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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52화 (152/1,108)

152화

곽정은 애초부터 범한에게 형벌을 내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저 말로라도 겁을 줘서 경도의 관리들의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 주기 위해서였다.

범한은 여전히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그래선 아니 되지요.”

대리사 소경도 이번 부정행위에 연루되어서인지 궁금한 게 많았다.

“이리도 큰일에 연루된 범한 대인이 변명하려 하지 않는데 어째서 형벌을 받으면 안 된다는 거요?”

그런데도 범한은 여전히 이런저런 말을 둘러대며 감찰원을 끌어들이는 게 낫겠다 싶었다.

“감찰원 기밀인지라 소인은 감찰원 허락 없이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조사가 진행되다 보니 세 사람은 실로 답답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분노가 가득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범한의 입을 열 수 있을까. 그들 배후에 있는 사람들은 이번 사건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범한을 데려와 결코 집으로 돌려보낼 생각은 없었다.

바로 그때, 구석에 있던 사제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뛰어 들어와 한지유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러자 바로 얼굴색이 변하더니 두 눈에 두려움이 서렸다.

범한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위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몸 안에서 패도의 기가 돌기 시작하여 한지유의 대화 중 몇 단어가 들려서 동궁이라는 두 글자는 확실히 알아차렸다. 누가 소식을 전한 건지 또 형부 상서가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같은 시각, 쪽지 두 장이 어사대부 곽정과 대리사 소경에서 전달됐다. 무표정한 얼굴로 쪽지를 받아 든 곽정과 달리 대리사 소경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저는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두 분이 남아서 마저 조사하시지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범한도 내심 놀랐다. 대체 무슨 쪽지기에 대리사 소경이 저리도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걸까? 형부에 오기 훨씬 전에 범한은 이들에 대한 파악을 끝낸 상태였다. 형부 상서는 겉으론 공명정대해 보이지만 실제 동궁 사람이었고 대리사 소경은 추밀원의 진씨 집안과 밀접한 사이였다. 그리고 어사대부 곽정은 젊었을 때 장 공주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물론 범한 뒤에 감찰원이라는 무시무시한 힘이 없었다면 이 또한 오랫동안 숨겨 왔던 이 관계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관아에 근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봐라, 태학 봉정 범한은 관아에서 행패를 부리고 이번 부정행위 사건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이에 따라 대죄를 물으니 저자를 힘껏 치거라!”

한지유는 얼굴 근육이 살짝 일그러지더니 무슨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보였다.

대리사 소경이 먼저 자리를 떠난 걸 보고 그 또한 앞으로 형부 관아에 훨씬 험악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뒤에 버티고 있는 사람은 처음부터 재상가와 백작가를 그냥 둘 생각이 아니었다. 범한은 사늘한 눈빛으로 한지유의 눈을 바라봤다.

“설마 상서 대인께서 무슨 술수를 부리시려는 건 아니죠?”

어사대부 곽정 또한 한기 서린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가져오너라!”

막대기 두 개가 범한의 가장 연약한 정강이뼈 부위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형부의 13 아문에서 주로 해왔던 일이기에 큰 힘은 들지 않았지만 그 강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파랗게 질린 범한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저 탁탁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의 다리 밑으로 조각들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그의 정강이뼈가 부러진 게 아니라 중간에 막대기 두 개가 부러져 나간 것이다.

만만치 않은 상대가 나타났다.

범한이 깊이 심호흡해 몸 안에 있는 난폭한 정기를 일으키자 입고 있는 옷이 펄럭이며 황후가 하사한 옥으로 만든 여의가 움직였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13개 관청의 관리들을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던 그는 상황이 자신의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들이 재상과 사남 백작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어코 자신을 고문하려 한다면 가볍게 맞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두 발자국 정도 앞으로 걸어가 두 동강 난 몽둥이를 발로 찼다. 그러고는 애써 침착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곽정과 한지유를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멀리 신양에서 지내고 있는 미친 여자의 존재를 잊은 것이었다. 다만 한지유를 움직인 것이 자신의 행동에 화가 난 황태자인지 아니면 황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외양간 거리 사건이 일어난 지도 오래되었기에 경도 사람들은 범한을 시를 잘 쓰는 문관으로만 생각했지 무예 고수라는 건 잊고 있었다.

