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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53화 (153/1,108)

153화

밖에서 질서 있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감찰원 4처 수장인 언약해가 형부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위풍당당하게 따라오는 감찰원 밀정들이 보였다.

감찰원 사람들을 본 곽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언 대인께서 재판을 보러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언약해는 도찰원 어사인 곽쟁의 말을 무시한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청년을 보며 공손히 말했다.

“언약해, 범 공자를 뵙니다.”

범한도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언 대인께서 오시지 않았으면 제가 무력을 사용해 도망칠 뻔했습니다.”

그의 농담에 언약해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한지유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감찰원이 온 이유를 추측하다가 말했다.

“범한 대인은 법정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관리들을 구타하여 그 죄가 무겁습니다. 더구나 곧 양만리를 비롯한 범인들이 이곳에 올 것이니 대질 신문한다면 부정행위의 진상이 명명백백 밝혀질 것입니다.”

“필요 없습니다. 동복 객잔에 갔던 관리들은 현재 감찰원 목철 대인에게 체포된 상황입니다. 지금 감찰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으니 한 상서께서 시간이 되실 때 데려가시기 바랍니다.”

체포하러 간 사람이 체포당하다니 형부의 체면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일이었다. 화가 난 한지유가 언약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감찰원이 언제부터 형부의 일에 관여했던 것입니까? 왜 체포하는 걸 방해한 겁니까?”

“회시 부정행위는 감찰원에서 처리하고 형부와 대리사는 협조만 하라는 게 폐하의 뜻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던 언약해는 대리사 소경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미소 지으며 계속 말했다.

“협력하기로 한 이상 순순히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양만리를 포함한 네 사람은 감찰원에서 조사한 결과 혐의가 없는 것으로 결론 났습니다. 혐의가 없는 사람을 형부에 넘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수사가 잘못되는 걸 막으려 목철 대인이 관리들을 체포한 것인데 어찌 잘못된 일이겠습니까?”

그러자 곽쟁이 정색했다.

“그래도 조정의 법률에 따라서 범한 대인은 형부의 소관에 있습니다. 감찰원이라 해도 형부 법정에 서 있는 사람을 데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범한과 감찰원의 관계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곽쟁과 한지유는 범한이 감찰원에 부정행위를 신고했고, 비개 대인과 사제 간이라서 감찰원이 그를 보호하려 한다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곽쟁이 규정을 들먹이자 언약해가 귀찮은 듯 미간을 찌푸리며 범한을 바라봤다. 범한은 그때까지도 관리들의 칼날에 둘러싸여 있었다.

“감히 범한 대인에게 이런 무례를 저지르다니.”

언약해의 말에 곽쟁이 불같이 화를 냈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관직이 낮은 범한에게 무례를 저지를 게 뭐가 있을까. 더구나 도찰원 어사인 그는 평소 감찰원과 부딪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감찰원의 무서움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길길이 날뛰는 곽쟁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던 언약해가 한지유를 향해 두 손을 모아 공손히 말했다.

“한 대인, 본관이 범한 대인을 모시고 가려 하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한지유는 감찰원 사람들이 온 이상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그의 배후에서 일을 꾸민 사람도 진평평이 이 일에 관여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물러설 수는 없었다.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사람을 데리고 가겠다니요. 언 대인, 그건 규정상 맞지 않습니다.”

그 역시 조정의 법률을 핑계로 거절하자 언약해는 난처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그러자 곧이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불만 섞인 신음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감찰원 관리들의 공격에 13개 관청의 관리들은 아무런 반격도 못 하고 무기를 압수당한 것이다. 감찰원 4처는 5처 다음으로 무예를 잘하는 부서라서 형부 관리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포위가 풀리자 범한은 옷을 털며 언약해 옆으로 걸어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왕계년 대인을 부를 생각이었는데 언 대인께서 수고해 주시는군요.”

당황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한지유가 탁자를 내리치며 고함쳤다.

“조정의 법률을 이런 식으로 무시하다니 감찰원에서 모반을 꾀하는 것인가? 내가 내일 상소를 올려 폐하께 너희들을 모두 처벌해 달라 요청할 것이야.”

언약해가 담담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감찰원 여덟 부처에 소속된 관리들은 오로지 황제의 명만 따릅니다. 그래서 감찰원 관리는 긴급한 상황에서 경국 법률을 무시하더라도 폐하의 명이 있지 않은 이상 6처 3사 2원 중 어느 곳의 심문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설마 한 대인께서는 이 조항을 잊으신 것입니까?”

곽쟁이 비웃었다.

“언 대인은 심문을 받지 않을 수 있지만 범한 대인은 아니지 않습니까? 범한 대인이 언제 감찰원 사람이었습니까? 게다가 그 조항은 감찰원에서 5년 이상 직책을 유지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입니다. 올해 열일곱인 범한 대인이 설마 열두 살 때부터 감찰원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건 아니겠지요?”

범한이 감찰원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곽쟁과 한지유는 그가 오늘 형부의 문을 나갈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게다가 만약 강제로 나가려 한다면 경국의 법률을 무시하는 대죄를 저지르는 것이므로 재상과 사남 백작도 더는 그를 보호해 줄 수 없거니와 폐하도 죄를 물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곽쟁과 한지유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두 사람을 바라보던 언약해는 고개를 돌려 범한을 향해 미소 지었다.

