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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50화 (150/1,108)

150화

과거 시험장의 부정행위 관련 사항도 범한과 결코 무관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감찰원에서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예부 상서 곽유지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더라도 동궁에 크게 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주 잠시 황태자 쪽에서 범한을 의심하는 정도였다. 게다가 합격자 명단 중 동궁에서 필요로 하던 사람들 세 명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황자와 추밀원을 비교해 봤을 때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범한은 서재에 앉아서 왕계년이 베껴 온 황방을 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최근 이틀간 경도는 매우 떠들썩했다. 회시 총감독관인 곽유지와 시험관 두 명이 감찰원에 끌려갔는데 회시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인 호명을 맡은 거중랑 범한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사람들의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눈여겨봤던 유생 중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사천립을 제외한 나머지 유생들이 무난하게 합격했다. 전시 후의 결과가 어떻든 그건 순수하게 개인의 운에 달려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은 도울 길이 없었다.

서재에서 나와 정면에 파란색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범한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얼른 몸을 숨기려 다시 방에 들었다. 아버지가 오늘 자기 집까지 찾아올 줄 누가 알았을까.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사남 백작 범건은 이미 호부 상서로 임명되었지만 근엄한 얼굴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는 범한이 차마 닫지 못한 방문을 열어젖히며 여전히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넌 어제 또 어딜 갔다 온 거냐!”

범한은 먼저 인사를 올린 뒤 대답했다.

“아버님, 어젯밤 경도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잠시 산책을 하고 온 것뿐입니다.”

“쯧, 네가 어제 동복 객잔에 간 걸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범건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건넌방에 있던 임완아도 범건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달려 나와 여종에게 얼른 차를 내오라고 시켰다. 범건은 며느리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며 방에 들어가 쉬라고 손짓을 보내더니 바로 고개를 돌려 범한에게 아주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험장 일과 관련된 사안이 얼마나 복잡한데 그렇게 함부로 돌아다니는 게냐! 지금까지 네 마음대로 했으니 됐다. 내가 너에게 집에만 있으라고 한 건 이 풍파에 몸을 숨기고 있으라는 거였다. 그런데 어젯밤 동복 객잔에 가 유생들을 만나다니. 오늘 합격자가 나왔으니 이제 다 알겠구나. 네가 어제 만난 유생 중 몇 명이 합격했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니?”

범한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소자, 나이는 어리나 나름 스승의 신분으로 별 뜻 없이 유생들을 보러 간 것뿐입니다. 황방은…… 그 정도면 어찌 된 일인지 다들 알 텐데 크게 개의치 마시옵소서.”

“안 그래도 요즘 감찰원에서 비리를 파헤치고 있는데 그 계기가 다 네가 건네준 쪽지 때문이라던데.”

범건이 냉랭하게 말했다.

“네가 정말 나라를 위해서 계획한 일이라면 네가 마음에 둔 사람을 삼갑 명단에 넣지 말아야 했다. 그리고 단지 이번 회시를 통해 네 세력을 키우고 싶었던 거라면 더더군다나 곽유지를 자리에서 끌어내리지 말아야 했단 말이다.”

사남 백작은 앞에 있는 아들을 보고 있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곳이든 저마다 규칙이란 게 있기 마련이란다. 경도의 관료 사회도 예외는 아니란다. 조정에는 청렴한 관리도 있고 탐욕스러운 관리도 있지. 그리고 참언을 하는 신하와 간언을 하는 신하도 있고 말이다. 둘은 서로 구분이 아주 명확하지. 네가 간언을 하는 신하가 되고 싶다면 절대 중상모략을 피해야 할 것이다.”

범한은 아버지의 화가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것을 알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저는 간언을 하는 신하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참언을 하는 신하도 물론이고요. 그저 저는 힘이 있는 신하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

범한의 말에 방안의 공기가 갑자기 얼어붙을 듯 차가워졌다. 한참 후 범건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권력을 쥔 신하? 대체 어떤 신하가 권력을 가질 수 있단 말이냐?”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재상도 권력을 갖고 있지. 네 아비인 나도 그렇고 진평평도 권력을 가지고 있지. 그럼 너는 그런 신하들을 보고 권력을 가진 신하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아니요. 권력은 황제만이 갖고 계시지요.”

