커버리다니.”
진평평의 말에 범한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아들이라고?’
잠시 고민하던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님의 얼굴이 궁금합니다.”
“네 어머니의 초상화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단다. 가장 뛰어난 화공이 그린 것인데 그 화공은 결국 오죽의 손에 죽임을 당했지.”
“초상화는 황궁 안에 있습니까?”
진평평은 범한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12년 전에 폐하께서 황후의 세력을 거의 다 제거했으니 동궁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할 것 없다.”
범한은 경도에 피가 흐르던 그날 밤 이야기를 알고 있었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께서 황후를 폐위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거야 황태자의 생모이고 황태후께서 총애하시기 때문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진평평이 말끝을 흐리며 웃는 듯 마는 듯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의지할 세력도 없고 멍청하기까지 한 황후를 어디서 또 찾으실 수 있겠니?”
그 말에 범한은 마음이 서늘해지면서 황제는 쉬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황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는 진평평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정체가 드러날 거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 갓난아기는 16년 전 그날 죽었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멍청한 황후가 한지유를 시켜 너를 건든 것은 단순히 2 황자와 만난 사실에 화가 나 그런 것일 뿐이다.”
순간 진평평이 미간을 찌푸리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사남 백작이 너에게 황자들과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말해 준 거로 아는데? 네가 2 황자와 만난 사실을 경도 귀족들이 모를 거라 생각한 것이냐?”
범한은 황후가 2 황자를 경계해 자신을 해치려 했다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에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