모두가 화들짝 놀란 가운데 칼집에서 칼을 빼는 서늘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수히 많은 칼날이 형부 법정에 서 있는 범한의 앞을 가로막았다.

형부의 관리들이 사용하는 고문 기구는 특별하게 제작된 것이라서 7등급 고수들도 이겨 내지 못했다. 하지만 범한의 몸 안에 있는 난폭한 정기는 미친 듯이 강렬해서 고문에 사용하는 막대기를 절단해 버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딪힌 관리들은 그제야 눈앞에 있는 연약해 보이는 문관이 사실은 북제 8등급 고수 정거수의 배를 가른 사람이란 걸 기억해 냈다.

관리들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서 범한을 향해 겨누었다. 서슬이 퍼런 칼날이 자신을 둘러싸자 두 발자국 앞으로 갔던 범한은 다시 뒷걸음을 쳤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법정에 있는 한지유와 곽쟁을 향해 말했다.

“이렇게 함부로 행동해서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그 말에 한지유와 곽쟁이 흠칫 놀라며 법정에 서 있는 아름다운 청년을 바라봤다. 범한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안에 담긴 의미는 단순하지 않았다. 재상 임약보는 오백안의 일 때문에 조정에서 기세가 한풀 꺾여 있었지만 여전히 경국 백관들의 우두머리였다. 그리고 호부 상서 범건은 어려서부터 황제 폐하와 같이 자란 사이였다. 순간 한지유는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면서 지금까지 한 일이 후회되었다.

하지만 곽유지가 실각한 것에 원망을 품은 곽쟁은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몰래 장 공주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에 일이 여기까지 온 이상 조용히 끝낼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이를 갈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어명에 따라 심문하는데 걱정할 게 뭐가 있겠는가?”

곽쟁의 당당한 말에 한지유도 번뜩 정신이 들었다. 범한을 형부 법정에 세운 이상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그렇소. 범한 대인이 이번 부정행위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한다면 고문을 하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만약 인정하지 않는다면 경국의 법률에 따라 고문할 수밖에 없소.”

그 말에 범한이 웃는 듯 마는 듯 얇은 입술을 달싹였다.

“열다섯 개의 대죄, 열다섯 개의 대죄라니…….”

그러고는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경국 법률은 고칠 필요가 있어.”

법률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황제만이 고칠 수 있었다. 그러니 그 말은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었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아무도 듣지 못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백작가 전체가 반역으로 참수당할 수 있었다.

한지유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저 부패한 관리를 붙잡아라!”

명령이 떨어지자 검을 빼 들고 있던 관리 중 두 명이 범한의 목덜미에 검을 겨누었다.

범한이 한숨을 쉰 뒤 소매 안에 넣고 있던 두 손을 조용히 꺼냈다. 그러고는 총알처럼 재빨리 손을 움직여 두 관리의 손목을 공격한 뒤 그들의 가슴을 밀었다.

행동이 너무도 빨라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서걱, 하는 소리가 두 번 울리더니 챙!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서 두 관리의 고통에 겨운 비명 소리가 퍼졌다.

서걱, 하는 소리는 두 관리의 손목이 잘리는 소리였고, 이후 울린 소리는 그들이 쥐고 있던 검이 날아가는 소리였다. 날아간 검은 어느새 형부 편액 양 끝에 꽂혀 태양이 낳은 악마의 뿔처럼 섬뜩해 보였다.

범한이 두 관리의 가슴을 밀자 휙 날아가더니 뒤에 있던 의자에 부딪쳤다. 의자가 산산조각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신음이 들렸다.

범한의 예상치 못한 무예 실력에 놀란 관리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침착하게 범한의 모습을 바라보던 곽쟁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관리를 구타한 죄도 추가되었군.”

그의 말을 이해한 한지유도 득의양양한 미소를 띠었다. 범한에게 죄명을 씌우는 게 중요했으므로 그가 반항을 거세게 하면 할수록 두 사람에게 유리했다.

곽쟁이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한 대인께서는 고분고분하게 행동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학식과 무술 실력 모두 갖추고 계신 분이니 형부 법정에서 도망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어명을 어겨 반역자가 되고 싶으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상황이 만족스러운지 곽쟁이 손가락으로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며 계속 말했다.