“그럼 어떤 권력을 가진 신하가 되겠다는 것이냐?”

“말 그대로 손에 권력을 쥐고 있어 아무 걱정 없는 신하요.”

범한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범건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범한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런 험난한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내면 깊은 곳에 드리워진 짙은 검은 그림자 때문이었다.

* * *

한참 뒤 범건이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앞으로 이런 소란은 피우지 말거라. 진평평이 한 번은 널 보호해 줄 수 있지만 평생 보호해 줄 순 없어. 그러니 경고하는데 감찰원과는 가까이하지 말거라.”

범한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알았으니 계속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범한은 아버지가 자신이 감찰원 일을 하게 될까 걱정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범건이 천천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이번 일은 네가 경솔했다. 곽보곤이 대전에서 한 발언으로 곽씨 집안이 장 공주 사람이란 걸 알게 됐더라도 네가 직접 움직여서는 안 된다. 사전에 나에게 말해 줬더라면 나와 재상이 함께 힘을 써서 아무도 모르게 처리할 수 있었던 일이야. 지금처럼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이지도 않았을 거란 말이다.”

범한은 아버지의 말이 옳다는 걸 알았다. 혼자서 감찰원과 손을 잡고 위험을 무릅써 가며 곽 상서를 몰아내어 모든 사람이 아는 결말을 만들어 냈을 뿐이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오히려 주도권은 감찰원에 넘어가 버렸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가 말문을 열었다.

“사실 이번 일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뿐이에요.”

이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값싼 정의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범한은 그것만은 지키고 싶었다. 지금은 앞으로 진평평이 어떤 일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조금 걱정스러웠다.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을 눈치챈 범건은 눈을 부릅떴다.

“이제 그만 환상에서 깨어나거라. 진평평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일에 네가 관련되어 있단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게 만들 거야.”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아버지 말씀이 옳았다. 진평평은 동궁의 황태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명성이 중요한 사람이었고 감찰원을 손에 쥐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들의 서재에서 나오기 전에 사남 백작은 담담하게 말을 전했다.

“앞으로는 성숙한 모습을 기대하마. 권세를 가진 신하가 되겠다는 유치한 말을 접어 두거라. 더 이상 나한테 말할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 * *

2월 말의 어느 날, 갑자기 경도 관료 사회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번 회시의 부정행위에 대해 이처럼 신속히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감찰원에서 뇌물을 준 유생 명단을 입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명단의 출처가 바로 거중랑인데 다름 아닌 시선으로 잘 알려진 범한이었다.

그는 관료 사회에 오랫동안 자리 잡은 폐단에 신물이 난 데다가 가난한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한 유생들은 그 노력에 비해 정당한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 것에 화가 나 조정에서 활개를 치는 탐관을 속출해 내고자 몰래 명단을 얻어 황제에게 상서를 올렸다는 내용이었다.

소문은 신기하게도 범한의 용기와 지혜가 더욱 화제가 되었다. 분명히 그 명단이 기밀이라곤 할 수 없지만 경국 관리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쪽지로 꼽혔다. 범한이 이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감찰원 8처의 그 관원이 속임수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이 소문이 돌자 범한은 잠시 예부 관리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경국 백성과 유생들에게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태학과 같은 동료들 사이에서는 침묵을 지켰지만 오늘날 범한은 유생들에게 엄연한 정신적 지도자가 된 셈이었다.

* * *

범한은 옷깃과 소매를 매만지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옷이 너무 새것 같나?”

그러곤 옆에서 걱정 가득한 얼굴로 범한을 쳐다보는 누이동생에게 말했다.

“무슨 걱정이야? 난 경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황태자 쪽 사람인데.”

목소리도 작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범약약은 범한의 의도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임완아는 범한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듣지 못했지만 아마 들었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범약약처럼 크게 걱정하지 않고 싱긋 웃으며 황후마마가 하사한 옥 여의 같은 작은 장식품을 남편의 허리춤에 달아 주며 옷매무새를 만져 주었다.