언약해와 눈이 마주친 범한이 웃으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옥으로 만든 여의를 열더니 뚜껑을 감찰원 하급 관리에게 던져 주고는 안에서 나무로 만든 요패를 꺼냈다. 옅은 황색 나무 요패에는 ‘제사’라는 두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곽쟁과 한지유가 목을 길게 빼고 요패에 적힌 글자를 바라봤다. 단박에 의미를 이해한 두 사람은 쓰러지듯이 풀썩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범한을 바라봤다.

범한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이 말을 끝으로 그는 언약해와 함께 감찰원 하급 관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형부 법정에서 빠져나왔다.

법정 탁자 앞에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 곽쟁은 화가 나 안색이 푸르딩딩하게 변했고, 그 옆에 앉은 한지유는 의자에 기댄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누구도 범한이 감찰원 제사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제사란 무엇일까? 감찰원 여덟 부처에서 독립된 초월적인 직책으로 감찰원 안에서도 가장 베일에 싸여 있었다. 조정에서도 감찰원 제사가 누군지는 알지 못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잔인한 수단을 부리는 무서운 사람이라는 소문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무서운 제사가 문장가로 소문난 범한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폐하께서 어명을 내리시지 않는 이상 아무도 감찰원 제사를 심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범한을 심문하라 말씀하지 않을 테니 이제 어쩌실 겁니까?”

한지유가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물었다. 형부 계단을 내려가는 범한과 감찰원 사람들을 바라보던 곽쟁이 냉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렇게 빠져나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왜 처음부터 자신이 감찰원 제사라는 걸 밝히지 않은 걸까요? 언약해가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자백을 받아 체포할 거란 걱정은 하지 않은 걸까요?”

한지유도 그 점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앞으로 벌어질 일이었다. 범한이 풀려난 이상 곧이어 보복이 있을 게 분명했다. 범한이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생각하던 그는 자신의 뒤를 봐주는 세력이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 * *

형부 법정에서 나온 범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원장 대인에 의해서 제가 제사라는 게 밝혀지니 허무하군요.”

언약해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원장께서는 알맞은 시기가 오면 대인이 제사라는 걸 밝힐 생각이셨습니다. 다소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대인을 위해 서생들이 형부 법정 밖에 모여 있으니 신분을 밝히기 좋은 기회인 셈이지요.”

범한은 고개를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오늘은 그에게도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들 뒤에 숨은 강력한 세력은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위해 더 심한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만일 창산에서의 수행으로 실력을 기르지 못했다면 삼엄한 법정에서 그렇게 웃으며 태연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언약해가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바라보다 말했다.

“감찰원은 특수한 기구라서 평판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장 대인께서는 범한 대인이 부정행위를 폭로한 걸 널리 알려 호응을 받은 뒤 감찰원 제사인 걸 밝힌다면 사람들의 반감을 줄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겁니다.”

“그랬군요……. 이미지 메이킹을 한 셈이군.”

범한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언약해가 옆에 있는 부하가 건네준 여의 뚜껑을 다시 돌려줬다.

자신의 손에 들린 옥 여의를 매만지던 범한이 입을 열었다.

“황태자의 체면을 깎기 위해서 이번 부정행위를 폭로한 게 아닌데 한 상서가 저렇게 강하게 나오는 것을 보니…… 동궁의 힘을 믿고 저러는 게 아닌지 걱정되는군요.”

언약해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가 아닌 황후를 믿는 것입니다.”

“황후요?”

범한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진다는 생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황후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을 알아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옥 여의를 버리고 싶어졌다.

그의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언약해가 웃었다.

“황궁에서 하사한 물건을 함부로 버리는 것도 대죄에 해당합니다.”

언약해의 지적에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제가 감찰원 제사라는 사실이 알려졌으니 관아에서도 저를 심문하려 하지 않겠군요?”

“관아에서는 심문할 수 없지만 황궁에서는 가능합니다.”

언약해가 자기 아들보다도 체구가 작은 범한의 어깨를 두드리다 걱정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한숨의 의미를 알고 있는 범한이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 대인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안전하게 데리고 오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형부 문을 나가자 거리에 나와 있는 서생과 백성들이 보였다. 부정행위를 폭로한 범한이 무사히 형부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던 범한은 비로소 오늘 형부에서 자신이 반항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생각했을 때 옳은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권력의 압박에도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밝게 미소를 지었다.

형부에서 벌어진 일은 곧장 경도 전체에 전해졌다. 관리들을 비롯한 경도 사람들은 감찰원과 재상 그리고 백작가가 당장 형부와 도찰원에 반격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후 진행된 전시에서 태학 5품 봉정인 범한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황태자와 2 황자의 바로 아랫자리에 앉았다. 이로써 회시 부정행위에 대한 황제의 태도가 명확해진 셈이었다. 분에 넘치는 자리에 앉은 범한은 술도 마시지 않고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게 불편한 모양이었다.

형부에서의 일을 계기로 경도 백관들은 이미 그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감찰원이 범한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형부 상서인 한지유와 도찰원 어사인 곽쟁의 체면은 땅에 떨어졌고, 그날 밤 황궁 안에서 상당한 소란이 있었다는 소문도 들렸다.

감찰원 제사는 수많은 밀정을 통솔하며 관리들의 생사에 관여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에 범한을 단순히 글을 잘 쓰는 명문가 자제라 생각하던 백관들은 비로소 그의 능력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전시가 끝난 뒤에도 감찰원은 회시의 부정행위를 꾸준히 조사했다. 하지만 범한은 조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범한이 며칠 뒤 사신으로 나갈 준비를 하려고 그런 거라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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