“범한 대인께서는 반역할 마음이 없으시다면 순순히 형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시선이라 불리며 서생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대인께서 형부에서 도망치는 대죄를 저질러 집안을 몰락시킨다면…… 생각만 해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범한이 침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소신이 너무 놀라서 그랬습니다.”

그는 자신이 형부에서 도망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문을 받고 싶지도 않았기에 하는 수 없이 시간을 끌며 벗어날 방법을 모색할 계획이었다. 그가 냉철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도 형부에서 도망치는 대죄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으니 여기서 두 분과 대화를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의자에 앉은 뒤 눈을 내리감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두 분이 계속 고문하려 한다면 반항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고문을 하지 않는다면 저도 두 분의 심문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앉아 있을 것입니다.”

“제멋대로군! 저놈을 붙잡아라!”

범한의 당당한 말에 한지유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러자 범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옆에 있는 탁자를 내리쳤다. 손바닥에 모여 있던 정기에 나무 탁자가 산산조각 부서졌다.

그가 온화한 눈빛으로 주변 쓱 훑어보자 평상시 귀신도 두려워하지 않는 관리들이 겁을 먹고 움직이지 못했다.

경국이 세워진 이래 형부 법정에서 이처럼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그래서 범한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현실이 아니라 이전 세계에서 봤던 연극 무대 같다고 생각했다. 태연하게 등받이 의자에 앉아 있는 범한을 앞에 두고도 관리들은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형부에서 도망칠 수도 없었고 그를 잡아서 고문할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 이어졌다.

등받이 의자에 앉은 범한은 속으로 자신이 화를 내거나 반격을 준비할 때 항상 의자를 이용한다고 생각했다. 열두 살 때 주 집사에게 따귀를 때렸을 때도 의자를 이용했고, 경도에 처음 온 날도 처마 아래에서 분노를 억누르며 유씨 부인을 상대했을 때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늘 형부 법정에서도 그는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몽둥이로 자신을 가르치려 하는 고관들을 바라보던 그는 속으로 배후에 장 공주 외에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 짐작했다.

형부에는 다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검을 쥔 13개 관청의 관리들에게 둘러싸인 범한을 보며 곽 어사는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오늘 호부 상서 범건과 재상 임약보가 다른 일에 붙잡혀 꼼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양만리만 증인으로 오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하는 그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일을 폐하께 알린다면 더는 부친 사남 백작의 권력에 기대 오만방자하게 행동하지 못할 겁니다. 제가 범한 대인의 죄를 밝히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잠시 뒤 양만리가 증언한 뒤에도 반항한다면 역모죄로 처벌할 수밖에 없습니다.”

범한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곽 대인,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된 이상 저도 체면 차리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만일 대인의 말과 다르게 양만리가 오늘 이곳에 오지 않는다면 후환에 대비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적나라한 위협이었다. 경국이 세워진 이래 형부 법정에서 5품 관리가 형부 상서와 도찰원 어사를 위협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담담한 범한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느껴지자 한지유는 불길한 기분에 흠칫 놀라 말했다.

“범한, 자네는 조정의 관리이지 검으로 위협하는 무인이 아니지. 오늘 형부에서 이렇게 소란을 피웠으니 앞으로 어떻게 자네를 처벌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러자 범한이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

“곽유지 대감이 부정행위로 실각한 것에 대해 보복을 하려고 죄 없는 저를 고문해 자백시키려는 것 아닙니까. 이런 일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누가 조정을 우러러볼 수 있겠습니까.”

곽쟁이 차가운 말투로 냉담하게 말했다.

“말하고 싶은 대로 지껄이시오. 범한 대인은 부정행위에 대해 자세한 정보가 있으면서도 왜 조정이 아닌 감찰원을 이용해 처리하였소? 이건 조정을 무시한 것 아니오?! 내가 내일 조정에 가서 사남 백작이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볼 것이오!”

곽쟁의 당당한 말에 범한의 수려한 얼굴이 순간 살기로 번뜩였다. 그가 일어나 두 명의 고관을 노려보면서 주변 분위기가 긴장되자 관리들이 칼날을 급소에 겨누었다. 당장이라도 찌를 듯한 모습이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형부 밖에서 언약해의 목소리가 들렸다.

“감찰원이 명을 받아 처리하는 일에 형부가 개입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감찰원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깨지자 범한은 아쉬운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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