“일찍 돌아오세요.”

사남 백작이 말한 대로 범한의 행동은 과했는지 역시나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소문이 돌아 경도가 발칵 뒤집히자 모든 사람의 시선과 관심이 범한에게 쏠렸다. 부정행위로 자리에서 물러난 관리들의 배후에 있는 인물은 범한이 가진 배경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슬슬 반기를 들 준비를 멈추지 않았다. 오늘 새벽, 어사대의 어린 어사들이 상서를 올려 범한도 부정행위에 가담했는지에 대해 탄핵하고 나섰다.

범한은 집을 나서는 대로 형부 관아에 가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원래 시험장 내 발생한 부정행위에 대해서는 감찰원에서 담당했다. 그런데 이번 부정행위로 인해 물러난 관리들은 감찰원이 범한을 조사하도록 결코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형부에서 나서게 된 것이다. 형부는 재상과도 거리가 멀었고 범건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도련님, 안녕히 다녀오세요.”

문까지 따라와서 인사를 올리는 여종 사사의 얼굴에는 존경심이 묻어났다. 범한은 경도에 온 후로 좀처럼 얼굴을 보지 못했던 여종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어렸을 때 안녕히 다녀오라는 말은 그리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얘기를 했었던 것 같은데요.”

그러자 사사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다시 인사를 올렸다.

“그럼 도련님, 속히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어. 그럼 죽 좀 끓여 줄래요? 담주에서 가져온 대추도 좀 넣고요. 솜씨가 녹슬지 않았나 오랜만에 맛 좀 봐야겠어요.”

그러곤 범한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물었다.

“지금 베끼고 있는 건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요?”

최근 들어 범한은 자신과 함께 자란 사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아예 서점으로 보내 자신의 책을 베끼게 했다. 더 이상 이 집에서 여종으로 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최근 책을 베끼는 일이 많아서 범한과 얘기를 많이 나누지 못해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던 사사는 범한의 한마디에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거의 다 해갑니다.”

“그 정도면 아주 잘하고 있어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나서며 곁에 있는 아내와 누이동생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보라고, 사사가 약약보다 더 침착하잖아.”

범약약이 여전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사사가 오늘 일이 얼마나 심각하지 모르니까 그러지.”

실제로 심각했다. 범한 때문에 옥에 갇히고 자리에서 물러난 관리들이 많았다. 그래서 조정 관리들도 재상과 범건에게 얼굴을 돌릴 각오를 하고서라도 상서를 올려서 형부가 이 일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고 할 정도면 그만큼 심각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북적인 적 없는 남쪽 거리에 사람이 가득 몰려들었다. 형부 관아에서 보낸 관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도둑인 양 사자 석상 뒤에 숨어 있었다. 저택 앞에는 범사철이 집안 호위 무사와 하인들을 거느리고 나와 기다란 빗자루로 관리를 때리며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범한이 오늘 형부로 넘겨진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백성들은 이미 범한과 이번 시험에서 벌어진 부정행위가 관계가 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이 사건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하고 그저 단순하게 범한이 한 행동은 옳았고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범한은 그들에게 여전히 좋은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이 형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된다니 진심으로 걱정스러웠다.

범한이 입구에 서서 자신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이 어린 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진평평이 둔 이번 수가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범한은 옆에 있는 등자경에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사천립과 그 친구들은 오늘 어디에 있는가?”

“도련님 분부대로 감찰원 관리들이 아무도 모르게 살피고 있습니다. 왕계년 대인이 네 사람을 정왕 세자에게 보내면 조정에 도련님을 견제하는 관리들도 이번 일로 도련님을 걸고넘어지지 못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도련님께서 이번 일로 정왕 세자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거절했습니다.”

등자경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범한은 등자경이 자신이 절대로 원하지 않았던 상황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기에 참으로 뜻밖이었다. 자신이 이 네 사람을 정왕 세자에게 보낸다면 안전해 보이긴 할 터. 하지만 동궁에서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자신도 이번 부정행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단순한 정의감에서 한 행동으로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2 황자의 입장에서 보면 황태자를 공경하는 데 있어 자신과 동궁의 관계를 결코 되돌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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